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백발이다. 얼굴은 야위었고 몸집은 왜소하다. 18대 의원 시절 탈북자 강제 북송을 저지하기 위해 10일 넘게 서울 종로구 효자동 중국대사관 앞에서 단식을 했던 2012년 겨울, 그때 그 모습이다. 박선영 사단법인 ‘물망초’ 이사장은 “나이 탓인지 다른 곳은 회복됐는데 얼굴은 단식 이후에도 좀체 회복되지 않는다”면서 웃었다. 북한이 월북했던 우리 국민 6명을 전격적으로 송환했던 지난 25일 동국대 교수 연구실로 박 이사장을 찾아갔다. 박 이사장은 국군포로 얘기가 나올 때마다 “이런 나라가 어디 있느냐”면서 목청을 높였다. 그는 2012년부터 국군포로와 탈북자를 돕는 단체 ‘물망초’를 설립해 이사장을 맡고 있다. 물망초는 ‘나를 잊지 마세요’라는 꽃말을 가졌다. 한국 현대사의 희생자들인 국군포로와 탈북자들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취지로 그가 직접 지은 이름이다. 국군포로나 탈북자들에게 ‘역사의 조난자’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박 이사장이다.



―‘역사의 조난자’란 표현이 마음에 와 닿는다.

“18대 국회의원 시절 4년 내내 이 표현을 썼다. 교수 시절에도 그 말을 썼지만 전혀 전파가 안 됐는데 의원 되고 국회 대정부 질의 하면서 쓰니깐 사람들이 쓰기 시작했다. 국회의원 돼서 좋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국군포로나 탈북자뿐만이 아니라 아직 우리 곁에 오지 못한 사할린 한인들과 시베리아 동포들, 이런 분들도 모두 ‘역사의 조난자’들이다.”

―국가의 부름을 받아 전쟁터로 나갔다가 붙잡힌 국군포로들이야말로 대표적인 역사의 조난자들이다. 역대 정부에서 이들은 철저히 잊혀진 존재였다.

“그렇다. 우리 정부도 국민도 차분하게 돌아봤으면 한다. 위안부 문제를 외면하는 일본만 욕할 게 아니다. 우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우리나라는 국군포로 문제를 지금도 국방부 군비통제과에서 다루고 있다. 미국 국방부는 ‘포로 실종국’을 별도로 두고 있다. 우리로 치면 하나의 국(局)이다. 그들은 전쟁에 나갔다가 실종된 미군의 뼛조각 하나까지도 찾고 있다. 북·미 대화가 단절됐다고 하지만 북한에서는 아직도 미군 유해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국군포로가 군비통제과 업무라는 건 난센스다. 북한을 의식해서 그런 것인가. 두 차례나 이뤄진 남북정상회담 기간에도 국군포로 문제는 의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비겁한 거다. 북한을 왜 의식해야 하나. 이 부분부터가 이상하다. 전쟁 포로는 반드시 송환하도록 제네바 협약은 규정하고 있다. 북한이 국군포로를 송환하지 않는 것은 제네바 협약 위반이다. 국제법 위반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 정부는 국군포로 문제를 남북문제로 접근하려 하는데 당장 유엔으로 가져가야 한다. 6·25전쟁 정전협정 당사자인 유엔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다.”

―6·25전쟁 당시 국군포로로 끌려갔다가 북한에서 숨진 손동식씨 유해가 최근 중국을 거쳐 국내로 봉환됐다. 국군포로 규모는 파악이 되나.

“생존 중인 국군포로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지금도 북한의 국군포로들로부터 살려 달라는 편지가 저한테 오고 있다. 제3국으로 가 있는 사람들도 이렇게 편지를 보낸다. 자기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옛날 사진을 첨부해서 가족의 인적사항과 살던 집 주소까지 적어서 보내왔다. (그러면서 그는 노란색 보자기에 싸인 편지 뭉치들을 보여줬다) 한 500명 정도 된다. 지금도 이런 편지를 보내오는데 국군포로가 없다고 할 수 있나.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너무 화가 나서 이분들 얘기를 책으로 출간하기 위해 유력 출판사 8군데를 찾아갔는데 모두 난색을 표명했다. 그래서 직접 출판하려고 지난주에 도서출판 물망초를 등록했다.”

―상품성이 없어서 출판을 못하겠다는 것인가.

“진보진영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이 편지들을 다 읽어봤나.

“다 읽어보고 번호 매기고 분류했다. 눈물 없이는 못 읽는다. 이 편지를 읽고 나서 국방부에 국군포로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단 한 분도 모셔오지 못하는 한, 국방부는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 군대 가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고 얘기했다. 군대 안 가려고 어깨 빼고 무릎 망가뜨리는 젊은이들을 감옥에 보낼 자격도 없는 거다. 저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해 눈 감고 입 다물고 있으면서 극장 가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영화 보면서 기립박수 치는 게 말이 되나.”

―이 편지들이 북한에서 어떤 경로를 통해 전달되나.

“물망초에서 만든 물망초 학교가 있다. 거기 다니는 탈북학생들은 북한에 있는 사람들하고 거의 매일 통화한다. 우리가 방송에 나가면 그 다음날 바로 연락이 온다. 아버지를 모시고 갈 테니 도와달라는 자녀도 4명 있었고, 북한에서 나가고 싶다는 할아버지도 있다.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보여주며) 내 휴대전화로 이렇게 (북한에서) 문자도 온다.” 

