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미국 사회는 내게 각박한 곳이라는 이미지로 다가왔다.

살 집을 계약할 때의 일이다. 워싱턴 특파원으로 미국에 주재하고 있는 회사 선배가 아파트 임대회사와 가계약을 맺고 내게 연락했다. 미국에 오기 전이었던 나는 집 문제는 일단 해결됐다고 생각했으나 본계약이 체결될 때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됐다. 무엇보다 내가 월세를 꼬박꼬박 낼 수 있을 만한 재정 능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임대 회사측에 확신시켜야만 했다. 나는 재직 증명서와 근로소득원천증명서, 한국언론재단의 연수비 지원 증명 서류를 팩스로 송부했으나 회사측은 서류의 원본을 받을 때까지는 계약을 보류했다. 국제우편으로 원본을 보낸 후에야 임대차 계약이 체결됐다. 올 7월 27일 미국에 도착해서도 그 달 말일까지 5일 동안의 임대료를 지불한 후에야 아파트 열쇠를 손에 쥘 수 있었다.

나는 이 것이 미국식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한 미국식이 합리적이고 배울 점이 있다고 판단했다. 아무리 월세라 하더라도 보증금 정도받고 세를 놓고, 자투리 5일 정도라면 그냥 살게 해주는 한국의 집 주인과 기업형으로 운영되는 미국식 임대 회사와는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미국에 도착한 직후, 나는 미국식의 추한 뒷모습을 봤다.

미국에 도착한 다음 날 임대 사무소에서 서류 한 뭉치가 전달됐다. 나는 계약 서류들을 읽어 내려가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전날 임대 사무소에서 서명하라고 내밀던 것들이었는데 크고 작은 명목으로 나의 부담을 명문화한 서류들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방문객용 주차증은 가구당 1장씩 발급되며 읽어버리거나 도난 당하면 재발급은 없다, 방문객용 주차증으로 거주자 주차장 외의 장소에 주차하면 알리지 않고 견인한다, 열쇠 잃어버리면 개당 50달러 물어내야 한다, 임대료는 매달 1일에 납부해야 하고 4일 이상 지체하면 임대료의 5%를 지체료로 부과한다, 미불 임대료가 50달러 넘으면 매달 6일에는 변호사에게 넘겨 소송 진행하겠다, 임대주택 안이든 밖이든 뭔가를 교체하려면 사전에 허가받아라...

한 마디로 단 돈 1센트도 손해보지 않겠다는 자세다. 방 빼기 70일 전에 사무소에 계약 종료 의사를 밝혀야 하고 손상 부분 발견되면 공정한(?) 시장 가격을 기준으로 배상액을 책정해 문서로 통보하겠다는 규정도 있었다. 미국에서는 밀린 월세 떼어먹고 야반도주하는 일이 많다고 하니 임대 회사의 입장을 이해 못할 바 아니다. 계약이야말로 자본주의의 핵심 요소라는 사실도, 배워서 안다.

문제는 그들이 임차인에게 가혹한 만큼 자신에게도 같은 잣대를 적용하고 있느냐다. 가구 하나 없이 텅 빈 아파트에서 유일하게 장판이 깔린 주방에 이불을 펴고 첫 날 밤을 지샌 우리 가족은 한 밤 중에 바퀴벌레들과 격전을 치러야 했다. 화장실 세면대의 물받이 플러그는 헐거워져 제 구실을 못했고 에어컨 바람은 프레온 가스가 떨어져 시원하지 않았다. 주방의 유리창 하나는 금이 가 있었다. 이 것은 불합리한 상황이다. 임대회사가 자신에게 관대한 또 다른 잣대를 들고 있다는 점에서 불합리했다. 직전 임차인에게 하자 부분에 대한 배상을 받아냈거나, 내가 주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계약 만료 시점에 그 하자들의 배상을 나에게 요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임차인은 부조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가뜩이나 시차 탓에 눈은 쑤시고 머리는 어질어질한 속에서 나는, 매우 화가 났다. 임대 사무소로 찾아갔으나 그 날은 수요일이었다. 사무소 직원들은 월,목,금,토요일은 오전 10시에서 오후6시까지 일하고 나머지 요일은 낮 12시부터 오후6시까지 근무한다. 요일 별로 임차인의 민원 분량에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오후에 다시 찾아가 바퀴벌레부터 부엌 유리창까지 모두 해결해달라고 요구했다. 약간 금이 갔을 뿐인 부엌 유리창은 통째 교체하기엔 너무 아까운 생각이 들어 전 날 집을 점검할 때는 한국식으로 그냥 넘어갔던 부분이었다.

후에 케이블과 인터넷을 설치할 때도 그랬다. 사전 예약은 필수라는 미국 사회라서 시간 관념이 정확한 것으로 믿고 있다가 낭패를 당했다. 분명 오후 3시~5시에 온다던 케이블 회사 기사는 오후 6시가 넘어서야 도착했다. 케이블 회사측에 3차례나 독촉 전화를 걸어 채근한 후였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法諺이 생생히 살아 숨쉬는 나라에 왔다는 자각 속에, 우리 가족은 정말 정신차리고 살고있다. 조남규기자


'미국 탐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액연봉 포기한 자원입대 프로선수  (0) 2006.03.19
벌칸의 선택  (1) 2005.04.25
대통령과 결별하는 판사들  (0) 2005.03.11
촌지 없는 학교  (0) 2005.02.13
미국 언론의 당파성  (0) 2005.02.03
버지니아 정착기(3)  (0) 2004.09.30
버지니아 정착기(2)  (0) 2004.08.27
버지니아 정착기(1)  (0) 2004.08.12

최근 게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