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들에게 9·11 테러는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다. 9·11 테러는 초강대국 미국호의 항로와 미국인들의 삶을 변화시켰으며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에선 9·11 테러 10주년을 맞아 ‘9·11 이후 10년’에 대한 각 분야의 평가 작업이 한창이다. 향후 미국의 세계 전략과 국내 정책은 이런 평가 작업을 토대로 재조정될 것이다. 세계일보는 미국의 안보 분야 싱크탱크인 헨리 L 스팀슨 연구소의 링컨 블룸필드 회장에게 ‘9·11 이후 10년’을 물었다. 블룸필드 회장은 2001년 9·11 테러 당시 미 국무부 정치·군사 담당 차관보로 재직했다.







-9·11테러 이후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지난 10년의 세월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남겼는가.

“21세기의 안보 위협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며 국제적 위험이 미국의 본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미국의 안보는 다른 지역의 안보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미국은 21세기의 위협을 국제적 차원에서 대처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됐다.”

―미국인들은 9·11 테러의 충격에서 회복됐다고 보는가.

“9·11의 상흔은 아직 아물지 않았다. 특히 테러 희생자 유족들과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에서 숨진 병사들의 유족들은 여전히 상실감에 빠져 있다. 하지만 미국 사회와 정부는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에 맞서 놀라운 회복력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 9·11과 같은 충격과 놀라움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9·11를 겪었고 9·11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미국은 슬픔을 딛고 더 현명해졌다.”

―9·11이 낳은 ‘테러와의 전쟁’은 지난 10년 동안 어떻게 변화했는가.

“대테러 전쟁은 미국을 공격한 테러리스트들을 반격하는 군사 작전의 형태로 시작됐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전개된 대테러 전쟁이 그것이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은 아랍 정부·시민 사회와 손잡고 무슬림 젊은이들의 분노를 완화시키는 노력에 초점을 맞추게 됐다. 무슬림 젊은이들의 분노는 테러리즘에 양분을 제공한 테러리즘의 뿌리이다. 우리는 그동안 아랍권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외교와 개발 지원, 미디어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무슬림 세계에서 테러리즘의 구심력은 현격히 약화됐다.”

―미국은 2001년 당시 보다 더 안전해졌는가.

“그렇다. 미국은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테러 대비 태세에서 이전보다 더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했다. 미 정부는 9·11 이후 국토안보부를 창설하고 정보 기관들을 재편, 대테러 역량을 강화했다. 이에 따라 9·11과 같은 테러가 미 본토에서 성공하기는 이전보다 훨씬 더 힘들어졌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9·11 이후 국가정보국(DNI)을 신설, 미 중앙정보국(CIA) 등 16개 정보 기관을 총괄하도록 했다. 이런 정보 기관 재편이 제2의 9·11 테러를 막는 데 기여했다고 보나.

“정보 기관 개편은 원래 부시 행정부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부시 행정부는 9·11 테러 조사위원회와 미 의회의 권고에 따라 정보 기관 개편을 실행에 옮겼다. 정보 기관 개편과 관련해선 일각에서 집행 기관 없이 총괄 기능만 갖고 있는 DNI를 창설한 것은 현명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내놓고 있다. 합당한 비판이라고 본다. 하지만 정보 기관 개편 과정의 일부 하자에도 현재 미 정보기관들의 업무 수행은 매우 전문적이고 효율적이다.”

―알 카에다 수장으로 9·11 테러를 자행한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됐다. 머리를 잃은 알 카에다의 미래는 어떻게 전망하나.

“빈 라덴이 알 카에다의 정신적 리더였고 그의 수족들이 9·11 테러를 계획했지만 알 카에다는 지금까지 일사불란하게 통제되는 조직이 아니었다.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빈 라덴의 후계자로 부상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제한적이다. 예멘과 소말리아 등지에 근거지를 둔 아라비아 반도의 알 카에다 그룹들은 알 카에다 지도부의 통제권 밖에 있다.”

