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승희 의원을 다시 만났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기자와 취재원이라기 보다는

조지타운 대학 연수 동기 말입니다.

그와는 95 여름 처음 만났습니다.

 

저는 햇병아리 기자였고

그는 입만 열면 대서 특필되는 유명 인사였습니다.

당시는 함승희 변호사 시절이었지요.

 

제가 국회 출입 기자가 직후,

변호사도 2000 총선을 통해 의원으로 변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2004 선거에서 낙선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을 만든 후에도

민주당에 그대로 남아 다가
탄핵 바람에 휩쓸렸습니다
.

잔류는 그의 선택이었으니
결과 또한 그의입니다.

 

그는 다시 변호사로 돌아갔습니다.

제가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입니다.

의원에 대한 평가는

보는 입장에 따라 여러 갈래일 것입니다.

저는 그를 지금도 ‘성역 없는 수사’를 외치던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의 함승희 검사로 기억합니다.

 

초선 의원 함승희의 의정 활동을 지켜보면서도

잣대로 그를 평가해 합니다.

그가 앞으로 어느 자리에 있든

그럴 생각입니다.

‘검사 함승희’의 혼과 기백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검사 함승희’가 궁금하시면

아래 글이 단서가 있겠네요.

2004년 1월 세계일보 e-기자클럽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말도 안돼. 미친 X 염치가 있어야지. 다른 부패한 공무원들은 무슨 명분으로 처벌할 거냐"
검사 출신으로 다혈질인 함승희 의원이 30 오후 비리의원 7 전원에 대한 체포 동의안이 부결되자 국회 본회의장에서 동료 의원들을 보고 쏟아냈다는 말이다. 국민들은 함의원의 발언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다. 국회의원들은 스스로 '염치없는 미친X' 길을 택했다.}

 2003
12 31, 인터넷 매체인 '프레시안' 박태견 편집국장이 ‘검찰,즉각 국회와의 전쟁을 선포하라' 제목으로 게재한 위의 데스크 칼럼을 읽어가면서 나는 '역시 함승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된 한나라당 박재욱, 박주천, 박명환, 최돈웅 의원과 민주당 이훈평, 박주선 의원, 열린 우리당 정대철 의원 7명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전원 부결된 다음날이었다. 특유의 이북 사투리(강원도 양양 출신인 그의 말투는 얼핏 들으면 이북 사투리같다) 섞인 억양으로, 미간을 잔뜩 모은 고성을 지르고 있는 의원의 모습이 앞에 선했다.
의원의 행동을 놓고는, 그래도 명색이 동료의원인데 너무 몰인정하다는 반응에서부터 혼자 깨끗한 ,쇼를 한다는 비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본인도 일원이 정치권을 향해 육두문자까지 동원하며 분노를 토해낸 의원의 행동은 것만 떼놓고 보면 선뜻 접수가 되지 않는다. 그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93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파견 검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93
4 21 저녁 서소문 대검청사. 함승희 검사는 전율했다.
로비 혐의를 잡고 은밀하게 청사로 연행해 안영모 동화은행장 입에서 대어급 로비 대상자들의 이름이 술술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의외의 사태진전이었다. 후일 검사는 "정년 퇴임 때까지 검사로 재직한다 해도 건져 올릴까 말까한 대어급 --재계의 거물급이 낚싯대에 주르르 매달린 셈이었다. 낚싯대가 부러질 같은 예감이 왔다. 희열과 전율이 교차했다" 술회했다. 이른바 동화은행장 비자금 사건은 그렇게 막이 올랐다. 그러나 의원과 전직 장관,전직 청와대 경제수석 등이 대거 연루됐던 사건은 정치논리에 밀려 흐지부지되고 만다. 낚싯대가 부러진 것이다. 당시 수사라인은 함승희 검사, 황성진 대검 중수2과장, 김태정 대검 중수부장, 김도언 대검차장, 박종철 검찰총장,김두희 법무장관이었다.
 그는 "동화은행장으로부터 억원씩의 돈을 받아먹은 전직 장관과 경제수석,청와대 요인,금융계 황제라는 사람들을 소환해 ' 받아먹은 사실이냐' 물어보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물증(수표추적) 없으면 소환도 없다' 해괴한 논리,도대체 형사소송법 어느 조문에도 없고 과거 어느 사건 수사할 때도 선례가 없는,논리라 없는 억지논리가 정상적인 수사진행을 가로막고 나섰다" 분통을 터뜨렸다.


