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체 잊혀지지 않는 취재원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문득 문득 떠올라
한 동안 상념에 젖게 하는-.
한나라당 장윤석 의원(아래 사진 오른쪽)이 그렇습니다.
그는 노무현 정부 출범 후,
법무부 검찰국장에서 서울고검 차장으로 좌천됐습니다.
서울 지검장을 목전에 두고 한직으로 밀려났으니
검찰사상 전례 없는 수모를 당한 셈이지요.
그래서 설욕하기 위해
2004년 총선에 출마했는지도 모릅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저는,
그의 부침을 오랫동안 지켜봤습니다.
17대 국회에 입성했으니
다시 떠올랐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의 부침을 바라보며
인생사를 생각해 봅니다.
아래는 연전에 세계일보 e-기자클럽을 통해
장 의원의 인생 유전을 소개한 글입니다.
1인칭 관찰자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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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의 검찰 개혁 태풍이 휘몰아치던 2003년 3월 13일.
장윤석 서울고검 차장검사가 26년의 짧지 않은 검사 생활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나는 먼 친척의 부음 기사를 읽는 기분으로 접할 수 없었다. 그는 초년병 법조 기자 시절의 내 기억 속에, 강렬한 인두 자국을 남겨준 검사였기 때문이다.
1994년 4월 서울지검 기자실을 들어섰을 때 나는 입사 4개월 차의 초년병이었다. 장 검사는 나 보다 7개월 앞서 서울지검 공안 1부장에 임명됐다. 그 때는 장 검사도 나도 한 달 뒤 검찰을 강타한 '5.18' 고소-고발 태풍의 후 폭풍을 예감조차 못하고 있었다. 폭풍 전야의 고요함이라고 했던가. 온 종일 발품을 팔아도 화제 박스 하나 챙기기 힘들 정도로,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하리 만큼 평온한 나날이었다.
정동연 광주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 등 322명이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 등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한 것은 94년 5월13일. 김영삼 대통령이 93년 5.18 13주기를 맞아 "역사에 맡기자"는 취지의 담화문을 발표한 지 1년 만이었다.
검찰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사건 주임 검사를 맡은 장 검사가 그 중심에 섰다. 공안1부 검사 10명 전원이 투입됐고 단일 사건으론 검찰 사상 최대인 269명을 조사했다. 10만 2000여쪽(라면상자 400여개 분량)의 수사 기록이 작성됐다. 사실 관계 규명에 있어서는 비교적 충실했다는 평을 받았다.
마침내 95년 7월 18일, 검찰의 결론은 '공소권 없음' 이었다.
"피의자들이 정권 창출 과정에서 취한 '5.18' 진압 등 일련의 행위는 헌법질서를 바꾸는 고도의 정치 행위로서 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으로 이른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여론의 비난이 빗발쳤다.
장 검사는 "나는 역사학자도 정치학자도 아닌 수사 검사로서 불행했던 과거사의 진상을 밝혀내고 이에 대한 법적 평가를 내리는데 최선을 다했다"며 "우리의 수사 결론이 15년 전 일에 대한 평가이듯, 우리도 15년 뒤에 다시 후세로부터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경건하게 임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해도 넘기지 못하고 검찰의 결론은 심판대에 올랐다. 당시 집권당이던 민자당이 여론에 밀려 '5.18 특별법'을 제정키로 결정한 것이다. 장 검사는 인천지검 차장 검사실에서 그 보도를 씁쓸한 심정으로 지켜봐야 했을 것이다.
그는 "당시 수사진의 입장에서 피 고소-고발인에 대해 불기소 유예처분을 내린 것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특별법 제정 자체가 현행 실정법 테두리 내에서는 5·17 군사쿠데타 주역들에 대한 처벌이 불가능하다는 반증 아니냐"고 말했다.
서울지검의 새로운 수사팀은 이제 넉달 전 내렸던 결론을 스스로 뒤집기 위해 새로운 논리를 개발해 내야 할 딱한 처지가 됐다. 새 수사팀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는 모두가 알고있는 그대로다. 전두환, 노태우씨가 서울 구치소의 3.5평 독방 속에 수감되는 동안 '공소권 없음팀'의 장 검사는 '잊혀진 검사'가 됐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96년 8월 26일이었다.
