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기이한 인연입니다.” 

미국 내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인 잭 프리처드 한미경제연구소(KEI) 소장은 한국과의 인연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운을 뗐다. 그는 “주일 미군 장교 시절부터 15년 동안 일본 전문가로 활동했는데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백악관 선임 보좌관으로 특채된 직후 북한 잠수함이 동해로 침투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북한 문제에 천착하게 됐다”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행운이었다”고 회고했다.

 




그 이후 프리처드 소장은 한국과 미국, 북한, 중국 등 4개국이 모여 한반도 긴장완화 문제를 논의한 4자회담과 북핵 제네바 협상의 산물인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관련 대북 특사로 활동하며 한반도 전문가로 입지를 굳혔다.

지난해 11월 영변 핵시설 방문을 포함, 북한을 11차례 방문했다. 북핵 6자회담이 장기간 공전하는 가운데 미 의회 일각에서 북·미 직접 대화 목소리가 높아지고 미 행정부가 대북 식량 지원 방안을 검토하는 등 워싱턴의 대북 기류 속에서 미묘한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 최근 워싱턴DC에 위치한 KEI 소장 집무실에서 프리처드 소장을 만나 북핵 등 한반도 현안 등을 주제로 환담했다.

―지난 1일 미 상원 외교위가 주최한 북한 청문회에서 존 케리 위원장이 북·미 직접 대화를 촉구했다.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는 기존의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정책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미 행정부와 의회가 충돌하는 양상인데 당신은 어느 쪽에 서있나.

“그날 상원 외교위 요청으로 서면 증언을 했다. 내 입장은 오바마 행정부가 보다 적극적이고 종합적인 대북 정책을 마련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가 현 대북 정책 기조를 유지한다면 자칫 북한의 핵 보유국 지위가 굳어지는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 그렇다고 북한의 나쁜 행동에 보상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라는 의미는 아니다. 무엇보다 한국과 긴밀하게 협의하면서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안(1874호)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중국을 강하게 압박해야 한다. 그런 전제조건이 충족된다면 우리는 케리 위원장이 제안한 북·미 직접 대화로 이동할 수 있다. 우선 농업과 재난 구호 등과 같은 인도적 현안에 대한 대화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런 다음 과거 북·미가 진행했던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 협상으로 이동할 수 있다. 신뢰 구축 방안의 일환으로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만나 현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기 위한 4자 대화를 시작할 필요도 있다. 이런 대화 과정에서 우리는 한국 등과 일치된 대북 제재에 나서야 한다. 1874호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면 이런 일련의 대북 대화는 탁상 공론이 될 수밖에 없다.”


―대북 압박 과정에서 중국의 역할을 강조했는데 중국은 대북 제재에 소극적인 것 같다. 최근엔 중국이 김정은을 초청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내가 오바마 행정부에 비판적인 문제들 중 하나가 국무부 대북 제재 조정관들의 활동이다. 첫번째 대북 제재 조정관으로 활동했던 필립 골드버그가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북한은 매우 긴장했다. 당시 중국은 대북 제재 논의에 적극적이었다. 골드버그가 새로운 직책(미 국무부 정보조사국 담당 차관보)으로 이동하자 대북 제재 조정관이란 직책은 일 년 이상 잊혀진 자리가 됐다. 그리고 로버트 아인혼 대북 제재 조정관이 그 자리에 임명됐다. 개인적으로 아인혼이 더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하고, 베이징을 더 자주 방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베이징을 더 닦달하지 않으면 중국은 1874호 이행에 소극적이 될 것이다. 그런 사실을 북한은 잘 알고 있다. 결론은 오바마 행정부가 대북 제재 이행 과정에서 두 눈을 부릅떠야 한다는 점이다.”


―당신은 과거 여러 차례 ‘6자회담은 죽었다’고 말해왔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나.

