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타임스는 워싱턴포스트(이하 포스트)에 익숙해 있는 한국인들에게 생소한 이름이다. 한국인에 의해 미국의 수도를 근거지로 신문사가 창간된 배경이나 신문사들의 도산이 줄을 잇던 시절에 굴지의 포스트에 맞서 20년 넘게 성장할 수 있었던 원인, 워싱턴타임스가 옹호하는 가치 등 수많은 점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의문 부호로 남아있을 것이다. 필자는 1995년과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워싱턴타임스 교환기자와 방문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워싱턴타임스 창간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언론은 정부와 국민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출발했다
.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공화국 미국을 설계하면서 언론은 국민들이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야 하며 그 정보는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충분히 다양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미국의 수도가 워싱턴으로 옮겨온 1800년 이래 워싱턴에는 최소 2개 이상의 신문들이 각축했다. 진보 성향의 신문도 존재했고 보수 성향, 중도 성향의 신문들도 있었다. 워싱턴은 미국과 세계의 미래가 결정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1년 여름 129년 전통의 워싱턴스타가 재정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문을 닫게되면서 워싱턴에는 포스트만이 남게됐다.

 

 워싱턴스타는 1957년 포스트에 추월당했으나 타임 재단의 지원 아래 워싱턴의 오피니언 리더들을 움직여 온 유력지였던 만큼 워싱턴스타의 몰락은 모두에게 뜻밖의 일로 받아들여졌다. 워싱턴스타의 역사성은 링컨 대통령이 게티스버그 연단에서 내려오면서 "아마 자네는 이걸로 큰 기사를 만들 수 있을걸세"라면서 연설 초고를 건넨 기자가 다름아닌 스타 기자였다는 일화에서도 확인된다. 

 

  워싱턴의 단일 신문체제는 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당시만 해도 런던에는 9, 파리에는 13, 로마에는 8개의 일간지가 경쟁하고 있었고 서울이나 도쿄,방콕 등도 마찬가지였다. 워싱턴은 매일 아침 포스트로 뒤덮혔고 포스트가 워싱턴 정책결정자들에게 끼친 영향력도 그 만큼 커졌다. 이런 상황은 건전한 여론 형성을 위해 바람직스럽지 않다는 우려가 확산됐다.

 

 워싱턴과 미국은 루퍼드 머독같은 미디어 재벌이나 뉴욕 타임스 같은 언론 그룹, 보수적인 재력가등의 워싱턴 진출을 고대했다. 포스트의 논조가 1977년 포스트 100주년 기념식에서 포스트家 전기 작가인 찰머스 로버트가 자랑스럽게 말했듯이 '진보적인 미국 민주주의의 강력한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워싱턴타임스 칼럼리스트인 아놀드 바이흐만(후버 연구소 연구원)은 "미국인의 3부의 1이 자신을 보수주의자로 규정하고 단지 17% 만이 자신을 진보주의자로 주장하는 시대에 워싱턴에는 보수주의를 위한 목소리가 사라진 셈이었다. 1980년대는 민주주의의 미래를 비관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소련의 팽창주의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을 때에 방송들은 무기력한 분위기만을 양산해내고 있었다. 가정의 가치와 희생 정신과 자기 절제, 고된 노동과 믿음으로 특징지워지는 민주주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징후였다"고 회고했다. 후에 등장한 보수 성향의 FOX 뉴스 채널은 당시만 해도 루퍼드 머독의 머리 속에 점으로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신문을 창간하기에 좋은 시점이 아니었다. 타임 재단이 소유했던 워싱턴스타마저 쓰러지던 상황에, 그 것도 1877년 창간된 전통의 포스트에 맞서 싸워야하는 부담감이 너무 커서 어느 누구도 선뜻 워싱턴 언론계에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워싱턴타임스 창간(1982 517)은 이런 상황에서 "워싱턴 언론계에 진보의 목소리는 만연한 반면 보수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많은 보수주의자들의 목소리에 응답한"(창간 사설) 것이었다. 신문의 논조는 보수를 지향했지만 편집국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정치 성향을 지닌 기자들로 채워졌다. 기자 중에는 공화당 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하다 레이건 행정부에 몸담았던 이도 있었지만 스스로 모택동주의자를 자처한 기자도 있었다.

