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과 한국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피로 맺어진 단단한 연대가 두 나라 사이에 있습니다.”

크리스티안 헤수스 주한 필리핀 대사대리는 지난달 28일 화상으로 가진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헤수스 대사 대리는 특히 ‘동맹(alliance)’, ‘형제’라는 표현으로 긴밀한 양국 관계를 강조했다.

양국의 외교관계 수립은 올해로 72주년을 맞는다. 군사적 연대관계를 의미하는 동맹은 아니다. 헤수스 대사대리가 동맹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만큼 두 나라의 관계가 가깝고 깊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필리핀은 태국과 함께 6·25전쟁에 참전해 한국을 지원한 나라다.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10개국 중 2개국이 당시 한국을 지원했다. 필리핀은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지상군을 파병한 나라이기도 하다.

헤수스 대사대리는 “필리핀은 아세안 중심국이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정중앙에 있는 나라”라고 강조했다. 헤수스 대사대리의 말처럼 필리핀은 아태지역 정중앙에 자리해 오랫동안 미국의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해왔다. 그러면서도 최근엔 중국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그는 미·중 갈등에 대한 질문엔 답하지 않았다.

한국과 필리핀은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헤수스 대사대리는 FTA 협상이 마무리되면 더 많은 한국 기업들이 필리핀에 투자하고, 양국 사이의 무역이 늘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한국에 원하는 것은 공적개발원조(ODA) 기여다. 그는 “역대 한국의 대필리핀 ODA 사업 중 두 번째 규모였던 팡길만(Panguil Bay) 교량 건설 사업이 다리 양쪽을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2시간30분에서 단 7분으로 단축시켜놨다”며 이 같은 기여가 늘어나길 기대했다.

―한국과 필리핀 관계의 잠재성에 대해 설명해달라.

“한국과 필리핀의 관계는 매우 견고하고 또 역동적이다. 우리는 가까운 동맹일 뿐 아니라 형제다. 필리핀과 한국은 역사를 공유하며, 피로 맺어진 단단한 연대를 갖고 있다. 오는 3월 두 나라는 양자관계 수립 72주년을 맞는다. 양국 관계는 서로의 경제성장과 번영에 크게 기여했다.”

 

―‘피로 맺어진 연대’는 6·25전쟁 참전을 의미하나.

“필리핀은 6·25전쟁에 가장 먼저 참전한 나라들 중 하나로, 아세안에서는 태국과 필리핀 두 나라만 참전했다. 참전은 필리핀의 한국에 대한 우정과 희생의 상징이다. 또 현재 한·필리핀 양자관계에 가장 강력한 주춧돌이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필리핀 참전용사 7420명의 용맹을 우리는 잊지 않을 것이다. 한국 정부도 필리핀 참전용사들 지원에 적극적이다. 한국정부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국면에서 참전용사들에게 마스크, 진단키트 등을 보내줬다. 부임한 뒤 노년의 한국인들을 만나면 필리핀이 전쟁에서 도와줬다는 얘기를 먼저 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필리핀이 한국과의 관계에서 바라는 것은.

“경제적 협력관계를 심화하는 것이다. 필리핀과 한국의 경제협력은 금융, 농수산 식품업, 관광, 석유화학, 선적, 철강 산업 등 광범위하게 발전해왔다. 특히 한국은 코로나19 전까지 필리핀에 가장 관광객을 많이 보내는 나라 중 하나였다. 보라카이에 갔다가 한국어만 가득한 거리를 보고 ‘내가 한국에 있나’ 하고 헷갈렸던 경험이 있다(웃음).”

―특별히 한국에 더 원하는 경제협력이 있다면.

“한국이 필리핀의 경제 개발에서 ODA를 통해 상당한 기여를 해주기를 기대한다. 한국의 ODA는 필리핀의 관개수로, 발전, 도로, 공항 등 주요 인프라 건설을 위한 주요 프로젝트에 투입됐다. 필리핀 팡길만에 건설된 교량이 대표적이다. 팡길만과 탄굽시를 연결하는 다리는 두 지역을 오가는 데 2시간30분이 걸리던 것을 7분으로 단축시켰다. 또 지난해 한국정부는 필리핀 정부가 코로나19에 맞서는 데 아주 긴요했던 인도적 지원을 해주기도 했다.”

