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2월,
상하이 태생인 26살의 청년 후진타오(胡錦濤)는
이역만리에 위치한 간쑤성(甘肅省) 여정길에 오릅니다.
중국 서북 변경의 오지로 향하는 그의 심정은 참담했습니다.
2년 전 베이징의 칭화대학(수리공정학부 하천발전공장학과)을 졸업하고
대학에 남아 교수를 꿈꾸고 있을 때만 해도 그의 앞 길은 밝았습니다.
문화혁명의 소용돌이는 하루 아침에 그가 쌓아놓은 모든 것을 허물어뜨립니다.
학창 시절 믿고따른 학교 당조직을 보호하다 문혁 세력으로부터
'집권파' '반혁명 지식분자'로 낙인찍힌 것이지요.
후진타오는 그 당시,
아버지가 지주로 분류되는 바람에 대학은 꿈도꾸지 못할 신분으로 전락한 육촌 누이를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재능있고 총명했으나 시대를 잘못만나 평생을 농촌에서 썩어야했던 누이말입니다.
미래가 없다는 자각과 꿈의 포말이 터진 끝의 상실감.
간쑤성 댐 건설 현장으로 향하던 그의 심경이었을 것입니다.
후일 중국 국가주석이 될 명문 칭와대 졸업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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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서 막일꾼과 함께 벽돌을 쌓으며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생활은?
입이 무겁기로 소문난 그가 '정말 말이 아니었다'고 회고했을 정도.
유일한 낙이라면,
캠퍼스 커플이었던 약혼녀로 먼저 간쑤성에 가 있던
류융칭(劉永淸.아래 사진)을 종종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 정도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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댐 건설 현장에서 벽돌쌓던 그가 36년만에 중국 국가주석의 자격으로 한국 국회의사당을 찾았습니다. 지난 17일 국회 본회의장 관람석에 앉아 그의 연설을 듣고있노라니 그의 표정과 음성 위로 굴곡많았던 그의 과거가 오버랩됐습니다. 국회 본회의장 맨 앞 줄에 앉아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남편의 연설을 경청하던 류융칭 여사의 삶과 함께 말이죠.
막일꾼까지 추락했다가 정상에 오른 그의 삶을 복기해 보면
'지도자란 비르투(역량)와 포르투나(행운), 네체시타(시대정신과의 합치)라는 세 요소를 갖춰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에 힘이 실립니다.
날개를 잃고 추락했던 문화혁명 당시의 상황만 놓고봐도
후일 문혁 4인방의 몰락 이후의 시대정신은 후진타오 편이 되었습니다.
그가 당 고위직 진출의 기로에 섰을 때,
당정과 언론은 그의 문혁 당시 행동을 근거로 그를
'매우 온당하고 착실한 성격을 지닌 인물'로 평가합니다.
젊은 시절의 그를 한없이 절망케 한 문혁의 회오리는 그를 서북 변경으로 내몰았지만, 그는 그 곳에서 평생의 정치적 후원자 쑹핑(宋平)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를 간쑤성 간부로 키운 것도, 중국 공산당 간부들에게 소개한 것도,
자신의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에 후진타오를 추천한 것도 쑹핑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쑹핑이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점이
후진타오의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후진타오-대륙을 질주하는 검은 말'(런즈추, 원쓰융 지음, 임국웅 옮김)은 '고급간부서류'라는 중국 고위층 신상정보 자료를 인용, '쑹핑의 집이 중앙 고위층 중에 청탁자들이 출입하기 가장 어려운 집이었다'고 소개했습니다.
참고로 후진타오는 말 띠입니다.
그래서 그가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에 올랐을 때,언론은 그를
'설산(雪山.그의 마지막 부임지인 티벳)에서 뛰쳐나온 검은 말'이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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