 

워싱턴타임스 웨슬리 푸르동 주필은 "우리는 신중하게 의견과 뉴스를 구별해 왔다. 사설과 칼럼을 통해서는 공격적이고 분명한 관점을 견지하는 대신 뉴스 칼럼은 최대한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노력해 왔다"고 말했다.

 

 워싱턴타임스는 발행 첫날부터 워싱턴포스트와 경쟁할 만한 규모의 신문사와 인원으로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독자들은 최고가 아닌 신문, 뉴스 보도와 분석, 논평에서 깊이가 없는 신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워싱턴타임스는 세속적인 신문을 지향했다. 서구 사회의 오랜 전통인 聖俗 분리 원칙에 충실하기로 한 것이다. 편집국은 기존 언론계에서 활약한 언론인들로 채웠졌고 창간 사설을 통해 "워싱턴타임스에 투자한 이들은 신문이 자유롭고 독립적이지 않는 한 생존할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잘 알고 있다"고 천명했다.

 

 그럼에도 창간 초기에는 숱한 편견과 맞서 싸워야 했다.

기존 언론계의 반응 역시 냉담했다. 이코노미스트는 " 'Moonie(Rev. Sun Myung Moon의 추종자)  paper'가 워싱턴스타같은 훌륭한 신문도 실패한 포스트와의 경쟁에 뛰어들었다"고 보도했다. 포스트는 "새로운 신문은  Rev. Moon과 그의 교회를 위한 선전지에 불과할 것"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주장을 보도하며 견제에 나섰다.
워싱턴타임스 주필을 역임한 아놀드 보슈그레이브
의 회고.


<Arnaud de Borchgrave>

 

"첫 3년 동안 워싱턴타임스는 'Moonie'라는 형용사와 싸워야 했다. 그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벤 브래들리(당시 포스트 편집국장)는 편집국에서 워싱턴타임스를 보지 못하도록 금지했다.(포스트 역시 워싱턴 지역의 5개 신문중 꼴찌로 시작해 오랫동안 뉴욕타임스로부터 무시당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워싱턴 실력자들이 모이는 오찬 장소인 메트로폴리탄 클럽이나 코스모스 클럽에서는 워싱턴타임스이 반입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이런 인식을 타파하기 위해 개인적인 캠페인을 펼쳤다. 뉴욕타임스가 항상 우리를 'Moonie-owned Washington Times'라고 지칭했기 때문에, 나는 20년동안 알고 지내던 아브라함 로젠탈 편집국장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서 나는 '우리가 뉴욕 타임스를 지칭할 때 그 소유자의 종교와 함께 논한다면 합당한 일이냐'고 물었다. 얼마 후 그가 'You win'이라고 쓴 답신을 보내왔다. 워싱턴 클럽의 신문 반입에는 24개월이 걸렸고 지금은 포스트나 뉴욕타임스보다 더 많이 찾는 신문이 됐다"


 창간 멤버인 테드 에이그래스 편집 부국장도 비슷한 경험을 간직하고 있다.

 

 " 무엇보다 다른 미디어부터 신뢰도를 확립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창간 초기 뉴스 메이커들이 워싱턴타임스의 편집진과 오찬을 하곤했다. 정부 관료도 있었고 의회 지도자도 있었다. 종종 그 자리에서 특종감인 중대 발언이 나오곤 했다. 내 임무는 워싱턴타임스의 특종 기사가 인용 보도될 수 있도록 통신사 등에 알리는 일이었다.  82년 말인가, 83년 초의 일이다. 레이건 행정부의 고위 관료가 워싱턴타임스를 방문, 편집진과 오찬하면서 새 정책을 발표했다. 빅 스토리였다. 기사 요약본을 AP 통신사에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보도하기를 거부했다. 그 관료가 워싱턴타임스에 있었는지, 있었더라도 그런 발언을 했는지를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기존 언론계의 불신과 오만이 나를 화나게 했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공증인을 고용해서 오찬 도중 오고간 대화들을 모두 기록해서 문건으로 만들어 보냈다. 우리 기사를 못믿겠거든 함께 보낸 대화록을 직접 찾아서 기사를 작성하라는 메모와 함께. 그 때부터 AP는 워싱턴타임스 기사를 인용 보도하기 시작했고 얼마 후에는 '이제 기사만 보내도 도 된다'고 말했다. 워싱턴타임스가 신뢰를 획득해 가는 과정에서 거둔 조그만 승리였다


