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오사카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4박5일의 짧은 일본 문화탐방 기행을 위해서다. 첫 탐방은 오사카(大阪)와 나라(奈良), 교토(京都) 순으로 찾았다. 돌아올 때는 당시 일본을 강타한 태풍으로 오사카 간사이 공항이 폐쇄되는 바람에 나고야 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덕분에 당초 일정에 없던 나고야 지역 문화 유적도 둘러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오사카는 일본 전국시대의 패자(覇者)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근거지였고 그의 거성이 남아있는 곳이다. 나라 일대는 옛 백제, 가야,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渡来人)들이 정착했던 곳이다. 지금은 다카마쓰 고분과 아스카사 정도의 유적이 도래인들의 솜씨와 아스카 시대의 편린을 전해줄뿐이다.

유홍준은 저서 '나의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에서 가야, 백제인이 일본으로 건너간 유래를 이렇게 설명했다.

"왜에 집단으로 건너간 한반도 도래인은 5세기 초 가야 사람들이었다. 삼국이 날카롭게 대립할 때 가야는 백제와도 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러다 400년, 백제가 부추기는 통에 가야는 왜와 함께 대대적으로 신라를 공격하여 서라벌 가까이까지 쳐들어오게에 이르렀다. 신라는 자신들이 오래전부터 고구려의 신민(臣民)이었음을 강조하며 고구려에 원군을 요청했다. 저쪽 동네 애들이 패를 지어 때리니 좀 도와 달라는 식이었다. 광개토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하고 낙동강 하구까지 쫓아가 가야와 왜를 섬멸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이때의 일을 '임나가라(任那伽羅)의 종발성(從拔城, 경남 김해로 추정)'까지 진격했다고 했다. 이후 금관가야는 쇠약해지고 여러 가야국들도 큰 타격을 입으면서 전기 가야연맹은 와해되고 말았다. 이때 김해 지역에 살던 많은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이민을 갔던 것이다. 가야 도래인들이 가져간 문명의 선물은 야철(冶鐵) 기술과 가야 도기였다. 이제 왜에서도 비로소 철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5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일본 열도 중부지역에 야철소가 퍼져나간다.(중략) 가야 도래인들은 가야 도기와 똑같은 질의 도기를 만들어 일본 도자사에서 일대 기술혁신을 이루었다. 이를 스에키(須惠器)라고 한다. '스에'는 '쇠'의 한자음을 빌려 표기한 것이다. (중략) 가야의 도래인들이 처음 스에키를 만든 곳은 가까운 아스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오사카 남부 이즈미(和泉) 지역이다. (중략) 스에키는 김해 지역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가야와 왜는 여전히 친형제처럼 지냈다. 4세기 이래로 왜는 백제와도 아주 가깝게 지내서 형제나라 이상으로 친했다. 무령왕이 일본에서 태어나게 된 배경에서도 그 친연관계를 볼 수 있으니, 왕손끼리 통혼을 할 정도였다. 왜는 끝까지 백제의 우방이었다. 4세기 중엽 백제 근초고왕(재위 346~375년) 시절에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 박사는 왜에 말(馬)과 한자를 전해주었다.(중략) 왜에 간 왕인은 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왜왕의 요청에 따라 신하들에게 경(經)과 사(史)를 가르쳤다. 왕인의 후손들은 후미노오비토(文首)라는 성씨를 하사받고 가까운 아스카에 살면서 공무 기록, 재정 출납, 징세 사무,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업무에 종사했다. 또 도래 씨족으로 전하는 아치키노후비토(阿直史)는 아직기의 후손이라 생각된다. 6세기까지 야마토 조정에서 한문을 해독하고 문장을 작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대부분이 도래인들이었다."

이들 도래인은 4세기초 형성된 일본 고대국가인 야마토(大和) 정권과 협력하면서 한반도에서 가져간 기술과 기능을 통해 일본 고대 국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은 야마토 정권부터 일본 천황의 전신인 오키미(大王)가 귀족 계급과 통치하는 권력 체제를 구축했다. 도래인들은 아스카 지역에서 모여살면서 건축과 토목, 제철, 양잠 기술과 예능 분야에서 활동했다. 농지 개간과 관개 사업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아스카 시대 명문가로 자리잡았다. 칼과 도자기, 비단, 마구, 출납이나 외교문서 등을 담당한 전문 직종도 도래인들이 담당했다. 특히 도래인으로 추정되는 소가씨(蘇我氏)는 6세기에 도래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유력 호족으로 성장해 쇼토쿠(聖德) 태자와 손잡고 아스카 시대를 이끌어갔다. 쇼토쿠 태자의 어머니도 소가씨였고 스이코 여왕의 어머니도 소가씨였다. 소가씨는 7세기 전반까지 4대에 걸쳐 야마토 정권의 대신을 지냈다. 710년 겐메이 천황(元明天皇)이 헤이조쿄(현재의 나라현)로 천도하면서 야마토 시대가 끝나고 나라 시대가 개막됐다. 나라 천도 이후 아스카 지역은 쇠락해갔다. 지금도 아스카 지역을 둘러보면 나지막한 야산과 마을의 풍경이 한국의 여늬 시골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고향을 떠난 도래인들이 왜 이 곳에 정착했는지 그 마음이 천년이 넘는 세월을 넘어 느껴진다.

