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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이 발발한 지 60년이 흘렀다. 그 사이 우리나라는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루고 민주주의를 꽃피웠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한강의 기적을 일궈내, 이제 국제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산업화와 함께 민주화에서도 상당한 진전을 이뤄 선진 민주사회로 발돋움하고 있다. 그러나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일단락된 6·25전쟁은 여전히 많은 사람의 가슴에 응어리져 남아 있다. ‘민족 분단’의 비극으로 신음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남북 대치는 계속되고, 이산가족·국군포로·평화협정 등은 여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세계일보는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전쟁의 아픔과 남은 과제에 대해 3부로 나눠 살펴본다.
한국전쟁 최대 격전지 중 하나인 ‘펀치볼 전투’의 용장에게 한국전은 현재진행형이었다. 그가 성공적인 인생을 설계할 수 있게 한 주요 자양분이었다. 미국 굴지의 로펌인 스텝토 & 존슨의 회장을 역임한 존 놀런(83) 변호사 얘기다. 워싱턴 DC 듀폰 서클 인근에 위치한 스텝토 & 존슨 로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올해로 60주년을 맞은 한국전쟁의 의미를 물었다. 그는 참전 경험을 토대로 ‘펀치볼을 향한 진군(The Run―up to the PUNCH BOWL·사진)’을 저술했다. -
―한국전쟁은 어떻게 참전하게 됐나.
제1해병사단 소속 보병 소총 소대장으로 난생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전쟁 발발 2년째인 1951년 4월이었다. 부산에 상륙한 우리는 계속 북쪽으로 진격했으나 그해 7월부터 동해안 인접 지역(강원도)에서 한국전쟁 최대 격전 중 하나인 펀치볼 전투가 전개됐다. 그때부터 전선은 교착됐고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의 대치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그해 12월 미국으로 돌아온 후 지금까지 한국은 다시 찾지 못했다.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을 다시 만났다. 그들의 용맹은 공포를 자아낼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한국전쟁은 어떤 의미가 있나.
한국전쟁 참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특히 펀치볼 전투는 엄청난 사상자 숫자가 말해주듯, 매우 위험한 전투였다. 내가 속했던 제1해병사단에서만 51년 8월 한 달 동안 2500여명이 전사했다. 한 달 전사자로는 50년 12월 장진호 전투와 51년 6월 중공군 반격 전투에 이어 가장 많은 숫자였다.
이 같은 전투에선 간발의 차이로 생사가 갈린다. 정찰 중에 바로 내 앞에 있던 동료 병사가 죽은 적도 있다. 그와 나의 위치가 바뀌었더라면 나는 죽고 그가 전쟁 체험기를 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웅이 되거나 희생자가 되는 일도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러한 경험들을 겪게 되면 인간은 겸허해진다. 군복을 벗고 선택한 법률 공부도 매우 도전적인 일이었다. 힘들거나 좌절감이 몰려올 때 한국전쟁 당시의 경험을 떠올렸다. 그러면 지금 겪고 있는 어떤 곤란과 어려움도 그리 큰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펀치볼 전투에 대해서 말해 달라.
펀치볼은 삼팔선 북쪽으로 20마일 정도 부근에 위치한 화산 분화구 지역으로서 험준한 능선으로 둘러싸여 이 능선을 장악하는 쪽이 전술적으로 매우 유리했다. 어느 쪽도 양보할 수 없는 요충이었다.
미국 제7해병대와 한국 해병대가 북한군과 고지 점령과 탈환을 반복하며 혈전을 치르는 동안 우리는 후방에서 대기하다가 8월 초 7해병대를 지원하기 위해 펀치볼로 이동했다.
7해병대는 749고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대포와 박격포를 동원해 맹폭을 가했다. 그 후 며칠 동안 잠도 자지 못했고 먹을 수도 없었다. 고지 탈환을 위해 한 차례씩 공격을 감행할 때마다 전사자가 속출했다.
