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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도를 꿈꾼 개혁파
그는 어려서부터 사회 의식이 뚜렷한 개혁 성향의 행동파였다. 13살 때인 1972년, 리처드 닉슨 공화당 후보와 조지 맥거번 민주당 후보가 맞붙었던 미 대선 당시 아이오와 맥거번 선거 캠프에서 선거 운동을 도왔다. 아이오와주 머스커틴 고등학교 재학 시절 총학생회장을 지내고 미식축구팀 쿼터백을 맡으며 리더십을 발휘했다. 미 브라운대에 입학한 그는 정치학이나 철학을 전공하고 싶어했다. 철학에 대한 관심은 아이오와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딴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는 “어머니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퇴계 이황과 마틴 루터 킹 목사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시며 큰 뜻을 품고 세계를 위해 봉사하라고 가르치셨다”고 회고했다.
김용 박사가 의사의 길로 선택지를 바꾼 과정엔 아버지가 있었다.
“브라운대 재학 시절 아버지와 함께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 일입니다. 아버지가 ‘앞으로 무슨 공부를 할 작정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대답했지요.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차를 길 옆에 세우더니 ‘네가 전문의 실습을 마친 다음에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든 좋다. 하지만 너는 소수 인종이다. 기술(skill)이 필요하다. 기술을 먼저 익힌 뒤 다른 것들을 추구하도록 해라’고 말했습니다. 저의 처지에선 아버지가 옳았습니다. 꿈을 추구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약간의 기술을 지닌다면 그 일은 더욱 나아질 것입니다.”(‘로드 트립 네이션’ 회원들과의 인터뷰)
■전환점이 된 아이티 봉사
1982년 하버드 의대에 입학한 의대생 김용은 흑인 출신 대통령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정체성 문제로 고민했다. 동시에 의사로서 사회에 기여하는 길을 부단히 모색했다.
김 박사는 그때 특별한 두 사람을 만났다. 그의 박사 논문 과정을 지도한 하버드대 아서 클레이만 교수(의료 인류학)와 1987년 의료봉사 단체인 ‘파트너 인 헬스’(PIH)를 함께 결성한 하버드 동료 폴 파머가 그들이다. 클레이만 박사는 지난달 김용의 다트머스 총장 지명 소식을 듣고 “그는 대학 총장의 새로운 전범이 될 것”이라면서 기뻐했다.
“브라운 대학과 하버드 의대 시절은 인생의 목표를 확립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사회 정의를 위한 일에 헌신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한국에서 봉사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한국보다 더 나의 도움이 절실한 나라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하버드대 교지 인터뷰)
클레이만 교수는 평소 의료봉사 활동에 관심이 많은 김용을 최빈국 아이티에서 봉사 활동을 펼치던 파머에게 소개했다. 80년대 중반 김용의 아이티 방문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참혹한 가난과 그에 수반되는 질병, 영양실조….
“아이티는 나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토록 절망적인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때 나는 아이티와 같은 빈국의 참혹한 상황을 개선하는 일이야말로 나에게 맡겨진 소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하버드대 교지)
그 이후 김용은 아이티와 페루 등지를 돌며 가난한 이들의 질병 치료에 헌신했다. 이 기간에 김용은 가난과 붙어다니는 질병인 결핵 퇴치를 위해 온 힘을 쏟았다.
◇ 김용 박사가 WHO 에이즈 국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아프리카 우간다를 방문,
현지 주민들에게 에이즈 예방 및 치료 활동을 벌이고 있다.
‘파트너 인 헬스’ 웹사이트
■이종욱 박사와의 만남
김용과 고 이종욱 전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의 인연은 결핵을 통해 맺어졌다. 페루에서 결핵 퇴치 자원봉사 활동에 나섰던 이 전 총장의 부인은 젊은 의학도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고 이 전 총장에게 그를 소개했다. 그 인연으로 김용은 2003년 1월 WHO 사무총장에 취임한 이종욱 박사의 총장 자문관으로 발탁됐다. 이듬해 김용에게 맡겨진 WHO 에이즈 국장직은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지금은 벤치마킹 대상이 된 ‘3×5 운동’(2005년까지 300만명의 에이즈 환자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자는 운동)은 ‘행동파’ 김용이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획기적 시도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이 운동을 시작했을 때 WHO 내부에서조차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가 심했다.
“나는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러 면에서 행동주의자입니다. 그런 행동주의자가 WHO라는 도구를 손에 넣었을 때 무엇을 하겠습니까? 나는 이론을 변화시키고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자고 말했습니다.”
당초 목표보다 2년 정도 지체되긴 했지만 ‘3×5 운동’은 끝내 목표를 달성했다.
“에이즈가 만연한 레소토의 보건장관이 한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당신이 처음 3×5 운동을 선언했을 때, 우리는 당황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결국 우리는 해냈습니다.”(하버드대 교지)
다트머스대 총장 추천위는 “김 박사는 교실 안과 밖에서 젊은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헌신적인 삶을 살아왔다. 그는 다트머스의 이념인 배움과 창의, 봉사를 실현한 인물”이라면서 총장 발탁 배경을 설명했다.
■“세계의 문제는 젊은이들의 문제”
대학 학장 등의 경력이 없는 김 박사가 총장에 임명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김 박사는 총장 지명 직후 “아시아계 대학 고위직 인사가 희소한 가운데 대학 경영 경험이 없는 나를 총장에 지명한 것은 수많은 첫 번째 사례 중 하나가 될 것”이라며 “다트머스대가 나의 다른 활동들을 평가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국의 부모들에게는 “이제는 어려서부터 가난한 이웃이나 빈국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키워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 박사는 여러 면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닮았다. 미국 내 소수 인종 출신으로 젊은 시절 정체성 고민을 극복하고 소외 계층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통해 미국 주류 사회의 인정을 받은 인생 역정이 그렇다. 김 박사는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은 미국에 사는 소수 인종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오바마 정부는 김 박사에게 에이즈 문제를 총괄하는 자리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박사는 총장직 수락과 관련, “지금까지는 질병 퇴치를 위해 헌신했지만 한 사람이 하는 일엔 한계가 있다”면서 “차세대를 교육시켜서 그들이 더 큰 일을 하도록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5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왔던 저개발국 출신의 소년에서 미국 지성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성장한 김용 박사. 그가 제2, 제3의 김용을 키워내기 위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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