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30일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대선을 11일 앞둔 28일(현지시간)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대선후보(이하 힐러리)의 ‘이메일 스캔들’에 대한 재수사에 나섰다.
대선 전까지 결론은 나지 않겠지만 재수사 발표만으로도 힐러리는 큰 타격을 입게됐다.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대선후보가 힐러리의 이메일 스캔들을 공격하고 있는 것은 중요치 않다. 경쟁 후보인 트럼프의 공세는 당연한 것이다. 문제는 이메일 스캔들 재수사가 힐러리의 측근주의와 비밀주의를 미국인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대선이 코 앞이다.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부동층과 중도층이 힐러리를 외면할 수 있다.

힐러리의 이메일 스캔들은 대선판을 뒤흔들 ‘게임 체인저’(game changer)였다.

이메일 스캔들은 힐러리가 개인 이메일 계정을 통해 공무를 보고, 그 과정에서 일부 기밀 서류가 유출됐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힐러리도 “실수였다”고 인정했다. 더 큰 문제는 이메일 스캔들로 드러난 힐러리의 정실주의, 비밀주의 행태다. 힐러리는 왜 보안이 철저한 국무부 공용 메일을 놔두고 개인 이메일 계정을 통해 측근들과 밀담을 나눴을까.  

최근 필자가 쓴 칼럼이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미국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대선후보는 시련의 정치인이었다.
 
1992년 남편인 빌 클린턴(이하 빌)의 대선 승리로 퍼스트레이디가 된 힐러리는 보수 진영의 표적이 됐다. 그럴 만도 했다. 힐러리는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백악관 웨스트윙에 퍼스트 레이디 사무실을 마련했다. 그때까지 퍼스트 레이디의 사무실은 백악관 이스트윙에 있었다. 남편을 내조하던 기존의 퍼스트레이디와 달리 힐러리는 빌 클린턴 정부의 의료개혁을 진두지휘하는 등 빌과 사실상 ‘공동 통치’를 했다. 여성과 동성애자 권익 보호에도 앞장섰다. 전통을 중시하는 공화당 의원들의 눈에 힐러리가 곱게 보였을 리 없다. 
 
공화당은 다수당이 되자 의회는 특별검사를 임명해 힐러리와 관련된 모든 의혹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믿고 의지했던 측근은 권총 자살을 했다. 언론과도 불화를 겪었다. 힐러리는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측근들과 똘똘 뭉쳐서 외부 공세에 맞섰다. 힐러리의 측근을 일컫는 ‘힐러리랜드’(Hillaryland)가 이때 생겨났다. 거의 전원이 여성이었다. 이들은 힐러리가 시련을 겪을 때마다 곁을 지켰다. 힐러리도 이들을 가족처럼 대했다. 힐러리랜드에 소속되면 클린턴 부부에게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미 언론은 힐러리가 측근들의 애경사를 직접 챙겼다고 전했다. 측근들은 충성심으로 보답했다. 법원 판결로 공개된 이메일에서 그들은 힐러리를 ‘보스’로 불렀다.
 
힐러리가 2000년 상원의원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한 이래 그의 정치는 측근들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이런 측근 정치는 힐러리가 2008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버락 오바마 후보에게 패배한 원인 중 하나로 거론된다. 의리로 뭉쳐 있던 힐러리 캠프는 능력있는 인재와 참신한 전략을 쉽게 수용하지 못했다. 인재와 전략은 오바마 캠프로 흘러 들어갔다. 힐러리는 이후 외부 인사에도 힐러리랜드의 문호를 일부 개방했다. 그래도 힐러리랜드에는 아직도 빌 클린턴 정부 시절부터 함께해온 측근들이 다수 포진해있다. 
 
힐러리의 최측근인 셰릴 밀스와 힐러리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후마 에버딘은 클린턴 정부 시절부터 힐러리랜드에 소속돼 있던 인사들이다. 밀스와 에버딘은 힐러리가 국무장관에 임명됐을 때 각각 비서실장과 비서실차장에 임명됐다. 힐러리와 에버딘의 관계를 놓고는 “빌조차도 힐러리와 접촉하려면 에버딘을 통해야 한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다.  
 
힐러리의 비밀주의 행태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힐러리는 국무장관 시절 개인 이메일을 통해 측근들과만 은밀히 소통했다. 그 과정에서 국가기밀로 분류된 정보들이 사적으로 유통됐다. 미국 사법당국이 힐러리를 기소했다면 올해 대선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을 것이다. 2016년 대선 과정에서 힐러리를 괴롭혔던 ‘이메일 스캔들’은 비밀주의 행태가 낳은 예고된 참사였다.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대선후보는 대선 캠페인 기간에 힐러리의 측근 정치와 비밀주의 행태를 공격했다. 힐러리의 측근 중에는 컨설팅 회사를 차려놓고 세계 각국의 기업을 고객으로 두고 떼돈을 번 인사도 있었다. 보수 진영은 힐러리가 그 측근의 돈벌이를 도왔다는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힐러리가 비혐오 후보가 된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다. 이메일 스캔들과 관련해선 힐러리가 직접 “실수였다”고 여러 차례 고개를 숙여야 했다. 비선(秘線) 측근에 과도하게 의존해온 박근혜 대통령도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다. 공교롭게도 한·미 양국에서 대표적 여성 리더의 측근 정치가 도마 위에 올랐다.