오기가 발동한 검사는 소환 대신 비자금 추적에 나서게 되는데, 과정에서 동화은행장 비자금을 넘어선 재벌기업들의 비자금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쏟아져 나오게 된다. 그의 표현대로 '--재계 부패고리의 총체' 드러난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금맥(金脈) 찾아낸 검사이지만,당시의 정치상황은 그로 하여금 채광(採鑛)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그해 9 서산지청장으로 임명되면서 수사 일선(一線)에서 물러났다. 그의 인사 이동 기사를 보고 공무원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축배를 들었을 정도로 악명을 떨친 특수 수사통이었으나 지청장 발령 이후론 그렇게,이빨빠진 호랑이 신세로 지내다 94 10 옷을 벗게된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함승희 변호사 시절이었다.


그는 변호사가 후에도 뉴스의 초점이었다. 95 8 서석재 총무처장관이 '전직 대통령 4000억원대 비자금 -차명 계좌 보유 발언'으로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은 후론 "함승희가 찾아낸 계좌가 전직 대통령 비자금 계좌"라는 추측이 나오면서 그는 연일 기자들의 취재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대열의 일원이 되어 서초동 법원청사 앞에 위치한 그의 변호사 사무실을 들락거렸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당시는,서석재 장관 발언의 진위여부를 수사한 대검 중수부가 " 소문이 돌고 돌아 전직 대통령 비자금이 "이라고 서둘러 수사종료를 선언한 점에서 있듯,검찰이 정치권력의 영향력 하에 놓여있던 상황이었다. 김성호 대검 중수2과장이 수사종료 발표를 하면서 "이런 상황을 일본말로는 '나가레(무효)'라고 합니다" 말해 '나가레'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기도 했지만, 해도 가기 전인 10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 전직대통령 비자금 계좌번호가 적힌 종이 쪽지를 흔들면서 전직 대통령 비자금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으니, 김성호 과장의 '나가레' 발언을 듣고 함께 웃었던 나는,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속이 없었다.( 과장은 '나가레' 외칠 당시 전직 대통령 비자금 실체를 상당부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후일 밝혀진다)

 2003 3 28국회 본청사.

 "
총장 내정자는 검사 생활의 대부분을 대검과 법무부에서 보냈을 , 구체적 사건수사를 통해 검찰혼을 불사른 경험이 없고 상급 관리자로서만 지내왔다. 과거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이 집권세력의 의중파악에만 능해왔듯이 총장 내정자도 윗사람 눈치파악에만 능한 사람들을 모시면서 검찰혼을 불사르려는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느냐"

 송광수 검찰총장 내정자가 민주당 함승희 의원의 질문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검찰총장으로는 인사청문 대상이 총장 내정자였다. 의원은 2000 16 총선을 통해 검사 시절 내내 각을 세웠던 정치권에 편입돼 있었다.
 함 의원의 검찰관은 이어졌다.

"살아있는 권력을 치는 검찰혼이 담긴 수사를 해야한다. 정치권력이 검찰을 정략적 도구로 악용하려 검찰혼을 보여줘야 한다. 일본도 54 '조선(造船) 의혹 사건'에서 법무장관이 총장에게 부당한 지휘권 행사로 압력을 행사했다. 대북송금 수사를 정치권에 맡기고 수사를 포기하는 것은 직무유기다." 

 송 총장 내정자는 "총장이 되면 검찰혼이 담긴 수사를 하겠다" 답변했는데, 지금 대검 중수부가 2002 대선자금 수사와 노무현 대통령 측근비리 사건 수사에서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 허언(虛言) 아니었다는 판단이 든다. 다른 한편으로 송광수 총장이나 대선자금 수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은 검사 함승희에 비해서는 행복한 검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적어도 검사 보다는 정치권력의 간섭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운 상황에 놓여있으므로.

 다음은 '미완의 검사' 함승희가 옷을 벗은 , 자신의 저서('성역은 없다') 남긴 소회다.

