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1.30
워싱턴에서 만난 이상수 전 의원은 편안해보였습니다.
워싱턴 시내의 '조티타운 클럽'에서 그와 만났습니다. 조지타운 클럽은 로비스트 박동선씨가 창립한 사교 클럽으로 지금도 박씨의 사진이 걸려있더군요. 장소 탓인지, 박정희 정권 시절 미국 정치권을 상대로 한국 관련 로비를 벌이다 구속됐던 박씨의 인생과 노무현 후보의 '대선 금고지기'를 맡은 업보로 구속됐던 그의 행로가 자꾸 오버랩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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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타운 클럽에서 만난 이상수 전 의원
어떻든 편안한 그의 모습은 내가 그의 처지라면, 그렇지 못할 것 같았기에 의외였습니다.
그는 감옥에 갔다가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여늬 사람 같으면 한 번도 구경해 보기 어려운 감옥을 두 번이나 갔습니다.
한 번은 군부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다 갔으니 훈장으로 치부할 만 합니다.
두 번째는 그다지 자랑할 만한 이유가 아닙니다.
대선 자금을 위법하게 모았다는 죄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억울하다고 말합니다.
유죄로 확정된 그의 공소 사실은 기업체로부터 대선 후원금을 전달받고
영수증을 발급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영수증을 발급해 주지 않은 행위는 법적으로 유죄입니다.
후원금을 전달하는 기업체의 요청에 따라 영수증을 발급해 주지 않았던 것도,
또한 당시의 관행이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갈 수 밖에 없었던 정치적 상황이나
대선 자금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지난 대선을 기점으로 열리게 된
상황은 그간의 신문 보도가 전한 그대로입니다.
나는 정치인 이상수가 아닌 인간 이상수가 그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추스렸을지가 더욱 궁금했습니다.
지난 대선의 금고지기만 맡지 않았던들,
노무현 정부가 궤도에 올라선 이 시점에 미국에 머물 이유가 없는 그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의 감옥 생활은?
그는 "지옥 다음"이었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억울하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평소 단련한 단전 호흡이 아니었다면 견디기 힘들었다는 설명과 함께. 여담이지만 그는 딸의 권유로 시작한 단전 호흡이 상당한 경지입니다. 미국 체류중엔 그랜드 캐년 근처에 위치한 세도나에도 다녀왔습니다. 세도나는 볼텍스라는 신비한 에너지가 충만한 곳으로 알려져 세계의 명상가들이 자주 찾는 장소이고 한국의 단학 선원도 세도나에 본부를 두고 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면 그는 결국 2004년 총선에 출마할 수 없게됐습니다.
불면의 번민은 어떻게 정리했을까요.
그는 자신의 희생으로 한국 정치의 고질이었던 대선 자금 문제가 앞으로 보다 투명해진다면 그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자위하며 정리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말 대선 자금 모금 당시,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을까요.
"노무현 선대본부의 총무위원장 직함은 대선 자금 모금 과정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후원금 모금을 위해 기업체 관계자를 만나면 도대체 총무위원장이 무슨 자리냐고 묻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는 민주당 사무총장이 별도로 있었고 노무현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희박했던 시절이었다. 유력한 기업체들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이미 '배팅'을 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노무현 후보로 단일화가 이뤄진 후 기업체에서 후원금을 내겠다는 연락이 왔는데 액수는 후에 대선 자금 수사 결과를 보니 한나라당의 10분의 1도 안되는 액수였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SK 수사로 대선 자금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나는 대선 자금 수사를 해도 한나라당이 문제지 우리 쪽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찰이 여야 형평성을 고려하면서 수사할 것이라는 점은 후에서야 실감하게 됐다"
그의 바람은?
"정치적으로 명예 회복을 하고 싶다"
향후 그의 정치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지, 인생은 정말 그의 말대로 '다채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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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2004년초, 이상수 전 의원의 구속을 지켜보며 썼던 글입니다.
2004년 2월8일
立春도 지난 2001년 2월 9일, 때 아닌 폭설이 내렸다. 처음엔 가루눈이 날리더니 점점 눈발이 드세어졌다. 오전부터 내린 눈은 점심 때가 되자 국회 의사당 주변 도로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차량들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국회의사당에서 나와 민주당 이상수 원내총무 당선 축하연 장소인 국민일보 빌딩까지 함박 눈을 맞으며 걸었다. 철 지난 겨울 정취에 조금은 감상에 젖어. 방금 전에 실시된 민주당 총무 경선은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나오지 않아 결선 투표까지 치러야 했을 정도로 접전이었다.