이 칼럼은 힐러리의 기질과 행태를 중심으로 분석해본 글이다.

그런데 최근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또 다른 힐러리 관련 이메일을 검토해보니, 그간 공화당이 폈던 음모론도 전혀 근거가 없는 허무맹랑한 주장은 아닐 것이란 심증이 생겼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록키마운트에서 아내인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대선후보 지원 유세에 나선 빌 클린턴 전 대통령(왼쪽)이 한 참석자와 사진을 찍고 있다.
노스캐롤라이나=AP연합뉴스
위키리크스에 따르면 빌은 자신이 고문으로 있던 글로벌 컨설팅 기업 ‘테네오’를 통해 고액강연을 주선 받은 정황이 드러났다. 테네오를 설립한 사람은 더글라스 밴드로, 빌이 대통령 시절부터 중용해온 측근이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012년 재선 캠페인 과정에서 빌의 도움을 받기위해 접촉한 창구가 밴드였다.

밴드는 클린턴재단의 창립 멤버였지만 클린턴 부부의 외동딸인 첼시가 클린턴재단에 개입하면서 마찰이 빚어지자 테네오를 만들어서 독립했다. 빌은 밴드의 사업을 돕기위해 테네오의 고문직을 수락한 것이다. 하지만 현직 국무장관의 남편이 국무장관이 다루는 나라의 기업들을 의뢰인으로 둔 기업에서 돈을 받고 고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행동이었다. 아무리 조심해도 이해 충돌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2011년 11월자 밴드의 메모에는 “내가 맡은 업무가 클린턴재단을 위해 모금 활동을 펼치고 클린턴 전 대통령의 유급 강연 기회를 조율하는 일”이라면서 이런 활동을 ‘빌 클린턴 주식회사’, ‘영리 활동’이라고 표현했다. 클린턴재단의 기금모금자로 10년 이상 활동해온 밴드는 당시 코카콜라와 다우케미컬, 대형은행인 UBS가 클린턴재단에 수백만 달러를 기부하도록 했다. 빌은 UBS에서 3차례 강연하고 90만 달러를 받았다. 이런 식으로 밴드가 빌에게 보장해준 유급강연 등 비즈니스 주선은 3000만∼6000만 달러(343억∼686억 원)에 달했다. 밴드는 메모에서 “우리는 클린턴 전 대통령의 개인적, 정치적, 사업적목표와 클린턴재단의 비영리 목표를 동시에 수행하는 등 균형을 맞출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밴드가 클린턴재단 변호사들에게 보낸 이 메모는 위키리크스가 최근 해킹해 공개한 존 포데스타 힐러리캠프 선거대책본부장의 개인 메일에 포함돼 있었다. 힐러리는 이 메모에 언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힐러리는 국무장관 재임 시절 남편에게 강연료를 지급한 최소 15개의 기업 대표와 만나거나 대화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트럼프는 “오늘 우리는 클린턴의 절친한 친구인 밴드가 클린턴 주식회사에 수천만 달러를 몰아준 것을 자랑하는 내용을 읽었다”며 “클린턴 일가가 백악관 밖에 있을 때도 그들의 기업을 마음대로 갖고 놀았는데, 그들이 다시 백악관에 들어가면 어떻게 할지 상상해보라”고 공격했다.

밴드는 빌이 재단 기부자들로부터 개인 수입을 올렸고 비싼 선물들을 받았다는 이메일도 썼다. 

‘로리엇 국제대학’은 빌에게 명예 회장에 앉힌 뒤 매년 350만 달러(약 40억원)를 줬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밴드가 기업체 인사들을 골프장 등에서 빌에게 소개해주고 재단에 기부할 것을 압박했다고 보도했다. 

테네오 측은 “클린턴재단이 전 세계적으로 전개하는 좋은 일을 지원하기 위해 기부금을 기업들에 요청한 것”이라며 “우리 회사는 이 일과 관련해 어떤 금전적 혜택도 받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클린턴 캠프는 성명을 통해 “클린턴 가족은 전 세계 수백만 명을 도운 클린턴재단의 일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밝혔다. 하지만 대다수 미국인들은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이메일 내용에 더 주목하는 분위기다. 클린턴 부부의 정실주의, 비밀주의 행태가 부메랑이 돼서 힐러리를 괴롭히고 있다.

조남규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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