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정착기(1) - 조남규(세계일보/조지타운대)
해외 연수를 온 단기 체류자가 미국에서 정착하는 것은 이민 온 사람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특히 신용도 없고 사회보장번호나 운전면허 같은 신원 증명문서를 마련하기 전에 전화 개설이나 자동차 구입 등 정착에 필수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버지니아 지역의 특수한 상황이기는 하나 개인적인 정착 경험을 소개한다.

1. 공항에서 짐 부치기
규정상 성인 한 사람 당 32㎏짜리 짐을 2개씩 부칠 수 있다. 우리 가족은 고1, 중3 아이들을 포함, 4명이 8개까지 짐을 부칠 수 있는 만큼 샘소나이트 이민 가방(롯데백화점 샘소나이트 코너에서 11만8000원 짜리를 50% 할인한 5만9000원에 판매)을 7개가 준비했다. 그러나 막상 공항에 도착해 출국 수속코너 앞에 준비된 저울에 달아보니 7개 중 6개가 적게는 2㎏에서 많게는 13㎏까지 초과한 상태였다. 부랴부랴 가방 가게로 달려가 이민가방(샘소나이트 것 보다 천이 얇고 폭이 좁았는데 개당 5만2000원) 1개를 사서 뭇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엌 살림이며 옷가지들을 옮겨담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1개로 부족해 1개를 더 사서 나누는 바람에 수하물이 초과되고 말았는데 항공사측은 초과 수하물 1개당 13만5000원씩 부과했다. 비행기 출발 시각(10시 45분)보다 무려 3시간 30분 가량 일찍 나왔는데 짐부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환전하고 스카이 패스에 마일리지 등록하고 출국증명 발급(직장의료보험을 1년 동안 정지시키기 위해 필요한 서류로 당일은 발급이 안되므로 공항 출입국 등록소에서 위임장 서류를 가져다가 작성하고 미리 신분증 사본을 한 장 준비해 뒀다가 환송나온 지인에게 맡기면 출국 후 지인이 가까운 동사무소에 가서 발급받아 회사로 보내주도록 부탁하면 된다)하는 등 여기저기 다니다보니 출국 수속 후 면세점 들릴 시간이 없을 정도로 빠듯했다.

2. 덜레스 공항에서 아파트로
미국 워싱턴 덜레스 공항에 도착해서도 걱정거리는 무려 9개(핸디케어 4개는 제외)로 늘어난 보따리였다. 무엇보다 수하물 통과가 문제였다. 1995년 입국 당시 세관에서 일일이 짐 검사를 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누군가 포터를 사면 수월하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고 짐 자체도 많았던지라 포터를 샀는데 그 값을 했다. 검사원은 식품류가 포함돼 있느냐는 질문 하나만으로 통과시켰다. 가방에는 고추장과 마른 반찬, 건어물 등이 가득 들어있었지만, 나는 물론 없다고 대답했다. 공항에서 임대한 아파트까지는 밴 택시로 이동했다. 20분 정도 거리인데 요금은 짐이 많다는 이유로 40달러를 요구했다. 팁을 안주면 요구한다.

3.아파트 계약서
임대 사무소에서 계약서와 함께 서류를 한 뭉치 갔다준다. 계약서는 은행계좌 개설이나 사회보장번호 신청시 필요하니 별도로 관리해야 한다. 도착한 날 임대 사무소에서 서명하라고 내밀던 것들이었는데 대부분이 이런 저런 명목으로 나의 부담을 명문화한 서류들이었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방문객용 주차증은 가구당 1장씩 발급되며 읽어버리거나 도난당하면 재발급은 없다, 방문객용 주차증으로 거주자 주차장 외의 장소에 주차하면 알리지 않고 견인한다,주차증 반납안하면 25달러 물린다, 열쇠 잃어버리면 개당 50달러 물어내야 한다, 임대료는 매달 1일에 납부해야 하고 4일 이상 지체하면 임대료의 5%를 지체료로 부과하며 미불 임대료가 50달러 넘으면 매달 6일에는 변호사에게 넘겨 소송을 통해 해결하도록 하겠다, 임대주택 안이든 밖이든 뭔가를 교체하려면 사전에 허가받아라, 기존 열쇠 교체하기 원하면 25달러 부담해라, 발코니나 현관 앞, 복도 등에 쓰레기버리면 자동적으로 25달러 벌금이 부과된다, 계약 여부를 계약 만료 75일 전에 통보해야하고 임차인은 임대차 계약 종료 의사를 60일 전에 문서로 통지해야 한다, 임차 물건을 점검한 뒤 손상 부분이 발견되면 공정한(?) 시장 가격을 기준으로 배상액을 책정해 방 빼기 30일 전에 문서로 통보하겠다는 등등.
거꾸로 임차인도 불편한 사항의 시정과 편의 증진을 위한 조치를 적극적으로 요구할 권리가 있다. 우리 집은 가스 레인지 4곳 중 3곳의 점화장치가 고장난 상태였고 화장실 세면대는 물을 받아놓는 플러그가 망가져 있었다. 바퀴벌레도 눈에 띄었고 에어컨 바람도 시원하지 않았다. 요구하면 고쳐주나 여러 번 채근해야 한다. 이런 하자들을 그냥 놔두면 나중에 방 뺄 때 덤터기쓸 수 있다.