오찬 행사 중 문제가 발생했다. 초청 성악가가 노래를 부를 순서가 됐는데 폭설로 반주자가 도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초청 성악가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사이, 이 의원이 무대 위로 올라가 우정 출연을 자원, 먼저 무반주로 가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노래 실력은 수준급이어서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꿔 보려던 그의 시도는 예상 외의 호응을 받았다. 여기 저기서 앵콜 요청이 터져 나왔다. '정치인 이상수'가 아닌 '로맨티스트 이상수'와의 첫 遭遇였다.
그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 동료 의원들과 같이 로마 여행을 갔을 때는 베니스 거리 가요제에 특별 출연, '오 솔레미오'를 불러 열렬한 앵콜을 받았을 정도다. 당시 동료 의원들은 모자를 벗어들고 거리의 여행객으로부터 돈을 거두는 촌극을 연출했다고 한다. 변호사 시절엔 광화문 근처의 한 다방에 들렀다가 마테 알테리라는 소프라노 가수가 자신의 애창곡인 토셀리의 세레나데를 애절하게 부르는 것에 감동, 그 음반을 백방으로 찾아다니다 끝내 구할 수 없게 되자 그 다방 주인을 찾아가 다른 음반 30장을 사주는 조건으로 그 음반을 손에 넣을 만큼 노래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
총무 담당이었던 나는 이런 저런 자리에서 그가 가곡을 반주도 없이 열창하는 모습을 유쾌한 심정으로 지켜보곤 했다. 애창곡은 '청산에 살리라'로 김연준 전 한대총장이 윤필룡 사건에 연루돼 억울하게 옥고를 치르면서 자신의 비장한 심회를 노래한 것인데 가사도 좋고 곡조도 맘에 들어 18번으로 정했다고 한다.
충무경찰서 유치장 가수로 데뷔한 일화는 2002년 발간한 에세이집에 남겼다. 그가 87년 6.29 선언 직후 인권 변호사로 대우조선 노조 생존권 투쟁에 동참했다가 구속됐을 당시 얘기다.
"충무경찰서 유치장은 근처에 구치소가 없어 상당히 오랜 기간 구금생활을 하는 수감자가 많았다. 그래서 가끔 교도관들이 수감자들의 기분 전환을 이유로 유치장 방별 노래자랑을 개최했고 1등한 방에는 유치장 최고 특식 중 특식인 담배를 한 개비씩 나눠 줬다. 수감자들은 담배를 피우기 위해 결사적으로 대회에 임했으나 우리 방은 계속 등외로 밀리곤 했다. 보다 못해 어느 날 내가 선수로 나가보겠다고 제안했다. 사실 그 날은 마음도 울적해 김민기의 '아침이슬'을 한껏 감정을 넣어 열창했다. 내가 생각해도 그 날 노래가 잘 되는 날이었고 결국 일등상을 받아 스타로 부상했다"
이 의원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드러누워 문학작품을 읽을 때면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이 편하고 즐겁다"고 말하는 문학 애호가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그를 취재한 수첩을 펼쳐보면 군데 군데 '인생 讀本'에나 실려 있음직한 말들이 눈에 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인생은 悽然하나 多彩롭다'는 말이다. 인생은 유한하기 때문에 처연하고, 처연하지 않기 위해선 다채로워야 한다는 취지였던 것 같다.
그의 말이다.
"서머셋 몸은 '인생은 페르시아의 융단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융단을 짜는 사람의 기호에 따라 융단의 무늬가 달라지듯이 우리 인생도 결국 그 것을 그려가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다양하게 채색될 뿐 절대적인 기준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훗날 인생이란 저울에 달았을 때 누구의 무게가 더 나갈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괴테의 '파우스트'를 인용한 대목도 있는데, 파우스트로 변장한 메피스토펠레스가 배움의 열정에 넘쳐 파우스트 박사를 찾아 온 학생에게 건넨, '이론이란 모두 회색 빛이고 푸른 건 인생의 황금나무'라는 유명한 말이다. "나도 푸른 생을 추구하며 삶의 여정을 달려온 것 같다"고 이 의원은 말하곤 했다.
고려대 법대 재학 시절, 그는 독서 서클인 '호박회(虎博會)' 멤버였다.
