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버지니아주 의회 역사상 첫 아시아계 의원인 한국계 마크 김(45·민주) 하원의원이 다음달 8일이면 재선된다. 선거는 아직 치러지지 않았지만 공화당이 후보를 내지 않아 사실상 당선이 확정된 상태다. 한국에서 태어난 김 의원은 미국에 정착한 이후 소수계의 한계를 극복하고 미 주류사회가 인정하는 차세대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재미 한국 동포사회의 기대주인 김 의원을 만나 의정생활과 정치관, 인생역정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대담은 지난 10일 미 국경일인 ‘콜럼버스 데이’에 워싱턴 DC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2009년 선거 당일 김 의원 캠프에서 개표 결과를 지켜본 기억이 난다. 벌써 2년이 흘렀다. 미국 정치에 뛰어든 이후 소회를 말해 달라.

“보람있었고 많이 배웠다. 미국은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교과서에 나와 있는 그대로 실현되는 국가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영어로 말하면 ‘룰 오브 피플’(rule of people·인치)이 아니고 ‘룰 오브 로’(rule of law·법치)의 나라다. 버지니아주 의회도 400년 전에 시작했을 때와 똑같이 돌아가고 있었다.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배웠던 원칙이 현장에서 똑같이 실현되고 있었다.”

―한국 정치와는 어떤 점에서 다른가.

“한국 정치에선 원칙 따로 현실 따로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의회 운영과정에서 이른바 ‘실세’들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다는 보도를 많이 봤다. 여기는 안 그렇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라고 해도 소속 정당인 민주당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미 전역에서 주별로, 카운티별로 민주당이 별도로 조직돼 있기 때문에 아무리 카리스마가 뛰어나고 잘난 지도자가 있어도 혼자 힘으로는 당을 움직일 수 없다.”

―미 국민들의 자발적인 정치 참여가 그런 토양을 만든 것 아닌가.

“그렇다. 그게 미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런 국민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민주주의가 성공한 것이다.”

―미국 내에서도 한인들의 정치 참여는 활발하지 않다. 김 의원이 주 의회에 진출한 이후 한인들의 정치 참여율은 높아졌나.

“내 선거 때는 나를 보고 한국계 유권자들이 투표장을 많이 찾았다. 하지만 지난해 중간선거 때는 그렇지 않았다. 한인 동포들의 수도 늘고 경제력도 커지면서 한인들의 정치적 영향력도 조금씩 커지는 것은 확실하다. 나를 비롯해 한인 정치인 수도 늘고 있다. 하지만 한인사회가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는데 그만큼은 못하고 있다고 본다.”

 

 

 


―버지니아주 의회는 전통적으로 보수적이어서 공화당이 강세인 것으로 알고 있다.

“맞다. 주 의회 100명 중 공화당이 61명으로 다수당이다. 이번 선거가 끝나면 민주당 의석은 더 줄어들 전망이다. 야당으로 의정활동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렇다면 야당 의원으로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나.

“공화당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한국 정치 현실에선 상대당의 지원을 받는 것이 쉽지 않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민주당, 공화당 따지면 법안 통과는 불가능하다. 나는 민주당 소속 의원이지만 민주당을 대표해서 일하는 것은 아니다. 내 지역구민을 위해 일한다. 교통과 교육, 세금 등 모든 현안에서 지역구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지역구민을 위해 좋은 일이라면 공화당 의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한다.”

―주 의회도 연방 의회처럼 다수당이 모든 상임위를 독식하는 구조인가.

“연방 의회보다 다수당 지위가 더욱 강력하다. 연방 의회는 여야 관계없이 민주, 공화당을 분리해서 지도부를 구성하나 주 의회는 모든 상임위의장을 다수당이 독식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수당 소속의 상·하원 의장이 여야 구분 없이 지도부를 구성한다. 나는 소수당 소속 초선의원이어서 의회 내 영향력이 전무한 상황에서 의정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와 함께 들어온 초선 21명 중에서 공화당이 밀어주는 기대주 두세 명을 빼곤 내가 가장 많은 법안을 통과시켰다.”

―소수당 초선의원으로서의 한계는 어떻게 극복했나.