북한군의 수류탄에 몸을 던져 동료를 살리고 전사한 전우 에드워드 고메즈를 잊을 수 없다. 그는 죽어서 영웅이 됐고, 생전의 소원대로 명예훈장을 받았다. 다음 날 먼동이 트기 전까지 그가 속했던 해병1사단 2대대원 중 16명이 함께 전사했고 109명이 부상했다. -
◇한국전쟁에 미 해병대 소위로 참전했던 존 놀런 변호사가 미 워싱턴 DC에 위치한 자신의 로펌 사무실에서 참전 경험과 소회를 밝히고 있다.
―군인에게 전쟁 체험은 어떤 느낌인가.
한국전쟁 이후 전쟁과 관련된 책들을 읽어보기도 하고 베트남전쟁 지역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전혀 전쟁 체험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나의 전쟁 체험을 기록으로 남기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전쟁 중의 군인은 우주로부터 온전히 고립된 채 자기 자신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 자체가 다르다. 순간을 살아가고 전투지역에만 고도로 집중하게 된다. 인간관계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전투가 한창이던 51년 여름, 미국에 있는 친구로부터 한국전쟁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담긴 편지를 받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의 질문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다소 웃기는 질문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는 군인에게 그의 질문은 다른 행성에서 전달된 메시지와 같았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과 북한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다. 남북한을 어떻게 평가하나.
1950년대엔 남북한 모두 논과 밭뿐이었다. 이후 한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전시키며 동아시아의 등대와도 같은 존재가 됐다. 하지만 북한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다. 김정일 북한 정권은 주민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북한은 실패한 국가다.
한국전쟁은 미국 독립전쟁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미국이 독립전쟁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세웠듯이, 한국전쟁도 어떤 측면에서는 한국이 새로운 나라로 거듭나는 발판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글·사진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존 놀런 변호사가 한국전쟁 당시 미 해병대 소위로 참전했던 '펀지볼 전투'는 현재의 휴전선을 결정한 한국전쟁 최대 격전 중 하나이다.
강원도 동부전선 최전방에 위치했던 펀치볼 전투 지역은 화산 폭발에 따른 분지 지형으로서 가칠봉과 도솔산, 대암산 등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1951년 여름에서 가을 사이 40여일 동안 주인이 6번이나 바뀌는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됐다.
펀치볼마을의 전경. 펀치볼마을의 지명은 6·25전쟁당시 외국의 종군기자가 가칠봉에서 내려다본 노을진 분지가 칵테일 유리잔 속의 술빛과 같고, 해안분지의 형상이 화채그릇(Punch Bowl)처럼 생겼다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
51년 봄 한국전에 투입됐던 놀런 변호사는 펀치볼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치러낸 펀치볼 전투의 산 증인이다. 그는 이 전투를 마친 뒤 본국으로 귀대했다.
그로부터 50여년이 흐른 2006년, 놀런 변호사는 당시의 전투 경험을 ‘펀치볼을 향한 진군’이란 회고록에 담아냈다. 그는 집필 동기와 관련해 “펀치볼 전투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라면서 “세월이 흐른 뒤 당시 전투를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본국의 가족들에게 정기적으로 보낸 편지 등을 토대로 펀치볼 전투를 일기체로 풀어냈다. 북한군에 대해서는 “중국군이 북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죽을 때까지 진지를 고수하는 역할을 맡은 북한군들은 훈련은 덜 됐지만 전투에는 치열했다”면서 “이탈 병사를 총살하는 북한군 정치위원들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적었다.
그가 소개한 미 해병대원들의 군기와 전우애는 수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이름도 생소한 ‘코리아’에서 어떤 심정으로 전투에 임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해병대원을 다른 젊은이들과 구별 짓게 하는 요인은 바로 규율과 자신보다 남을 앞세우는 해병대 전통”이라면서 병사들이 먼저 치료받을 수 있도록 뒷줄에서 기다리다 전사한 장교의 사례를 소개했다.
또 하나는 ‘그 어떤 해병도 뒤에 남기지 않는다’는 전통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부상자는 물론이고 전사자까지도 끝까지 챙기는 전통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에 임하는 해병 정신을 만들어냈다고 놀런 변호사는 썼다.
그는 “내가 소속된 베이커 중대는 탁월한 리더십 덕분에 최소의 희생으로 임무를 완수하곤 했다”면서 “다른 중대에서는 후방 배치를 원하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베이커 중대에선 아무도 떠나려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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