―우리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국군포로는 어느 정도인가.

“구체적 숫자는 없다. 정전협정 체결할 때 유엔군이 인민군측에 내밀었던 것이 8만2700여명이다. 이 가운데 81명이 돌아왔고 30분이 돌아가셔서 현재 51명이 한국에 남아있다. 81명 가운데 80%는 포로가 아니라 실종자 또는 전사자로 분류됐던 분들이다. 포로 숫자 자체도 정확한 게 없는 거다. 이런 나라가 어디 있나.”

―국군포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정부가 해야 한다. 내가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북한에 문제제기를 할 것도 없이 유엔에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국군포로를 아직 붙잡고 있는 현행범이라고 고발하면 된다. 이미 81명이 탈북해서 남한으로 넘어왔다. 살아있는 증인 51명이 있다.”

―한국에 돌아온 국군포로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84세 된 국군포로 할아버지 한 분은 휴지 주워서 한달 20만원으로 생활하고 있다. 이게 말이 되는 나라인가. 국방부에 얘기하면 거기서는 다들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가서 직접 봐야 한다. 정착금으로 3억∼4억원씩 줬다고 하는데 많은 돈이 아니다. 그분들에게 제공된 임대아파트 가격까지 다 쳐서 계산한 거다. 그분들 남한으로 오는 브로커 비용만 1억원이 든다. 일반인 탈북비용보다 훨씬 많다.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할아버지들을 총알 날아오는데 업고 뛰어와야 하니 당연히 비싸다. 민주화 유공자들에게는 몇 배 많은 돈이 지급되고 있지 않나.”

―정부의 실질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얘기인가.

“정부가 국군포로 요양원을 만들면 그분들 숙식이 해결된다. 얼마 전에 남재준 국정원장이 국군포로들을 만나줬다. 그 자리에서 남 원장은 ‘그동안 국가가 (국군포로 문제에) 너무 소홀했다. 대한민국이 그동안 비겁했다’고 사과했다. 그나마 정부 바뀌고 국가정보원장이 국군포로를 만나는 일이 성사됐다. 뭐가 상식이고 비상식인지 모르겠다.”

―국군포로 유해 송환할 때 정부 도움은 받았나.

“전혀 못 받았다. 외국에서 유해 들어오는 게 힘들지만 청춘을 국가에 저당 잡힌 사람들이다. 돈을 달라는 게 아니다. 이분들이 떳떳하게 귀국할수 있게 해달라는 거다. 그런데도 못 도와주겠다고 하더라.”

―한국에 유해 도착할 때 합당한 예우는 갖춰졌나.

“언론이 없다면 해주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건 안 된다고 얘기했다. 봉고차 안에서 유해에 태극기 덮어주겠다고 하더라. 정부가 국군포로 존재를 국민들에게 알리고 싶어하지 않은 거다. 국군포로는 북한에서도 노예처럼 수용소 생활을 했고, 대한민국에 와서도 ‘통제 대상’이다. 오죽하면 국군포로가 군비통제과 소관이겠나. 국군포로는 한국에서도 포로다. 이 일 하면서 성질 많이 나빠졌다. 싸우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 되더라.”

―지금도 국가가 도와주면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는 국군포로가 있나.

“오늘도 군비통제과 직원을 만나기로 한 이유가 지난번 국군포로 유해를 송환하고 나서 북한에서 연락이 온 분이 있다. 자기 생년월일과 주소 등을 보내왔는데 이분이 국군포로가 맞는지 확인해서 알려주기로 했다. 하물며 짐승도 죽을 때는 자기 고향 쪽에 머리를 두고 죽는다고 한다. 귀소본능은 누구한테나 있는 거다.”

―정부는 돈을 주고 국군포로 등을 송환해오는 ‘프라이카우프’(Freikauf·자유를 사다) 제도를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의원 시절 내내 주장했던 내용이다. 북한이 국군포로가 없다고 하면 없는 건가? 아직 국내에 51분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

―북한 입장도 있으니 송환 작업은 정부가 물밑에서 작업하는 게 낫지 않나. 독일도 물밑에서 해결하지 않았나.

“그렇지 않다. 독일은 공개적으로 했다. 정부에서 예산을 지원했고 독일 언론사가 중간에서 돈을 전해주는 역할을 했다. 한국 언론들은 뭐하고 있나. 서독 언론은 베를린 장벽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단 하루도 기사를 쓰지 않은 날이 없었다. 우리 언론은 냄비처럼 쉽게 달아올랐다가 쉽게 식는다. 당시 동독 정치범 한명 데려오는 데 우리 돈으로 2000만원에서 시작해 5000만원까지 지급됐다. 그렇게 큰 돈이 아니다. 우리가 그동안 북한에 준 것을 생각하면 국군포로들을 다 데려오고도 남는다.”

대담=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정리=김민서 기자

■ 박선영 사단법인 물망초 이사장 약력

▲1956년 출생 ▲1978년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 졸업 ▲1995년 서울대 대학원 법학박사 ▲1977∼1989년 MBC 보도국 기자 ▲2008∼2011년 자유선진당 대변인 ▲18대 의원 ▲2012년 사단법인 물망초 이사장 동국대 교수 재직

최근 게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