취임 400일을 넘긴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여전히 달변이었다. 1년 전 인터뷰 때처럼 자신감 있고 확신에 찬 답변이 이어졌다. 대담은 재벌개혁, 공정거래법 개편 등 공정위 현안으로 시작됐지만 주제는 소득주도성장, 최저임금,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지침) 등 경제 전반으로 확장됐다. 김 위원장은 “문재인정부가 4년 가까이 남았지만, 개혁을 위한 시간은 1년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며 “이 기간에 국민들이 ‘이 방향으로 가면 기대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를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도 “공정위가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면서 “결코 실패의 길로 갈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김 위원장의 표정은 비장해졌다. 인터뷰는 지난 26일 서울 공정거래조정원 집무실에서 이뤄졌다. 이후 추가 답변을 받아 보완했다.



 

 

“올해 말이면 삼성의 순환출자구조 모두가 해소될 것이다. 삼성의 변화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런 변화는 후퇴하지 않을 변화다.”

김상조 위원장은 삼성의 지배구조 개선에 대해 “2년 전쯤 삼성의 태도 변화를 예견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며 “한꺼번에 변화를 이루는 방식도 필요하지만, (삼성처럼) 누적적 변화가 필요한 영역도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이어 “삼성의 경우 삼성물산 합병과 관련해 공정위가 ‘500만주 처분’ 결정을 ‘900만주 처분’으로 변경했는데, 이를 삼성이 받아들였다”며 “과거의 삼성이라면 행정소송을 했을 사안으로, 이런 변화는 작은 변화가 아니다”고 말했다.

앞서 2015년 공정위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으로 삼성SDI와 삼성물산의 기존 출자 고리가 강화됐다고 보고 “삼성SDI가 보유한 삼성물산 전체주식(900만주) 중 500만주를 매각하라”고 결정했다가 지난해 12월 ‘순환출자 가이드라인’을 변경, 삼성물산 주식 400만주를 추가로 처분하라고 결정했다.

-재벌 개혁의 방향과 속도를 놓고 재계와 시민단체 모두 불만이다.

“취임하고 1년 동안 갑을 관계에서는 입법적 성과를 냈는데 공정거래법은 손도 못 댔다. 재벌개혁을 바로 법 개정을 통해 접근한다면, 실패의 첩경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선례가 있다. 참여정부 시절 집권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2004년 총선에서 국회 과반을 차지했을 때 국가보안법 개정 등 4대 개혁입법이 추진됐다. 야당이 반발하면서 논란이 커졌고 그 바람에 경제법은 손도 못 댔다. 재벌 개혁을 포기하거나 후퇴시키는 일은 없다. 그걸 위해 20년을 살아온 여정이다. 재벌개혁에 성공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누구보다 고민해 온 사람이다. 취임 1년 차에는 현행법 집행을 통해 시장에 시그널(신호)을 주는 방식으로 가고, 2년 차에는 법 개정을 통한 방식으로 계획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김상조 이미지(‘재벌 저격수’) 때문에 재벌개혁을 강하게 밀어붙일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이게 원래 의도한 속도와 강도였다.”

-기업들의 자발적 개선 수준에는 만족하나.

“만족이란 표현은 어폐가 있고, 실망스러울 정도는 아니라고 평가한다. 올해 말쯤이면 삼성의 순환출자가 모두 해소될 것으로 본다. 현대차도 엘리엇 때문에 지체되긴 했지만 지배구조 개선이 가시화하고 있다. 이 외에 10여개 그룹 개편이 있었다. 이런 변화가 작게 보일 수 있지만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변화를 한꺼번에 이루는 방식도 필요하지만, 쌓아가는 방식도 필요하다.”

 
 

 

-그건 시민단체에도 하고 싶은 말인가.

“그렇다. 이런 생각은 ‘어공’(‘어쩌다 공무원’, 정무직 공무원을 이르는 속어)이 되고 갑자기 갖게 된 게 아니라 시민운동하는 동안 갖고 있던 것이다. 이 방법이야말로 기업 변화를 현실에 안착시킬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한다. 경험을 통해 쌓아온 가장 성공확률이 높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얼마 전에는 신세계그룹에서 총수 일가가 사익편취 지분을 처분했다. 이런 변화들이 누적되면 한국의 경제질서, 기업구조가 과거와는 달라지고, 이 변화를 국민이 느낄 것으로 본다. 결코 더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민단체들은 각 영역에서 신념을 가지고 우리 사회의 이미지를 그린다. 하지만 정부는 전체를 보면서 시민단체들의 요구와 양립 가능한가, 실현 가능한가를 판단하고 책임지는 역할을 해야 한다. 요구를 다 쓸어담는 것은 무책임하다. 친정인 시민단체의 인내심을 당부드린다.”