 
혹자는 6개월을, 어떤 이는 6주를 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런 예상은 모두 빗나갔다. 워싱턴타임스는 살아 남았고, 나아가 영향력을 획득했다. 독자들이 호응했기 때문이었다. 월 스트리트 미디어 분석가들은  워싱턴타임스 유가 부수가 2 5000부를 넘지못할 것이라고 장담했으나 그해 첫 해에 7 5000부에 이르자 당혹스러워했다.  


 워싱턴포스트 성장의 이면에 브래들리가 있었다면 워싱턴타임스에는 보슈그레이브가 있었다. 브래들리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종한 밥 우드워드"포스트가 터트린 최대 사건인 워터게이트조차도 편집국을 통괄하던 브래들리가 포스트에 끼친 영향에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던 인물로, 65 44세의 나이로 편집국장 대우에 임명된 이래 포스트를 유력지로 성장시킨 장본인이다.


 <Ben Bradlee>

 

 보슈그레이브 25년 동안 뉴스위크에서 경력을 쌓은(브래들리는 뉴스위크 재직 시절 그 밑에서 활동했다) 국제 관계 전문가로 워싱턴타임스는 그가 주필로 재직한 85년부터 91년 사이 주류 언론계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의 임명은 많은 국내외 미디어의 관심을 모았고 그의 재임 기간 유력 언론들은 하나씩 워싱턴타임스를 일원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미디어 관련 잡지들도


"좋아하든 싫어하든 워싱턴 타임스는 유력지 반열에 올랐다"(미디어 위크)
"워싱턴은
다양성을 제공하고 정치권 거물들이 처신을 조심하도록 하기 위해 워싱턴타임스를 필요로 하게됐다"(콜럼비아 저널리즘 리뷰)라고 보도하며 호의적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가 채택한 방식은 '포스트 찌르기'였다. 
그에 따르면, 그들이(포스트) 원하는 기사를 우리가 먼저 우리 신문에 게재하는 방식이다. 브래들리 1996 보슈그레이브 70회 생일에 워싱턴타임스 사옥을 처음으로 방문, "초창기 워싱턴타임스가 어려웠던 시절, 교수형을 앞둔 사람의 집중력이 강해지듯이 그런 자극을 준 인물"이라고 소개됐다.

 

 보슈그레이브가 편집국장에 취임한 첫 해에 워싱턴타임스는 AP통신에 의해 포스트와 뉴욕타임스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신문이 됐다. 포츈지는 1986년 "워싱턴 타임스는 대통령이 오전 9시 첫 회의 전에 읽는 5개 신문 중 하나"라고 보도했다.


 

 보슈그레이브의 유쾌한 두가지 회상.

"한 번은 워싱턴포스트 그룹 회장인 캐서린 그래엄이 만찬 석상에서 다가와 말했다. '아노드, 나는 당신에게 꼭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신문이 정말 좋아보인다'"


<Katharine Graham>

 

"85년 3월 주필에 취임했을 때다. 취임 첫 날 레이건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뭐 도와줄 일 없을까' 그가 짓궂게 물었다. 나는 '누설된 정보 속에 흠뻑 젖어들도록 만들어주십시요'라고 대답했다. 물론 우리는 결코 그가 흘려준 정보에 젖어본 일이 없다. 모든 특종들은 우리 스스로 땀흘려 일궈낸 것이었다"