-올 초부터 불기 시작한 아랍의 민주화 바람이 테러와의 전쟁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나. ‘아랍의 봄’이 아랍권의 반미, 반서방 경향을 심화시킬 가능성은 없는가.

“아랍의 봄은 수 많은 아랍 젊은이들을 좌절시키고, 끝내 테러리즘으로 내몬 상황에 대한 합당한 응답으로 볼 수 있다. 이제 아랍의 젊은이들은 테러리스트들이 보내는 부정적인 메시지에 현혹되지 않게 됐다. 테러리스트들의 메시지는 ‘지하드’(성전·聖戰)라는 미명 하에 죽음을 부추기는 어둠의 메시지였다. 테러 구실로 악용됐던 독재 정권이 무너진 이후, 새로운 메시지가 젊은이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좋은 정부와 열린 정치 참여, 인권 보장에 대한 열망을 담은 메시지들이다. 새로운 세대를 향한 미국의 영향력은 긍정적이다. 관건은 미국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아랍 국가들의 (민주국가로의) 전환에 기여할 수 있는지 여부다.”

―9·11 이후 부시 행정부 내에서는 ‘네오콘’(신보수주의)으로 불린 강경파들이 득세했다. 9·11은 미국의 대북정책을 더 강경하게 만들었다고 보는가.

“미국은 지난 10년 동안 9·11 테러가 야기한 혹독한 위협들을 견뎌내면서 북한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억지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웠다.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보를 위협하는 북한의 도발은 9·11 이후 강건해진 미국의 억지력에 의해 봉쇄될 것이다. 미국은 또한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동맹국과의 안보 협력 체제를 공고하게 만들었다. 아프가니스탄과 리비아에서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공조한 것이 그 대표적 사례다. 9·11 테러 초기엔 미국의 관심이 온통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대테러 전쟁과 국내 방위에 집중되는 바람에 북한에 대한 관심이 다소 약화되기도 했다.”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국방예산을 감축하고 있다. 국방예산 감축이 대테러 전략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나.

“부시 행정부와 의회는 9·11 테러 직후 추가 테러를 막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강구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초과 지출되거나 낭비된 예산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국방부는 예산 절감 압력 속에서 대테러 조치의 우선순위를 조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더 이상 안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각적인 조치를 병행하는 사치를 부릴 수 없게 됐다. 고위 정책 결정자들의 판단이 이전보다 더 중요해졌다.”

―9·11이 미국 재정건전성을 악화시킨 주 요인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런 견해에 동의하는가.

“미국의 재정적자를 초래한 요인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9·11 이후 대응 조치들이 재정적자를 불린 주범이라는 견해엔 동의하지 않는다. 미국 기업들은 많은 일자리를 해외로 아웃소싱했고 의회 역시 이익 집단의 요구에 영합, 세입보다 세출이 더 큰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9·11은 미국에 입국하는 외국인들이나 미국인들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 공항에 설치된 ‘전신 스캐너’(알몸 투시기)처럼 일부 대테러 조치들은 인권 침해 논란을 낳기도 했다.

“교육이나 사업, 관광 목적으로 미국에 입국하는 사람들은 9·11 이후 큰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특별한 대테러 조치에 따라 정부가 민간인의 활동을 감시하거나 특정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는 사생활 침해 우려를 낳고 있다. 이러한 안전 조치들은 미국인들의 삶을 과도하게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집행될 수 있다고 본다. 시민들도 안전 문제를 전적으로 정부에만 의존해선 안 된다. 시민 모두가 테러를 감시하는 자경단이 되어야 한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헨리 L 스팀슨 연구소 링컨 블룸필드 회장

하버드 대학, 프레처 스쿨 법학·국제관계학 석사. 1988년 미 국무부 국제안보분야 수석 부차관보. 1991년 댄 퀘일 미 부통령 안보분야 보좌관(부차관보). 1992년 국무부 극동 담당 부차관보. 2001년 국무부 정치·군사 담당 차관보. 2008년 부시 대통령 특사. 2010년 스팀슨 연구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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