-시민사회에서는 지난 1년 동안 충분히 인내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부가 시민사회 요구를 전부 수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와 시장이 일정한 간극을 유지하며 건강한 긴장 관계를 만들어야 하듯이 정부와 시민사회도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 정부와 시장이 유착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를 우리는 (박근혜정부에서) 지켜봤다. 정부와 시장이 유착되는 것은 비판하면서 정부와 시민사회는 가까워야 한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다. 공정위가 앞으로 어떤 정책을 내더라도 시민사회와 재계 양측에서 비판받을 것이다. 어느 한쪽이 지지하고, 다른 쪽이 반대하는 대책을 내는 것이야말로 문제다. 양쪽에서 비판받는 게 개혁으로 가는 길이다.”

 

 

-공정거래법 개편도 그런 기조 속에서 추진되고 있는가.

“공정거래법 전면 개편에 앞서 많은 실태분석 결과들이 나왔다. 정부 부처의 일반적 관성이라면 문제를 지적했으니, 규제하고 금지할 것이라 예상한다. 그렇게 가면 또 실패한다. 시장에 맡길 부분이 있고, 정부의 제도적 조치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 또 조치가 꼭 공정거래법일 필요도 없다. 상법, 금융법, 세법 또는 형법에 담아서 전체 규율 체계를 효과적으로 조합하는 게 중요하다. 문제를 지적했다고 해서 다 공정거래법에 담을 것이라고 예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혁신성장 생태계 조성을 위해 공정위 역할이 크다”고 말했다.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나.

“공정위의 주된 역할은 재벌개혁과 갑질 근절이지만, 본연의 역할은 경쟁 주창이다. 경쟁이 잘되게 기업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기득권을 가진 기업이 아니라 창업 기업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혁신의 출발점이다. 창업 기업이 역할을 하려면 기존 기업의 남용행위를 근절해야 한다. 특히 4차 산업의 총아라 불리는 플랫폼 사업자의 지배력 남용 근절에 힘쓸 계획이다. 국내 사업자일 수도 있고, 국외 사업자일 수도 있다. 이와 함께 스타트업(신생 벤처)과 같은 창업 기업이 M&A를 통해 지분을 팔면서 혁신을 지속할 수 있도록 M&A를 활성화해 나가겠다. 과거에는 공정위가 M&A에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주홍글씨를 덧씌웠는데 이제 그 글씨를 지우겠다. 기획재정부, 중소기업벤처부 등과 함께 M&A 활성화를 위한 공동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결합 제한) 규정을 고려하면서 대기업이 벤처투자를 활성화할 수 있는 방안을 공정거래법 개편안에 담겠다.”

-금산분리 규정에 얽매여 재계의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설립 요구를 수용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다.

“공정위는 벤처지주회사가 CVC 기능을 사실상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규제를 정비할 계획이다. CVC 인정은 소수의 기존 지주회사에 대한 규제완화이고, 따라서 특혜 시비가 있을 수 있으나, 벤처지주회사 활성화는 모든 그룹의 조직형태에 적용가능한 틀이다. 따라서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사용한 ‘포용적 성장’이란 표현은 ‘소득주도 성장’의 대안 개념인가.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소득주도 성장에서 잘 전달되지 않은 요소를 부각하기 위한 용어다. 소득주도 성장 출발점에서 최저임금 문제가 불거졌지만, 원래 소득주도 성장은 노동시장 안에 있는 사람과 그 밖에 있는 사람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다. 최저임금만으로 소득주도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포용적 성장은 임금계약 밖에 있는 사람을 위한 사회복지를 보다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임금주도와 사회복지, 양대 축으로 간다는 의미다. 

 

-국민연금이 특별한 경우에 한해 경영참여를 허용하는 내용의 ‘스튜어드십코드’를 채택했다. ‘연금 관치주의’라는 비판이 나온다.

“스튜어드십코드는 이미 글로벌 트렌드인데 우리나라만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다. 스튜어드십코드의 핵심은 경영진과 투자자가 주기적으로 만나 위기에 공동 대응하라는 것이다. 이런 활동을 ‘인게이지먼트’(engagement)라고 부른다. 우리 말로는 ‘관여’로 해석하는데 시민단체는 왜 이렇게 미적지근하냐고 불만이다. 이건 스튜어드십코드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스튜어드십코드를 경영 간섭이라고 보는 재계도 잘못된 판단이다. 국민연금이 발표한 방안이 국제적 기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민연금의 독립성 논란은 별개의 차원이다.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코드를 2,3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구축하겠다고 한 이유는 지배구조, 국민연금 기금운용체계 개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국민연금의 지배구조 개선에 필요한 시간이기도 하다.”

 

-전직 공정위원장과 부위원장이 퇴직 간부들의 불법 재취업을 도운 혐의로 구속됐다.

“지난 1년 동안 ‘로비스트 규정’ 등 공정위 내부에도 비가역적 변화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외부에서는 공정위 적폐가 청산되지 않았다고 보는 사람이 많은 것을 잘 알고 있다. 검찰 수사 결과가 발표되면, 추가적인 내부혁신방안을 발표할 계획이다.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동시에 공정위 직원들의 사기와 소명의식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대담=조남규 경제부장, 정리=안용성 기자, 사진=하상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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