4. 은행계좌 개설하기
미국은 공짜가 없는 나라다. 내가 임차한 아파트의 월세 납부일은 매 달 1일이다. 나는 7월27일 도착했으니 그 달 말일까지 5일을 보낸 뒤에야 8월치 임대료를 납부하는 날이 된다.
한국에도 월세가 있지만 나와 같은 상황에서 주인이 임차인에게 7월달 자투리 기간까지 돈으로 계산해서 받아냈을까 싶다. 그러나 이 곳은 반드시 받아낸다. 나도 3백달러 가까운 5일치 임차료를 지불한 뒤에야 아파트 열쇠를 받을 수 있었다.
현금은 안 받는다. 그래서 근처 가게에 가서 수수료를 내고 머니 오더를 받아 납부했다. 돈 거래를 투명하게 하겠다는 취지이리라. 이런 사정인지라 개인수표를 사용할 수 있는 은행계좌 개설이 급했다. 미국 계좌에는 크게 Checking Account와 Savings Account가 있다. 전자는 개인이 수표를 발행해 사용할 수 있는 계좌다. 보통은 횟수에 관계없이 수표를 발행해 쓸 수 있다. Checking Account에는 최저 잔고액수(Minimum balance requirement)를 정해놓은 상품과 최저 잔고액수를 정해놓지 않은 상품이 있는데 전자의 경우 수표 발행 수수료면제나 인터넷 뱅킹 무료 등 이런저런 혜택이 있는 반면 잔고가 설정한 최저 잔고 아래로 내려가면 수수료를 지불해야 한다. Savings Account는 Checking Account와 달리 시세 금리에 따라 이자를 지급 받는다. 대신 Savings Account는 수표 사용이나 계좌 이체 횟수가 제한돼 있다.
나는 인근에 위치한 SunTrust Bank에 가서 조지타운 대학에서 보내준 DS-2019와 비자를 신원확인 서류로 제출하고 Checking Account를 개설했다. 예치해놓고 곳감 빼먹듯 인출해 쓰는 단순한 입출금 통장이다. 은행 입장에선 이자는 주지않으면서 계좌 이체 수수료 등을 받아낼 수 있고 예치된 돈을 굴릴 수 있으니 무조건 남는 장사다. 그런데도 사회보장번호가 나오지 않은 예금자에게는 신상 정보를 꼬치꼬치 물어본 뒤에야 발급해준다. 9.11 사태의 여파다.
한국의 거래은행에 가서 인터넷 뱅킹을 신청하고 유학생 지정을 받아오면 편리하다. 국내에서 송금받는 것 보다 수수료도 저렴하고 환율 우대도 받을 수 있다. Routing number와 미국 현지 은행의 계좌번호 둘 다 필요한 경우도 있고(국민은행) 계좌번호만 입력하면 되는 은행(제일은행)도 있다.

5. 전기-전화-핸드폰-케이블-인터넷 가입하기
미국에 온 외국인은, 아직 사회보장번호를 받기 전이라면 전화 한 대 가입하는데만도 시간과 돈을 투자할 각오를 해야한다.
전기회사(Virginia Power)와의 계약은 임대 사무소에서 대행, 입주하는 날 사인 하나로 해결됐다. 전화는 Verizon Phone Company에 신청했는데 인적 사항을 확인하던 전화회사 직원은 내가 사회보장번호도 발급받지 못한 외국인으로 판명되면서부터 꼬장꼬장해졌다. 신원을 증명할 수 있는 증명서 2통(사진이 들어있는 여권이나 비자, 국제운전면허증 등)을 팩스로 확대복사해서 보내고 Advance payment 55달러와 deposit 40달러를 Vienna 지역에 위치한 Verizon Phone Company(웨스트 버지니아주 소재) 지점에 직접 찾아가 납부하도록 요구했다. 팩스로 송부할 때는 전화회사에서 알려주는 등록번호(14자리)를 증명서에 기재해야 한다. 지점이라고 해서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곳은 슈퍼마킷이었는데 지역 상점과 위임 계약을 맺고 지점 업무 일부를 대행토록 하고 있었다. 단순 업무를 아웃소싱해서 조직을 경량화하겠다는 취지로 이해됐다.
어떻든 이 곳에서 팩스 보내고 영수증 받아 전화회사로 연락하면 회사측은 입금 사실을 확인하고 전화를 개통시켜준다. 그러나 개통까지 1주일이나 걸렸다. Local 통화 요금은 다른 옵션이 없다면 월 22달러 53센트(Tax 제외)로 무제한 통화가 가능하고 설치료는 38달러 50센트다. 설치료는 3分해서 첫 3개월 통화료와 함께 부과한다.
 

'미국 탐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액연봉 포기한 자원입대 프로선수  (0) 2006.03.19
벌칸의 선택  (1) 2005.04.25
대통령과 결별하는 판사들  (0) 2005.03.11
촌지 없는 학교  (0) 2005.02.13
미국 언론의 당파성  (0) 2005.02.03
버지니아 정착기(3)  (0) 2004.09.30
버지니아 정착기(2)  (0) 2004.08.27
울어야 젖주는 사회  (0) 2004.08.13

최근 게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