 워싱턴타임스의 첫 10년은 냉전의 시대였다. 워싱턴타임스는 이 기간에 언론계 지형을 바꾸고 국가적 아젠다에 영향을 미쳤다. 2004년 선거에서 낙마한 민주당 지도자 탐 대슐(전 상원의원.사우스 다코타) "토론은 민주주의의 소리다. 그것이 내가 워싱턴타임스를 평가하는 이유다. 워싱턴타임스는 창간 이래 워싱턴을 더욱 시끄럽게 만들었고 국가적 토론을 더욱 활성화시켰으며 우리의 민주주의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대슐의 평가대로 워싱턴타임스는 보수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1981년 출범한 레이건 행정부는 군사력 증강을 통한 소련과의 정면 대결 정책을 채택했다. 워싱턴타임스는 출발부터 진보적 언론과 분명한 선을 그었다.  창간 직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가 숨지고 유리 안드로포프가 그 뒤를 이었다. 워싱턴타임스는 안드로포프를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언론의 태도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아놀드 바이흐만의 말을 들어보자.


 "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에 의해 안드로포프는 스카치를 마시고 미국 소설을 탐독하는 유쾌한 친구로 묘사됐다. 평화는 곧 실현될 것이라는 분위기가 두 신문에 의해 조성됐다. 그가 오랫동안 KGB 수장으로 있었다는 사실은 무시되었다. 그러한 난센스는 워싱턴타임스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1983 91일 소련이 사할린 상공에서 대한항공 민간 여객기를 격추시켰을 때 워싱턴타임스의 안드로포프에 대한 평가는 비극적으로 확인됐다"


 워싱턴타임스는 시종 일관 반소비에트,
반 공산주의의 길을 걸었다.

미국 의회와 백악관, 정부 기관에 매일 아침 배달되는 워싱턴타임스의 존재는 미국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워싱턴타임스의 사설과 칼럼은 미국 대통령과 의원을 비롯한 영향력있는 인사의 입을 통해 반복적으로 재생산됐고 그간 묻혀 있었던 보수의 목소리가 분출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
 시대적으로 타임스는 세계 역사상
중대한 국면에 미국의 수도에 나타났다. 소련의 팽창주의가 그 정점에 달했던 그 시점에 워싱턴타임스는 독자란과 코멘터리란을 작가와 지식인,학자,언론인들에게 개방했다. 독자들은 지금까지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 새로운 관점, 새로운 의견들을 접할 기회를 얻게됐다.


 다음은 역사학자인 폴 존슨의 진단.


"워싱턴 타임스가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었던 배경엔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임, 1979년 영국 마거렛 대처 수상 집권,
1980년 미국 레이건 대통령 당선이라는 3가지 역사적 사실이 절묘하게 놓여있었다. 역사는 위대한 인물의 의지에 의해 움직여진다. 이들 세 사람이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피 한방울 흘리지 않은채 소련을 무너뜨리고 독일을 통일시키고 동유럽을 공산 독재의 사슬에서 해방시킬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2001 3 체니 부통령이 그의 취임 이후 첫 인터뷰를 워싱턴포스트가 아닌 워싱턴타임스와 가졌고 부시 대통령은 그 달 초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유에스에이 투데이,워싱턴타임스 백악관 출입기자와 인터뷰를 가졌다. 공화당 대통령과 워싱턴타임스의 연대감은, 작고한 레이건 전 대통령이 1992년 워싱턴타임스 10주년 행사 때 보낸 축하 메세지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미 국민은 진실을 알고있다. 워싱턴타임스의 내 친구들, 당신들은 그 것을 그들에게 말했다. 그 것은 항상 환영받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신들의 목소리는 크고 힘이 있었다. 나 처럼, 당신들도 세기의 가장 중요한 고비에 워싱턴에 도착했다. 우리는 함께 팔을 걷어 붙였고 일했다. 그리고 오 예스, 우리는 냉전에서 승리했다"

 

 민주당 클린턴 대통령과 공화당 원내총무인 뉴트 깅그리치가 워싱턴타임스 보도로 궁지에 몰렸고 레이건 대통령의 핵심 측근은 워싱턴타임스 보도로 사임 후 기소돼 처벌 받았다.

 

 워싱턴타임스의 대표적 탐사 보도는 클린턴 대통령의 아칸소 주지사 시절 부동산 매매 의혹을 파헤친 'White water 사건'이다.