"최인훈의 '광장'을 토론하며 분단 상황에 처해있는 지식인의 고뇌를 이해하려 노력했고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논하며 초인 정신을 흠모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토론을 끝내고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학교 앞 콩나물 밥집이나 세느 주점을 찾아 뒤풀이 토론도 벌였다. 안암동 실개천을 세느 강으로, 그 위 다리를 미라보 다리로, 천변 술집을 세느 주점으로 삼아 우리는 술에 취해 기욤 아뽀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를 크게 암송하며 젊은 날의 꿈과 낭만을 만끽하곤 했다"
대학 시절, 정체 모를 열정에 휩싸여 1년 동안 학교를 自罷한 경험이 있는 나는, 이 의원의 이런 낭만성에 이끌려 한결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검찰에 몇 차례나 출두하여 조사를 받고, 특히 그 때 마다 TV에 마치 비리 정치인처럼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착잡한 심정을 가눌 길 없었습니다. '왜 대선 자금의 금고지기를 맡아 이 곤욕을 치르는가'라고 자문하면서 회한의 밤을 지새우기도 했습니다. '대선 사상 가장 깨끗한 선거를 치렀다고 자부하고서도, 지금은 왜 이토록 돌팔매를 맞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가눌 길 없는 억울한 심정으로 괴로워한 때도 많았습니다"
2004년 1월 27일, 이상수 의원은 '대선 자금 수사에 대한 입장'이라는 제목의 e-메일을 발송했다. 그 날은 2002년 대선자금 수사를 진행중인 대검 중수부가 이 의원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한 날이었다. 영장 요지는 이 의원이 2002년 대선 당시 민주당 노무현 후보 선대위 총무본부장으로서 한화와 금호그룹에서 각각 10억원, 6억원을 받고 영수증을 발급하지 않은 부분과 SK 10억원, 현대 6억6000만원에 대해 임직원 명의로 영수증을 발급한 행위가 정치 자금법 위반에 해당된다는 것. 이 의원은 금호와 한화 부분에 대한 위법 혐의는 시인하면서도 SK와 현대 부분은 수긍할 수 없다는 취지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확실히 이 의원은 용의주도하거나 노련한 정치인은 아니었다.
그가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이 되어 당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던 2003년 3월 7일의 일이다. 필자를 포함한 일부 기자들과 점심 식사 자리에서 그는 "지난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후원금 모금을 위해 100대 기업을 대상으로 돌아다녔고 전부 120억원을 모금했다. 만나 보니 괜찮은 사람들도 많더라" 고 자랑스레 얘기했다. 당시만 해도 그와 단짝이던 김경재 의원이 아연해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대선 당시 노무현 선대위 총무본부장으로서 캠프 살림을 떠맡은 장본인의 언급치곤, 너무나 천연스런 말투였다. 이 발언이 문제되자, 그는 부랴부랴 "120억원 중 노사모 돼지 저금통으로 모금한 80억원, 서울·경기·인천지역 후원회를 통해 모금한 6억원을 제외한 나머지 34억원이 기업체 등의 합법적인 후원금"이라고 해명했다. 이 의원은 이 발언으로 '철이 덜 들었다'느니, '순진하다'느니 하는 당내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 "민주당과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대선 당시 어떤 기업에서, 얼마 만큼의 후원금을 받아 무슨 용도로 사용했는지 낱낱이 공개해야 한다"고 강도높게 촉구한 것은 후일 검찰 수사를 통해 500억원이 넘는 불법자금을 끌어들인 것으로 밝혀진 한나라당이었으니, 정치의 세계는 우스운 구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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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e-메일을 받고 착잡한 심정이었다. 진위 여부야 법정에서 따질 일이다. 이 의원이 기업에서 받은 돈을 개인적으로 유용한 것이 아닌 바에야, 개인 차원의 문제로 치부할 문제도 아니다. 내 마음이 심란해진 이유는 '로맨티스트 이상수'와 '대선 자금의 금고지기'가 양립할 수 없는 우리의 정치 현실 탓이었다.
"정치가의 주머니는 돈이 일시 지나가는 정거장이 되어야지, 돈을 언제까지나 보관하는 금고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 있다. 정치가에게 있어서 돈은 활동의 수단이지, 치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평생 쌓아올린 명예를 하루아침에 잃고 몸과 마음이 무너져 내린 듯이 검찰청을 빠져 나오는 노태우씨의 모습을 보면서 새삼 인생살이가 처연해지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언젠가 비자금 사건에 연루된 노태우 전 대통령을 지켜보며 피력한 이런 '돈과 인생'의 철학이, 본인이 연루된 대선 자금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훼손되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던 것이다. 서울구치소의 차가운 감방 안에서, 냉혹한 정치 현실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을 그는 지금, '로맨티스트 이상수'와의 결별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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