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의 북쪽 언덕 위에 자리한 금각사는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1358~1408)가 부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지은 절이다. 원래 이름은 로쿠온지(鹿苑寺).

요시미츠는 일본 남북조의 분열을 통일한 뒤 막부의 권력을 강화했으며 쇼군에서 물러난 뒤 출가했다. 은퇴라고는 하지만 로쿠온지를 별궁처럼 사용하며 막후에서 실권을 행사했다. 아시카가는 자신이 죽은 뒤 로쿠온지를 선종의 유파인 임제종 사찰로 바꾸도록 명했다.

이후 이런 저런 전란의 와중에 불에 타거나 훼손됐던 로쿠온지는 1950년 7월2일 새벽 젊은 승려인 하야시 쇼켄에 의해 전소됐다.

하야시는 방화 직후 금각사에서 죽으려했으나 2층 입구가 잠겨있자 뒷산으로 올라가 수면제를 먹고 단도로 몸을 찔렀다. 하지만 죽지는 못했다. 다음날 체포된 하야시는 경찰에서 "사회가 제재를 가한다면 감수하겠으나 결코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놀라서 달려온 그의 어머니는 하야시의 성장 과정 등을 진술했다. 그리고 돌아가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숨졌다. 공판에서 하야시는 "자기혐오, 미에 대한 질투, 아름다운 금각과 함께 죽고 싶었던 점, 사회에 대한 반감, 방화에 대한 사회의 비판을 듣고 싶다는 호기심에 방화했다"는 검찰의 공소 이유에 "기소 사실 그대로, 별로 할 말이 없다. 정말이라면 정말이고, 정말이 아니라면 정말이 아니다"고 답변했다. 하야시는 징역 7년을 선고받았고 이후 5년 3개월로 감형돼 1955년 10월 만기 출소했다. 이듬 해 폐결핵이 악화돼 사망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로쿠온지는 1955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됐다. 2,3층이 금박을 하고 있어 금각사로 불린다.

금각사는 1963년부터 1965년까지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됐던 일본의 소설가인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같은 이름의 소설을 쓰면서 유명해졌다. 미시마는 하야시의 금각사 방화 사건을 5년에 걸쳐 취재했다. 소설 '금각사'는 실제 사건에 토대를 둔 '시사 소설'이면서 미시마 본인의 성장기 체험이 녹아든 '고백 소설'이다.

 

 

 

금각사는 3개 층이 서로 다른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법수원(法水院)으로 부르는 1층은 11세기 헤이안 시대 대표적인 건축 양식인 신덴즈쿠리 양식이다. 이 양식은 자연 그대로의 목재를 사용하고 벽은 흰색의 석고로 마감해 주변의 풍경을 돋보이게 만든다고 한다. 조운동(潮音洞)으로 부르는 2층은 무사 저택의 주된 건축 방식인  부케즈쿠리 양식이다. 2층에 불상이 모셔져 있다. 3층은 구경정(究竟頂)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선종 사찰의 전통적인 양식으로 지어졌다. 이 곳에는 부처의 사리가 황금 항아리 속에 들어있다. 내부의 바닥과 천장, 벽을 모두 황금으로 발라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소설 '금각사'의 주인공 미조구치의 평가. 

"원래 금각은 불안이 세운 건축, 한 사람의 장군을 중심으로 수많은 어두운 마음의 소유자들이 세운 건축이었던 것이다. 미술사가가 양식의 절충밖에 발견하지 못한 3층의 부조화한 설계는 불안을 결정화할 양식을 추구하여 자연히 그렇게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었다. 만약 금각이 하나의 양식으로 세워진 건축이었더라면 그 불안을 포섭하지 못하고 일찌감치 붕괴되어버렸으리라"(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허호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17, 55쪽)

지붕은 피라미드형으로 얇은 나무껍질을 발라 덮었다. 맨 꼭대기에는 청동으로 만든 봉황 조각상을 얹었다.

'나는 연못 쪽에 서 있었고, 금각은 연못 건너편에서 기울기 시작하는 햇빛을 그 정면에 드러내고 있었다. 수청은 왼쪽 저건너에 절반쯤 가려져 있었다. 물풀 잎사귀가 드문드문 떠 있는 연못에는 금각이 정교하게 투영되어, 오히려 그 모습이 완전하게 보였다. 연못 물에 반사된 석양이 각층의 추녀 밑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원근법을 과장한 그림처럼 고압적인 금각은 몸을 약간 뒤로 젖힌 듯한 느낌을 주었다.'(위 책 38쪽) 

 

소설 '금각사'에는 미시마의 성장통이 섬세한 필치로 묘사돼있다.

젊은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밤새워 고민해봤을 '미()'의 추구, 인식론적 고민,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치열한 성찰 등에 관한 미시마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우익 사상에 오염되기 전인 미시마의 생각이다. 그의 고뇌는 금각사를 매개로 응집됐다가 풀어지고, 다시 긴장되면서 끝내는 금각사와 함께 불길 속으로 내던져지면서 강렬한 생의 의지로 약동한다.

 

 

미조구치는 왜 금각사를 불태우려 했을까.

'금각을 불태운다면 그 교육적인 효과는 각별하겠지. 그 덕분에 사람들은 유추에 의한 불멸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리라. 단지 그냥 지속되어 왔던, 550년 동안 연못가에 계속해 서 있었다는 것이 아무런 보증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생존을 떠받치고 있는 자명한 전제가 내일이라도 무너지리라는 불안을 배우기 때문이다'(위 책 283쪽)

 

 

  미조구치는 금각사에 불을 지르고 뒷산으로 달려가 불타는 금각사를 바라본 뒤 이렇게 생각한다.

다음은 '금각사'의 마지막 문장.

'일을 하나 끝내고 담배를 한 모금 피우는 사람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듯이, 살아야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런 끝맺음에 필자는 안도한다. 생의 좌표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우리의 필립(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인 샐리를 선택했을 때처럼.

물론 소설은 소설이다. 현실의 미시마는 나이가 들면서 우익 사상에 경도된 나머지 1970년 11월25일 자신을 따르던 우익단체 '다테노카이'(방패회) 대원들을 이끌고 이치가야 육상 자위대에 난입했다. 이 곳에서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을 만들 수 있는 헌법 개정과 이를 위한 자위대의 궐기를 호소했다. 그 호소에 자위대원들이 호응하지 않자 미시마는 할복자살했다. 그의 나이 만 45세. "살아야지"라고 생각했던 그 미시마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바라본 금각사는 금박으로 과도하게 분칠한 모습이다. 불타기 전 세월의 이끼에 덮혀있던 금각사의 옛 모습에 비해 왠지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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