―양국 사이에 FTA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2019년 11월 한·아세안 정상회의 중에 필리핀 정부와 한국 정부가 FTA 협상 공동성명에 서명하면서 협상이 시작됐다. 당시 2020년 상반기까지 협상을 마무리짓기로 했는데, 아직은 협상 진행 중이다. 협상이 마무리되면 양국 간 무역과 투자에 큰 진전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필리핀은 연구개발(R&D), 기술 혁신 분야에서 한국과의 더 큰 협력을 기대한다.”

―필리핀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대체로 어떻게 일하고 있나.

“1990년대 초부터 많은 중소기업들이 필리핀 시장에 투자를 해왔고, 지금도 매우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1990년대 필리핀에 진출한 대덕전자가 대표적이다. 또 필리핀에서 자신의 사업을 시작한 한국인들도 많다. 필리핀은 현재 제조업 부활기를 맞고 있고, 이를 확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특히 자동차, 항공우주산업, 전자산업에 새로운 기회가 열려있다. 중장기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도 수주 중이다. 우수한 기술력과 자본을 가진 한국 기업들이 이 기회를 잘 활용해주길 바란다.”

―필리핀이 갖고 있는 투자처로서의 매력은 뭔가.

“필리핀은 급속성장 중인 1억명 규모의 시장을 갖고 있다. 또 평균 연령이 젊다. 중위연령(총인구를 연령순으로 나열할 때 정중앙에 있는 사람의 연령)이 23세에 불과하다. 또 풍부한 해양자원과 자연환경을 갖고 있다. 특히 지리적 위치가 좋다. 아태지역의 정중앙에 있는 장점은 크다.”

―한국 정부가 아세안에 관심이 많은데.

“한국정부에 감사한다. 지난해 말 발표된 신남방정책 플러스가 그간의 신남방정책의 성과를 이어나가고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지금이 특히 아세안과 한국의 관계가 긴밀해야 할 때다. 코로나19 위기가 길어지면서 국가들의 경제적 피해가 크다. 또 인적 교류도 급감했다. 기업인과 필수인력에 대한 여행 제한 완화를 통해 이 같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필수적 교류 지속은 위기 속에서 최소한의 경제성장 동력을 살리기 위해 긴요하다.”

―한국과 필리핀 간 공통 가치로 무엇을 꼽겠나.

“깊은 애국심,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깊은 연대를 꼽고 싶다. 필리핀에 ‘바야니한(Bayanihan)’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목표를 위해 함께 뭉친다는 뜻이다. 한국과 필리핀과의 관계가 특히 바야니한으로 설명된다. 필리핀이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뿐만 아니라, 지난 2013년 태풍 하이옌으로 필리핀이 큰 피해를 본 뒤엔 한국의 아라우부대가 재건지원을 위해 파견됐다.”

―한국에 있는 필리핀인들은 잘 지내나.

“약 5만명의 필리핀인들이 한국에 살고 있다. 대부분 고용허가제(EPS)로 일하거나, 한국인들과 결혼한 이주민들이다. EPS 시스템이 정착된 이래로 필리핀 노동자들의 근로여건이 많이 개선됐다. 결혼이주의 경우에도 한국정부가 이주민 지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점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다만 가족들 사이에선 다문화 이해가 더 정착돼야 한다. 또 이주민 자녀들의 경우 사회와 학교의 다문화 교육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차별 문제를 겪고 있다. 한국사회의 인구 구성이 다양해지는 만큼 다문화 환경 이해에 더 익숙해지길 바란다.”

―필리핀인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

“한류의 영향을 체감한다. 한국 음악, 드라마, 패션, 음식에 대한 관심이 최근 몇 년 최고조였다.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 때문에 필리핀인들이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에 더 친근하게 느끼는 것 같다. 젊은 세대 중엔 한국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다. 나도 BTS(방탄소년단) 팬이다.”

 

홍주형 기자 jhh@segye.com

 

크리스티안 헤수스 주한 필리핀 대사대리는… ●1969년 필리핀 출생 ●필리핀대학교 정치학 졸업 ●아테네오 데 마닐라대학 법학박사(JD) ●주홍콩 필리핀 부총영사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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