“그렇다. 6자회담은 북한 비핵화라는 원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됐다. 대북 제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데다 북한 내에서 후계체제 구축 작업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은 핵 포기 대가를 바라기보다는 오히려 핵 포기의 두려움이 크다. 북한이 핵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북한이 최근 6자회담 복귀 의사를 밝히고 있는 것은 중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일 뿐이다. 중국은 중국대로 북한을 6자회담 틀 내로 끌어들임으로써 동북아 긴장 수위를 높이는 북한의 도발 행동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설사 6자회담이 재개된다 해도 북한 비핵화라는 당초 목적은 달성하기 힘들다.”


―중동 지역에서 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북한을 11차례 방문한 전문가로서, 북한에서도 그런 시위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보나.

“북한 정권은 권력이 잘 통제되고 있는 정권이다. 중동 국가에서 목도되는 민주화 시위 가능성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그와 비슷한 상황을 굳이 상정한다면, 김정일이 갑작스럽게 죽고 권력 공백 사태가 초래됐을 때다. 김정은은 아직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지 않다. 김정일이 갑자기 죽는다면 북한 주민들의 불만이 일부 권력 공백 지역을 중심으로 분출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중동 민주화 시위 같은 규모의 봉기는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프리처드와 필자




―얼마 전 국내에서는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북핵에 맞서 한국도 전술 핵무기를 재배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될 것이다. 왜 그런 주장이 나왔는지는 이해가 가지만,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상원 청문회에서 커트 캠벨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현재의 한·미 관계를 최상으로 평가했다. 동의하나.

“그동안 한반도 현안을 다루면서 미국의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한국의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 관계를 지켜봤다. 한·미 관계는 양국 대통령들의 성향과 이념 성향에 따라 부침이 있었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한·미 관계야말로 당장의 이해 관계를 넘어서야 하는 동맹이라는 점이다. 전 세계적 안보, 경제 현안들과 긴밀하게 얽혀 있는 복합 동맹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사이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이 전례없는 우의를 과시하고 있다. 정상들 사이의 관계는 실무 차원의 관계를 보다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개인적 경험에 비춰봤을 때, 한·미 정상의 관계가 지금처럼 좋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미국의 한국, 한국인에 대한 인식은 어떤지 궁금하다. 미국 내 한국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KEI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

“미국 내 한국 인식은 좋은 쪽으로 변화해왔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미국인들은 사실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한국은 미국 대중들에게 조그만 지역 국가에서 세계적 존재감을 키워온 나라로 이미지를 개선시켰다. 2008년 금융위기가 발발했을 때, 나는 TV에서 현대차 광고를 보고 무릎을 친 일이 있다. 현대차를 사면 당신이 실직했을 때 할부금 납부 문제를 도와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금융위기로 고통받는 일반 미국인들의 정서를 정확히 읽고 그들과 눈높이를 맞춘 광고였다. 현대차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고 미국인들의 한국 인식이 좋아졌음은 물론이다. 이런 관점에서 KEI는 미국의 미래 세대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고양시키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지역사회를 방문, 미국인들과 대화하고 간행물을 미 전역의 대학에 배포하는 등 한·미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하고 있다.”


―KEI 소장에 취임한 지 5년이 됐다. 언제 보람을 느꼈나. 아쉬움은 없었나.

“아쉬움은 없다.(웃음) KEI 소장에 취임한 직후 한·미 양국 대사가 함께 미국 도시들을 돌며 양국 현안을 미국의 대중들에게 설명하는 행사를 보고 매우 큰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전·현직 주한 미 대사와 주미 한국 대사들의 경험을 책으로 엮어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들이 펴낸 비망록은 한·미 관계의 궤적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유산’이 됐다. 이 비망록은 앞으로도 양국 대사들의 경험을 추가해 증보판을 만들어낼 계획이다. 4년 전부터 재미 한국인들의 날을 KEI 차원에서 기념하고 있는데 재미 한국인들의 놀라운 성취가 너무 자랑스럽다.”

대담=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 잭 프리처드 약력(50년생)

▲하와이대 국제관계학 석사 ▲주일 미군 정보장교, 대령 예편 ▲빌 클린턴 행정부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 담당 선임 보좌관, 4자(한국, 미국, 북한, 중국)회담 미국 부대표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대북 특사 ▲브루킹스 연구소 선임 연구원 ▲한미경제연구소(KEI) 소장 ▲진 프리처드와 2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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