워싱턴타임스 탐사보도 전문기자인 제리 세퍼는  1993 12, 당시 백악관 비서실장이던 포스터(클린턴 부부의 아칸소 부동산 매매 당시 법률 자문)가 자살하던 그날 밤 클린턴 대통령 측근이 포스터 사무실에서 화이트워터 사건 관련 문건을 빼돌렸다는 사실을 특종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언론들이 이 기사를 받아 의혹을 제기하자 백악관은 마침내 특별 검사를 임명해 조사하라는 의회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된다. 이 조사가 후일 클린턴 대통령의 성추문으로 이어져 그의 탄핵으로까지 비약됐던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후일 힐러리 로댐 클린턴은 그녀의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Living History)에서

워싱턴타임스 보도에 관해 상세히 해명하며 강한 반감을 표시한다.

 중국이 미사일 기술을 시리아와 이란에, 핵무기 기술을 파키스탄에 수출하고 있다는 특종 보도는 1996년 나왔다. 국방 정보 분야 전문기자인 빌 거츠의 보도를 계기로 계기로 클린턴 행정부와 의회는 중국의 대량살상무기 기술 확산 문제에 현미경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거츠에 관해서는 제임스 울시 당시 CIA 국장의 "거츠의 보도가 어디서 흘러나갔는지 알 수 없어 미칠 지경이다. 이제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기 위해 그의 기사를 읽을 수 밖에 없다"는 발언이면 족할 듯 싶다.
 
가 안보가 우선이냐, 독자의 알 권리가 우선이냐는 오랜 논쟁에 대해서는 별도의 고찰이 필요하겠지만, 체니 부통령이 워싱턴타임스 주필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거츠의 기사 수위를 낮춰주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워싱턴타임스가 미 언론계에 기여한 또 다른 공로는 전통과 가정, 믿음, 인종 평등, 미국의 기독교 유산을 옹호하는 이들에게 합당한 공간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1991년 부터 타임스는 사설과 칼럼, 기사를 통해 적극적으로 이런 주제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푸루동 주필은 "우리는 다른 신문들이 꺼려하는 주제들을 기꺼이 다룬다. 많은 유력 신문들이 미국의 주류 흐름으로부터 떨어져 있고 그런 탓에 주류에 속한 이들이 누구인지,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단적인 예가 동성연애자들의 군 복무 허용 문제에 대한 보도 태도다. 재선을 노리던 민주당 클린턴 대통령의 이같은 대선 공약과 관련, 타임스는 그의 취임 전부터 이 정책이 군내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가 게이 병사도 다른 병사와 다를 게 없다는 전제 하에서 클린턴 공약에 동조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2004.12.6

 

 

 


1995년 워싱턴타임스 교환기자 시절

                                                                                     2005~2006년 워싱턴타임스 연수 시절

 

 