전두환, 노태우 재판 1심 선고공판이 있던 그 날, 나는 우연치곤 얄궂은 장소에서 그와 조우했다. '전두환 사형, 노태우 징역 22년 6월'의 형량을 선고한 1심 재판부(서울지법 형사합의 30부,재판장 김영일 부장판자)는 그날 밤 기자들과 이른바 뒤풀이 회식 자리를 마련했다. 우리들이 가 보니 그 곳에 이미 장 검사가 와 있었다.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린 당시 서울지검 공안1부 검사들과 함께였다.
화장실에서 만난 장 검사는 "최종심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서울에 오지 않으려 했는데 후배들 심정이 심란할 것 같아서..."라면서 채 말을 맺지 못했다. 萬感의 5.18사건이 1차 매듭된 그 날 같이 고생했던 '공소권 없음팀' 부원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난 자리가 공교롭게도 1심 재판부와 기자들과의 회식 자리였던 것이다. 김영일 부장과의 어색한 인사를 마치자 마자 그는 후배 검사들을 동반하고 총총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의 쓸쓸한 뒷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두 번째 만남은 내가 4년 4개월의 법조 기자 생활을 정리하고 외교부로 발령이 난 직후였다. 98년 여름이었다. 장검사는 서울고검 검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고검 근무는 속칭 '물 먹은' 자리라고 한다. 98년 고검 검사에게도 수사권이 부여되고 고검 부장이라는 직책이 신설되기도 했지만 그 전까지는 대기 발령이나 다름없는 자리로 통했다. 김대중 정권 출범 직후에는 前 정권에서 잘 나가던 검사들이 줄줄이 고검으로 발령 받았다. 장 검사의 고검 근무를 '공소권 없음' 결론과 직접 연결짓고 싶지 않지만 딱히 그렇지 않다는 근거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토요일 점심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울지검 청사 앞 고깃집에 소주 한 병을 마주하고 앉았다. 나는 그의 검사로서의 운명을 가른 '공소권 없음' 결론이 내려진 배경을 알고 싶었다.
실제 5.18 수사는 서울지검 공안1부 검사들이 했지만 최종 결론을 내리는 과정에는 김도언 검찰 총장을 비롯한 검찰 수뇌부가 서울지검 간부 및 주임검사와 합동 회의를 갖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장 검사의 보고 라인은 한부환 서울지검 1차장, 최영광 서울 지검장- 송종의 대검 차장- 김 총장이다. 안강민 대검 공안부장과 김재기 대검 공안 기획담당관 등이 측면에서 관여했을 것이다.
"장 선배 혼자 결정내린 것은 아니죠"
"뻔한 걸 묻고 그래"
"위에서 내려온 主文(검찰의 최종 수사입장을 설명하는 글)이 장 선배 결론과 같았습니까"
"우리 소주나 한 잔 더 하지"
그 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그 후 어느 해인가 법무부 국정감사 취재를 나가 복도에서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다. 초임 검사장이 흔히 임명되는 법무부 기획관리
실장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한 참 후에 장 검사가 서울 지검장 임명 직전의 길목인 법무부 검찰국장에 임명됐다는 기사를 읽었다. 프로필엔 "5.18 사건 공소권 없음 결정 이후 오랫동안 閒職을 머물다...."라고 씌여 있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이제 5.18 사건의 그늘에서 벗어났는가', 라고 뇌었다.
그러나 나의 기대와는 달리, 들려온 것은 그의 퇴임 소식이었다. 그 것도 검찰국장에서 서울고검 차장검사로 좌천된 후의 퇴장이었다.
그의 퇴임사가 아직도 귀에 울리는 듯 하다.
"서열 파괴라는 미명 하에 선배를 후배 밑에 앉히는 것은 떠나라는 협박이다. 초연히 사라지는 것이 의연한 줄 알지만 불명예스럽게 서울고검에 부임한 뒤 떠나는 것은 스스로 물러서기 보다는 차라리 인사 조치의 총탄에 맞아 죽어 나가기로 마음먹은 때문이다. 법무부 검찰국장을 고검 차장으로 좌천시킨 검찰사 초유의 불합리한 인사를 검찰 정사에 공식 기록화함으로써 다시 있어서는 안될 사건으로 기억하게 하고 역사적 평가를 위한 공식자료로 남기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실상을 모르는 저의 戰死를 후배들을 위한 용퇴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려는 뜻도 있다"
그가 퇴임사를 내게 미리 보여줬다면 나는 歸去來辭 같은 시 한 편 읊조리고 떠나가라고 조언했을 것이다. 그와는 별개로 나는 생각해 본다. 장 검사가 5.18 수사의 주문 결정 과정에서 당당히 유죄 소신을 폈다면 지금쯤엔 검찰총장이 돼 있을까, 라고.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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