"
우리 검찰은 역대 정권 이래 국민으로부터 권력의 시녀라는 인상을 받아왔다. 이유는 99퍼센트의 검사 고유 업무를 해내고 있음에도 1퍼센트에 해당하는 눈에 띄는 정치적 사건 수사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검사 생활을 통해 점이 가장 불만스러웠다. 그런데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났다. '성역없는 수사'라는 무대가 설치됐다. 무대 위에서 나는 동화은행장 사건이라는 평생의 역작을 연출하기로 마음먹고 메가폰을 잡고 검사로서의 나의 운명을 걸었다. 많은 --재계 거물들의 부패 고리를 잡아냈다. 모처럼,아니 검찰사상 처음으로 위에서 지시되거나 여론에 의해 수사가 촉구되지 않은 순수한 검찰 정보로서 우리 사회의 부패 구조를 파헤친 것이다. 그야말로 우리 사회 부패 구조의 '거악(巨惡)'들이 줄줄이 걸려들었다. 누구를 주연으로 삼고 누구를 조연으로 삼아야 될지 모를 정도의 주연급만도 여러 걸려들었다. 그런데 '() 물증확보, () 소환조치'라는 이상한 논리에 밀려 때를 놓치게 되고, 결국 사건을 망쳐버렸다. 내가 아쉬워하는 것은 검찰의 위상을 바로 잡을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점이다. 많은 후배 검사들이 훗날 정치적 사건을 수사하면서 벽에 부딪혔을 '어느 어느 시절, 함승희 검사 수사의 본보기가 있지 않은가'라는 초석을 놓지 못한 점이 못내 안타까웠다. 그러나 퍼센트 성공한 사건만이 역사의 귀감이 되는 것은 아니잖는가. 일본의 '조선의혹 사건'처럼 실패한 수사도 나름대로 반성하는 의미에서 귀감이 있는 것이다"

 함 검사가 인용한 조선의혹 사건은 일본 동경지검 특수부가 정치 권력과 대결해 좌절한 사건이다.


일본 해운 회사들이 선박 발주와 관련, 조선 회사에서 받은 리베이트 일부를 국가 융자를 받기 위한 법안 제정 목적으로 정치권에 살포한 것이 사건의 얼개인데, 집권 자유당 거물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간사장( 사무총장)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정조회장( 정책위의장) 연루돼 있다는 점에서 ()-() 대결의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동경지검은 1954년 4 사토가 조선 공업회, 선주 협회로부터 자유당 몫으로 2000만엔, 한노 해운의 마타노 사장으로부터 개인적으로 200만엔을 받은 혐의를, 이케다는 오사카 상선 등에서 200만엔을 받은 혐의를 밝혀내고 우선 사토에 대해 요시다 내각에 체포 허락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사토와 이케다는 전후 일본 정계의 최대 실력자로 부상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왼팔과 오른팔 격으로,후에 모두 총리 대신의 자리에 오르는 수제자였다. 요시다 내각의 법무상(법무부장관) 이누카이 다케루(犬養健)로서는 법무상임에도 내각의 방패막이가 되어 검찰에 맞설 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결국 이누카이는 법무상이 개별 사건에서 검찰총장을 지휘할 있는 권한(지휘권 발동)으로 검사총장(검찰총장) 사토 간사장에 대한 체포청구 허가 청훈을 "중요법안이 통과될 때까지 체포청구를 미루고 임의수사를 하라" 묵살했다. 사토의 소환이 지연된 가운데,돈을 피의자들이 하나 석방되면서 검찰 조사시의 진술을 번복,사건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당시 일선의 수사검사는 가와이 노부타로(河井信太郞)였다.

 
함승희 검사가 '동화은행장이 직원들 시켜 시중 백화점,호텔에서 영수증을 모으게 한다고 구설수'라는 내용의 동향 보고서를 단서로 동화은행장 비자금 사건의 물꼬를 텄듯이,가와이 검사 또한 해운회사 사장실에서 발견된 'S 200, I 300··'(후일 S 사토, I 이케다 임이 밝혀진다) 라고 적힌 암호 메모를 추적,권력 핵심의 비리를 밝혀냈다는 점에서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 또한 검찰혼을 불사른 수사의 막바지에 정치 권력의 압력으로 좌절의 쓰라린 패배를 맛본 검사로서의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조선의혹 사건에서 검찰의 허를 찌른 법무상의 지휘권 발동이라는 묘안을 검찰 내부 인사가 요시다 내각에 전달, 검찰 우위의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켰듯이 동화은행장 사건에서도 당시 검찰 수뇌가 정치권의 수사 중단 요구에 부응했다는 점에서도 가와이 검사와 함승희 검사는,시대와 국적을 넘어 검사로서의 동질적인 분노의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있다.

독자들은 이제,동료의원의 체포동의안 부결 직후 표출된 함승희 의원의 분노에 공감할 있는지... 2004 1 18

 

 

최근 게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