*아래는 밴 브래들리 사망 소식을 다룬 조선일보의 2014년 10월23일자 보도.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대통령을 하야시킨 '워터게이트 사건' 특종을 지휘했던 벤저민 브래들리(Benjamin C. Bradlee) 전 워싱턴포스트(WP) 편집인이 21일 워싱턴DC 자택에서 93세로 별세했다. 로이터통신 등은 그가 수년 전부터 알츠하이머병을 앓았다고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도널드 그레이엄 전 발행인이 "미국의 당대 최고 편집자"라고 추도하는 내용 등을 포함, 10개 면에 걸쳐 추모 기사를 게재했다. 경쟁지인 뉴욕타임스(NYT) 등 주요 언론도 그가 '신문 편집인의 표본' '용기와 카리스마를 가진 위대한 언론인' '저널리즘의 신화'였다고 애도했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을 하야시킨‘워터게이트 사건’특종을 지휘했던 고(故) 벤저민 브래들리(오른쪽 끝) 워싱턴포스트 편집인이 1973년 동료들과 이야기 나누는 모습. 왼쪽부터 캐서린 그레이엄 발행인, 워터게이트 사건 취재의 두 주인공인 칼 번스타인과 밥 우드워드 기자, 하워드 사이먼즈 편집국장.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을 하야시킨‘워터게이트 사건’특종을 지휘했던 고(故) 벤저민 브래들리(오른쪽 끝) 워싱턴포스트 편집인이 1973년 동료들과 이야기 나누는 모습. 왼쪽부터 캐서린 그레이엄 발행인, 워터게이트 사건 취재의 두 주인공인 칼 번스타인과 밥 우드워드 기자, 하워드 사이먼즈 편집국장. /워싱턴포스트
그가 편집인(1968~1991년)을 맡았던 23년간은 WP의 중흥기였다. '워터게이트'를 비롯한 역사적 특종으로 지역 언론에 불과했던 WP를 미국 대표지로 만들었고, 미국사와 언론사를 다시 쓰게 했다. 특히 1972년 민주당 전국위원회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던 괴한 5명이 체포된 사건을 당시 20대였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기자가 심층 취재해 세계적 특종으로 만든 워터게이트는 "사건을 단순하게 보지 말고 깊숙하게 취재하라"는 브래들리의 철학이 낳은 성과였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재선을 위한 음모를 파헤쳐 결국 대통령을 물러나게 했다. 두 기자의 특종은 "탐사 보도의 새 장(章)을 열었다"는 극찬 속에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에 앞서 WP의 입지를 다진 사건은 미국 정부의 베트남전 개입 과정을 담은 1급 비밀 '펜타곤 문건' 보도였다. 특종은 NYT가 했지만 국가 안보를 이유로 닉슨 행정부가 게재를 금지하는 동안 WP가 오히려 앞서갔다. 캐서린 그레이엄 발행인과 브래들리는 워싱턴포스트의 주식 상장으로 권력의 입김에 취약할 때였지만 의기투합해 '원칙을 지키는 언론'이란 인식을 심었다. 브래들리는 조선일보와의 생전 인터뷰에서 "언론과 정부가 너무 사이가 좋으면 뭔가 크게 잘못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그가 재임하는 동안 WP는 퓰리처상을 17번 받았다. 줄무늬 셔츠에 흰색 칼라, 걷어붙인 소매가 트레이드마크인 그는 기자들에게 공격적인 기사를 요구하면서도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다고 로버트 카이저 전 WP 부국장은 회고했다.

WP의 형식 파괴도 그의 업적이다. 일간지에 잡지 개념을 도입한 섹션면 발행은 거의 모든 세계 신문들이 따라오게 만들었다. 패션과 유행을 다룬 '스타일'이 대표적이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WP의 발행 부수는 두 배인 80만부로 늘었다.


	1971년 무렵의 벤저민 브래들리(오른쪽) 워싱턴포스트 편집인과 캐서린 그레이엄 발행인.
1971년 무렵의 벤저민 브래들리(오른쪽) 워싱턴포스트 편집인과 캐서린 그레이엄 발행인. /뉴시스
위기도 있었다. 1981년 퓰리처상까지 받은 '8세 아동의 헤로인 중독'을 다룬 '지미의 세계'가 허구임이 드러났을 때였다. 브래들리는 퓰리처상을 바로 반납하고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철저하게 조사해 기사화했다.

1921년 보스턴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브래들리는 하버드대를 졸업한 뒤 해군 장교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전쟁에서 돌아온 뒤 뉴햄프셔 선데이뉴스에서 기자 일을 시작했고, 1948년 WP에 입사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 때문에 3년 만에 파리 주재 미국 대사관의 공보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활자의 매력을 잊지 못했던 그는 2년반 뒤 뉴스위크 유럽 특파원으로 언론계에 복귀했다. 이후 뉴스위크를 WP가 인수하는 과정에 관여하면서 WP로 돌아왔다.

브래들리는 조지타운 저택촌의 '이웃사촌'이던 존 F 케네디와 막역했다. 케네디가 암살당한 뒤 재클린 여사를 데려간 사람이 바로 그였다. 케네디가 대통령일 때 여러 특종을 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케네디와의 관계는 저서 '케네디와의 대화'로 이어졌다.

1991년 은퇴하고 WP 부사장으로 있던 브래들리는 2013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 영예인 '대통령 자유메달'을 받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브래들리는 진정한 언론인이었고, WP를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신문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세번의 결혼으로 자녀 4명, 손자 10명, 증손자 1명을 뒀다. 워싱턴=윤정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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