“초당적 입장에서 지역구민을 위해 필요한 현안을 찾아 열심히 일했다. 지역구민들이 그런 나의 활동을 평가해 줬다. 기업계나 노조의 주장도 똑같이 경청하면서 일했다. 이번에 도전자가 없는 이유도 나에 대한 평판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통상 여당은 선거구를 획정하면서 야당을 짓눌러서 힘들게 하는데, 이번엔 공화당이 선거구를 획정하면서 나에게 도전장을 던진 자기 당 후보를 다른 지역구로 보냈다. ‘마크는 이길 수 없다’고 보고 공화당 후보는 다른 지역으로 돌렸다고 하더라. 그리고 내게 차기 의회에서도 공화당과 함께 지역구민을 위해 손잡고 일하자고 말했다.”

―초당적 의정활동이 의회 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얘기로 들린다. 한국에선 그런 식으로 의정활동하면 당 지도부에 찍혀 불이익을 당하기 십상이다.

“당이 운영되는 시스템이 달라서 그럴 것이다. 한국은 당을 중심으로 의원이 충원되는 구조이나 미국은 지역구민이 대표를 뽑아서 의회로 보내는 시스템이다. 당은 선거를 하기 위해 필요할 뿐 의회를 운영하는 과정에선 필요하지 않다. 물론 미국에서도 일부 의원은 당에 충성한다. 그렇지만 지역구에는 민주당원도 있고 공화당원도 있다. 당에 충성하는 행태는 지역구민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지역구에 있는 민주, 공화당원 모두를 대표하려 노력한다.”

 



―보수적 정치운동인 ‘티 파티’나 최근 확산되고 있는 ‘월가 점령’ 시위를 어떻게 보나.

“미국은 중도의 나라다. 태생적으로 좌 편향이나 우 편향을 싫어한다. 그런데 정치에는 보수든 진보든 익스트림(극단적임)이 항상 존재한다. 익스트림이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미국민 중 60, 70%인 중도파의 목소리는 실종되고 사방에서 익스트림의 목소리만 난무하니깐 중도파들이 좌절한다. 그런 좌절감이 월가의 탐욕이나 연방정부, 의회의 답답한 행태를 바라보며 티 파티나 월가 시위로 표출된 것으로 본다.”

―미국 한국인 사회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김 의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고 한인사회에 더 잘하고 싶은데 나의 지역구에는 한인이 많지 않다. 한인사회를 위해 더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주류사회에서 인정받고 더 성장해야 한다.”

―김 의원의 이력을 보니 한국과 베트남, 호주를 거쳐 미국에 정착했다. 인생역정이 참 다채롭다.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4살 때 베트남으로 갔다가 월남이 패망하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이공 함락 3일 전에 가까스로 비행기를 탔다. 아버지는 탈출에 실패해서 1년 동안 호찌민 정부에 억류됐다가 풀려났다. 어려서 한국을 떠난 탓에 한국어를 못해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생환한 뒤 호주를 거쳐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80년 12월에 미국 땅을 밟았다.”

―어떤 계기로 정치에 입문하게 됐나.

“솔직히 학교 다니면서 동양인들이 잘하는 수학, 과학에는 관심이 없었다.(웃음) 정치나 정책, 역사 공부가 좋았다. 대학 때 미 연방 의회에서 인턴십을 하면서 워싱턴 DC가 세계를 움직이는 중심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88년 민주당 대선후보로 지명된 마이클 듀카키스 캠페인을 지원하면서 아시아계 인사들이 보이지 않는 데 놀랐다. 미 주류사회를 움직이는 과정에서 한국인은 고사하고 아시아계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정치 쪽에서 아시아계를 대표해 활동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오바마 대통령 당선 직후 언론에서 김 의원을 ‘오바마 사람’으로 분류한 기사를 봤다.

“딕 더빈 연방 상원의원 보좌관으로 일할 때 당시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이던 오바마를 처음 만났다. 이후 오바마 대통령과 줄곧 함께했다. 그 인연으로 2008년 대선 때 오바마 후보를 위해 일했다.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세가 워낙 강해서 다들 나의 정치경력이 끝났다고 말했지만 결과는 오바마의 승리였다.”

대담=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프로필

▲서울 출생(66년생) ▲베트남·호주 거쳐 1980년 미국 정착 ▲캘리포니아대, 해스팅 칼리지 로스쿨 ▲ 미 연방통신위(FCC) 변호사
▲미 중소기업청 변호사 ▲딕 더빈 연방 상원의원 보좌관 ▲2009년 버지니아주 의회 하원의원 선거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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