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 단체 급증= 235년 전인 1775년 4월19일, 자유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온 식민지인들은 민병대를 구성, 매사추세츠 주 렉싱턴에서 처음으로 영국에 맞서 총을 들었다. 그날 이후 4월19일은 반정부 민병대 운동가들의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민병대 운동에 동조한 티머시 맥베이가 1995년 폭탄이 적재된 트럭을 몰고 오클라호마 연방정부 청사로 돌진, 무려 168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날도 바로 이날이다.
미 정부와 국민들이 오클라호마 테러 사건 15주년을 추도했던 지난달 19일, 미국 워싱턴 DC에서는 총기 소유권을 보장한 ‘수정헌법 2조’ 옹호 대회가 열렸다. 카키색 위장복에 총기를 휴대한 수천명의 총기 소유 옹호론자들은 ‘내셔널 몰’의 워싱턴 기념탑 인근에 모여 연방정부의 총기 규제 움직임을 성토했다.
이날 대회는 주류 보수 진영에서도 기피하는 증오 단체 조직원들이 주도한 것으로 파악됐다. 그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이 애리조나주 보안관 출신으로 민병대 운동의 ‘대부’로 통하는 리처드 맥이다. 맥이 추종자들에게 보낸 “보안관이 주민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연방정부 공무원을 체포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하고 있다”는 영상 메시지는 증오 단체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이민에 반대하는 인종주의 성향의 증오단체는 히스패닉 이민자들의 증가가 미국 남서부를 재탈환하려는 멕시코 정부의 전략이라는 음모론을 믿고 있다.
최근 결성된 증오 단체 ‘오스 키퍼’는 개인의 자유를 말살하고 전체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연방정부로부터 미국 헌법을 지켜낸다는 강령을 신봉하고 있다. 일부 증오 단체는 9·11 테러를 미 연방정부의 자작극으로 믿고 있다.
미국 내 증오 단체 동향을 추적 중인 비영리 인권 단체 ‘서던 파버티 로 센터’는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증오 그룹이 2000년 602개에서 2009년 926개로 급증했다고 밝혔다. 민병대 조직을 갖춘 ‘애국주의 단체’는 2008년 149개에서 2009년 512개로 배 이상 늘었다. 빌 클린턴 정부 시절 미 전역에서 발호했던 증오 단체들이 오클라호마 테러 사건에 따른 여론의 냉대와 정부의 대대적인 단속, 보수적인 부시 행정부 출범 등의 요인으로 힘을 잃었다가 소생하고 있는 양상이다.
◆흑인 대통령 탄생이 기폭제= 서던 파버티 로 센터는 증오 단체 증가 배경과 관련해 “미국 내 소수 인종의 증가와 정부 부채 증가, 경제침체, 구제금융, 오바마 정부의 큰 정부 정책 등에 대한 분노가 증오 단체들의 태동에 기여하고 있다”면서 “특히 미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탄생은 증오 단체 증가의 기폭제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증오 단체들이 처음으로 미국의 관심사로 대두됐던 1990년대만 해도 이들의 공격 대상은 연방정부였다. 극우 민병대 조직인 ‘브랜치 다비디안’은 1993년 클린턴 정부의 총기 규제와 환경 규제 정책에 반감을 품고 대 정부 투쟁에 나섰다가 조직원 76명이 텍사스 와코에서 몰살됐다.
하지만 최근 생겨나는 증오 단체들은 연방정부와 함께 흑인과 히스패닉 이민자 등을 공격 대상으로 선정하는 인종 증오 양상을 띠고 있다.