 

 

일본 나라현 이코마군 이카루가정에 위치한 법륭사( 法隆寺). 일본어로 호류지(ほうりゅうじ). 성덕종의 총본산이다. 쇼토쿠 태자가 601년 지은 궁에서 연원한 사원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인 금당과 오중탑이 있다. 법륭사 건축물은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법륭사 남대문. 주차장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진입로 양편에는 한국의 산사처럼 곰솔로 조성돼 있다. 남대문은 본래 서대문을 지금으로부터 570여년 전인 무로마치 시대에 옮겨놓은 것이다. 원래 맞배지붕이었는데 옮기면서 팔작 지붕으로 개조됐다. 그래도 나라 시대의 목재가 사용됐다는 점 등이 고려돼 국보로 지정됐다.

 

 

남대문을 지나 중문으로 가는 길. 양측 담장 사이로 길이 나 있어 골목길을 걷는 듯한 분위기다. 양편에 스님들의 거처와 불사를 보는 사무소 등이 있다.

 

법륭사 담장들은 에도, 메이지 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담장이 사다리꼴 형태다.

 

 

중문을 들어서면 일본 아스카 시대 건축을 대표하는 금당이 보인다. 고구려 출신 화가 담징이 벽화를 그렸다는 바로 그 금당이다. 필자도 중고등학교 시절에 그렇게 배우고 외웠는데 지금은 논란이 있다. 유홍준은 저서 '나의문화유산답사지'에서 "담징이 백제를 거쳐 일본에 건너가 채색, 지묵, 연자방아의 제작방법을 전했다는 시기는 610년이다. 법륭사가 불탄 것은 670년이니 그렸다 해도 이 작품은 아니다. 담징이 그렸다는 전설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일본에는 그렇게 전하지 않는다."고 썼다.

 

금당 안에는 청동석가삼존상이 있다. 622년 정월 쇼토쿠 태자와 태자비가 병으로 몸져 눕게되자 왕후와 왕자, 신하들이 이들이 완쾌할 수 있도록 기원하기 위해 석가상 제작을 도리 불사에게 명했다. 태자와 태자비는 그 해 2월 숨졌다. 석가삼존상은 623년 3월 완성됐다. 이 불상의 제작자는 도리 불사다. 그는 백제에서 건너온 도래인 후손으로 추정된다. 일본 미술사가들은 아스카 시대 불상을 도리 불사의 작품을 기점으로 도래 양식과 도리 양식으로 구분한다. 도리 불사라는 창조적 장인이 백제풍 불상을 답습하던 기존 불상과 다른 독창적 불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도래 양식은 뒤에 나오는 백제관음상이 대표적이다. 도리 양식은 도래 양식에 비해 불상의 얼굴이 직사각형으로 길다.

 

법륭사 대강당. 화재로 소실된 것을 헤이안 시대에 재건했다.

 

청동 등롱은 에도 시대인 1694년 5대 쇼군 츠나요시의 어머니인 케이쇼인이 시주한 것이다.

 

법륭사 목조 오중탑. 아스카 시대 건축미가 집약된 탑이다. 법륭사 경내 바닥은 하얀 모래가 깔려 있다. 오중탑 오른쪽으로 회랑이 보인다.

 

오중탑 내부 네 면에는 소조상이 있다. 동쪽면은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이 대화하는 장면, 서쪽면은 사리를 배분하는 장면, 남쪽면은 미륵하생 장면, 북쪽 면은 부처 열반 장면이다. 특히 북쪽 면의 소조에는 부처의 제자들이 오열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조각돼 있어 '우는 부처'라는 별칭이 붙어있다.

 

 

회랑. 아스카 시대 건물이다. 법륭사 서원 가람의 안팎을 이 회랑이 나누고 있지만 나무 창살이 닫힌 듯 열려 있다.

 

 

회랑을 거쳐서 서원 가람을 빠져나오면 성령원과 만난다. 원래 승방이었는데 가마쿠라 시대에 앞부분을 개조해 쇼토쿠 태자를 모시는 전각으로 만들었다. 안에는 쇼토쿠 태자상이 모셔져 있다.

 

멀리 오중탑과 금당이 보인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두 건축물의 지붕선이 붓칠하듯 그려져 있다. 관광객이 들어가고 있는 건물은 백제관음상(百濟觀音像)이 안치돼 있는 대보장전.

 

백제관음상

 

교신 스님이 숨진 쇼토쿠 태자를 그리워하며 739년 건립했다는 몽전. 쇼토쿠 태자가 이 곳에서 명상을 하던 도중 부처를 만났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몽전 감실에는 쇼토쿠 태자를 모델로 만들었다는 구세관음상이 봉안돼 있다. 구세관음상은 녹나무를 깎아 만든 아스카 시대의 대표적 불상이다. 특별 전시기간에만 일반에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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