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교에 입학해서
맨 처음 이름을 교환한 친구 만큼
오래 기억되는 이도 없습니다.
대처에 있는 고등학교로
유학을 간 저는
지금도 1학년 2반의 첫 날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내게 처음으로 말을 건
친구 K의 얼굴과 음성,
진짜 일본 사람처럼 생겼던
일본어 선생님이자 담임 선생님...
열린 우리당 이종걸 의원은
고등학교 친구 K와 같은 정치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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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6대 총선 직전에 출입처가 국회로 바뀐 저는
총선 직후 이 의원을 처음 만났습니다.
특색있는 초선의원들을 소개하는
시리즈 기사의 인터뷰였지요.
기자되고 의원 인터뷰는 처음이었고
그 또한 의원된 후 기자와의 인터뷰는 처음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자리를 생각해 보면
서먹 서먹했던 당시 감정이 되살아납니다.
그렇게 이 의원과 처음 만나
5년 넘게 지내다 보니
지금은 서먹하지 않은 사이가 됐습니다.
 
 이 의원과의 만남 중에
특히 여운이 남는 장면이 있습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일이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어느 가을날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이 선배, 노무현 후보 따라다니기 힘들지 않아요?'
'힘 빠질 때도 있지'
 
 이 의원은 씁쓸히 웃었습니다.
그 해 4월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한 노 후보는
6월 지방선거 참패 이후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월드컵 붐에 편승한 무소속 정몽준 의원은
이미 7월초부터 여론조사 지지도에서
노후보를 제치고 수직 상승하고 있었지요.
당 내에선 '노무현, 정몽준 단일화만이 살 길'이라는 주장이
점차 힘을 얻어가고 있었습니다.
10월초 발족된 '후보 단일화 추진협의회'의 압박도
날로 가중되는 고립 무원의 상황에
이 의원은 노 후보 고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다 지면 너씽(Nothing)인데 단일화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 의원은 말이 없었습니다.
그의 양미간이 잔뜩 좁혀지며 골이 생겼습니다.
곤혹스러울 때마다 보이는 이 의원 특유의 표정입니다.
한동안 민망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저는 화제를 돌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배는 왜 노후봅니까?'
 
이 의원의 대답을 듣고
저는 더 이상 그의 결정을 놓고
왈가왈부할 의욕을 잃었습니다.
 
'나는 노 후보를 끝까지 지지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
순전히 개인적 이유인데 말이야, 내가 정치하는 것을 극구
만류하신 아버님과 다짐을 했거든.
정치 활동하면서 할아버님 이름에 누가되지 않도록 하라는
다짐이지. 이러다 안되면 정치 그만 두면 되지 뭐'
 
 그날 나는 이의원의 조부가
독립운동가인 우당 이회영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게됐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이회영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우당 이회영은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과
역시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의 딸 사이에
태어난 명문대가의 출신으로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탄되자
온 집안이 만주로 이주,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개화파 지사입니다.
이덕일씨는 저서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에서
'조선 제일이라는 뜻의 삼한갑족 출신으로
독립운동하다 재산을 탕진,
 딸의 옷까지 팔아먹고 누워 있어야 했던 이회영에게 끌린 것은
우리 역사에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지닌 인물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었다'고 썼습니다.
 
 이 의원의 초심이 변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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