증오 단체 전문가인 래리 켈러는 “보수 진영의 정치인이나 보수 언론도 증오 단체를 부추기고 있으며, 인터넷 등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도 증오 단체 확산의 요인이 되고 있다.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에는 민병대 캠프를 소개하는 영상 등이 공공연히 유포되면서 새로운 조직원을 유혹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 국토안보국은 지난해 펴낸 보고서에서 “지난 2년 동안 50개가 넘는 민병대 조직이 새로 태동했으며, 90년대 중반처럼 총기 규제를 우려한 총기와 탄약 사재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다. 서던 파버티 로 센터의 마크 포톡 정보담당국장은 “현 상황은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청사 테러 직전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면서 “제2의 오클라호마시티 테러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1995년 168명의 목숨을 앗아간 테러를 당한 미 오클라호마 연방정부 청사(왼쪽)와 지난 2월 소형항공기 충돌로 화염에 휩싸인 텍사스주 오스틴 연방 국세청 건물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증오 범죄 기승 =미 연방수사국(FBI)은 지난 3월 말 대 정부 무장투쟁을 기도한 혐의로 기독교계 민병대 ‘후타리’ 대원 9명을 체포했다. 미시간주를 근거지로 한 이들 민병대원은 자신들을 연방정부의 음모에 맞서 최후의 전쟁을 벌이는 기독교 전사로 믿고 연방정부의 하수인인 경찰을 무차별적으로 사살한 뒤 이를 계기로 미 전역의 민병대원들과 함께 무장 투쟁을 전개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앞서 3월 초에는 연방정부에 적대감을 품은 30대 남성이 미국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 입구에서 총격전을 벌이다 사살됐으며, 그 전달에는 정부에 반감을 지닌 50대 남성이 소형 항공기를 몰고 텍사스주 오스틴 소재 연방 국세청 건물로 돌진해 자폭한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해 6월에는 반유대주의자인 80대 남성이 워싱턴DC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 경비원을 사살했다. 같은 해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는 반유태인 증오 단체 조직원이 오바마 정부의 총기 몰수 정책을 중단시킨다는 명분으로 경찰관 3명을 살해했고,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는 인종주의 증오단체 조직원이 아프리카 이민자 2명을 살해했다.
오바마 정부 출범 직후에는 흑인 대통령 당선에 분노한 백인우월주의자가 방사능 물질을 이용해 ‘더러운 폭탄’(dirty bomb)을 제조하다가 체포됐다. 오바마 정부 출범 이후 태동된 ‘티 파티 운동’에도 증오 단체 조직원들이 일부 가담하고 있는 것으로 미 정부는 파악하고 있다.
미국 증오 단체 전문가들은 본지와의 이메일 인터뷰와 언론 기고 등을 통해 제2의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정부 청사 테러를 막기 위한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의 현명한 대응을 권고했다.
미국 내 증오 단체 역사를 다룬 저서 ‘공포의 집단’을 저술한 데이비드 버넷 시러큐스대 교수(역사학·사진)는 “2010년의 미국은 실업률이 10%에 육박, 수백만명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미국이 쇠락해가고 있는 두려움이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흑인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당 정부는 건강보험과 환경, 에너지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극우 과격파 그룹이 발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또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 일상화하면서 미국 내에서 무장 테러를 자행하려는 단체에 대한 미국민들의 인내심도 과거보다 약해졌다”고 밝혔다.
로버트 처칠 하트퍼드 대학 교수(역사학)는 “지난 3월 말 적발된 민병대 조직 ‘후타리’가 전형적인 증오 단체라면 정부가 증오 그룹에 대한 일망타진에 나서야 할 때이나 여기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서 “93년 텍사스 민병대 ‘브랜치 다비디안’ 조직원 집단 사망 사건에서 예시됐듯이 정부의 탄압책은 뜻하지 않는 비극을 낳을 수 있고, 이를 계기로 폭력과 보복이 반복되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는 만큼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1992년 백인우월주의자인 루디 리지 가족이 연방수사국(FBI) 요원에 의해 사살된 사건을 소재로 소설을 쓴 제스 월터는 “우파 극단주의자들의 부활은 경제적 고통과 정치인들의 선동적인 언사, 미 중산층의 가치가 훼손되고 있다는 절박감 등이 어우러진 결과”라면서 “정치인들은 자극적인 발언을 삼가하고 폭력적인 극단주의 그룹들과 거리를 둬야 한다”고 촉구했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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