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0일은 'Touching Base Day' 였습니다.
무슨 국경일이냐구요.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미국 고등학교 행사일입니다.
그간 소식이 뜸했던 이들과 만나 얘기한다는 'Touch base'의 사전적 의미 그대로,
학부모들이 학교로 찾아가 자녀들을 맡고 있는 과목 선생님들과
얘기하는 날이지요. 중간 성적표가 가정에 전달되기 직전에 열립니다.
이 날은 특히 아이들이 좋아하는 날입니다. 매일 새벽 밥 먹고 학교가는 일이 얼마나 지겨웠겠습니까. 등교 시간이 오전 10시 10분으로 3시간 늦춰지는 이 날은 아이들이 꿀맛같은 아침 잠을 좀 더 만끽할 수 있는 날입니다. 대신 학부모들은 새벽 밥 먹고 학교에 갑니다.
그래서 저도 학교에 한 번 가봤습니다.
학교 앞에 세워진 표지판은 언제봐도 인상적입니다.
'세금 내 주신 학부모님들 고맙습니다'
어디서나 학부모들은 정말 애들 교육엔 열심입니다. 평일인데도 거의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참석한 것 같군요.
<줄서서 과목별 담당 선생님과 상담할 차례를 기다립니다>
고맙게도 학교측에선 아침을 거르고 온 학부모들을 위해 빵과 커피, 주스 같은 간단한 요깃거리도 준비했더군요.
학부모들은 자녀들을 맡고 있는 선생님들을 과목별로 한 분씩 찾아다닙니다. 선생님들은 항목별 채점표를 보여주며 자녀들의 학업 성취도나 태도 등을 설명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현수는 가끔 수업 시간에 몽상을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호윤이는 지난해 10월 중순쯤부터 말문이 터졌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등의 말씀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영어를 맡고 있는 Mrs. Deckerd(가운데), Mrs. Norell>
지난 가을엔 학기가 시작되고 2주쯤 지나서 'Back To School Night' 행사가 있었습니다. 이날은 학부모들이 저녁 7시쯤 학교로 찾아가 아이들이 신청한 과목 담당 선생님들로부터 수업 방침 등에 관한 설명을 듣는 날입니다.
이날 모든 선생님들은 참석한 학부모들에게 자신의 e-메일 주소를 알려줍니다. 상담은 가급적 e-메일을 이용해달라는 설명과 함께.
물론 학부모와 학생의 e-메일은 학교 등록할 때 필수 기재 사항이고 선생님들의 e-메일도 학부모에게 전달됩니다.
저는 인터넷 강국이라는 한국의 학교에서 선생님과 학부모가 e-메일로 자녀 문제를 상담하는 광경을 좀체 본 적이 없습니다. 어찌보면 사소한 문제랄 수 있는 선생님-학부모간 e-메일 통신에 제가 왜 이렇게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지 한국의 학부모라면 십분 공감할 것입니다. 학교를 찾아가 선생님을 찾아 본다는 일이 요즘에 와선, 본래의 순수한 취지를 잃고 얼마나 학부모를 고민스럽게 하는지 말입니다.
학기가 시작된 직후 이 곳 학교에서는 학생들 편에 각종 등록 서류들을 들려 보냈습니다. 그 중에 기부금을 요청하는 서류가 2장 있었습니다. 하나는 학생들의 특별 활동과 선생님들의 재교육 프로그램 등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학부모-학생-선생 협의회 명의의 포괄적 용도의 기부금 모금이었습니다. 액수는 각자 형편에 맞게 적어서 학생 편에 가계 수표와 함께 들려 보내면 됩니다. 이 기부금은 어떤 명목으로든 궁극적으로는 학교을 위해서 쓰여지는 돈입니다. 이 곳에서도 기부금을 듬뿍 낸 학부모는 주기적으로 열리는 학무모-학생-선생 협의회 등에서 발언권이 세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기부금을 고리로 특정 학생이 특혜를 받거나 불이익을 받는 사례는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결론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단 1달러도 기부하지 않은 채 학교와 선생님들의 태도를 지켜봤습니다. 그런 끝의 제 결론은, 기부 여부는 학교가 학생을 대하는 태도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촌지는 기부금과 차원이 다릅니다. 기부금은 학교를 위해 선용되지만 촌지는 누군가의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갑니다. 기부금은 그 목적이 투명하지만 촌지는 불투명합니다. 주는 쪽은 대개가 자기 자녀가 다른 학생에 비해 더 나은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최소한 다른 학생 보다 못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하자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누군가 특혜를 받으면 누군가는 불이익을 받을 수 밖에 없지않겠습니다. 이 건 공정하지 않은 게임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학부모가 촌지를 건네서 조건을 평등하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미국 탐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가의 탐욕 (0) | 2008.12.29 |
---|---|
고액연봉 포기한 자원입대 프로선수 (0) | 2006.03.19 |
벌칸의 선택 (1) | 2005.04.25 |
대통령과 결별하는 판사들 (0) | 2005.03.11 |
미국 언론의 당파성 (0) | 2005.02.03 |
버지니아 정착기(3) (0) | 2004.09.30 |
버지니아 정착기(2) (0) | 2004.08.27 |
울어야 젖주는 사회 (0) | 2004.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