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남북정상회담 방북단은 수행원 150명, 기자단 50명, 지원인원 100여명으로 구성됐다. 대표단은 2007년 10월2일 아침 서울을 출발, 경의선 CIQ(남북출입사무소)를 경유,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평양에 도착했다. 2박3일의 일정이었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1차 남북정상회담 때 우리 대표단은 서해 직항로를 통해 항공편으로 방북했다. 이번에는 육로 방북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10월 2일 오전 9시쯤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남북분단의 상징인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통과했다. 노 대통령은 군사분계선 앞에서 "이 자리에 선 심경이 착잡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이 선이 우리 민족을 갈라 놓은 장벽이다. 이 장벽 때문에 우리 국민들은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아왔고 또 발전이 정지되어 왔다"는 심경을 피력했다. 그런 뒤 "다행히 그동안 여러 사람들이 수고를 많이 해서 이 선을 넘어가고 넘어왔다. 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의 선을 넘어간다. 제가 다녀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은 지워지고 장벽은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
도라산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개성, 평양으로 이어진 길
분단 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군사분계선 앞에 표지석이 설치됐다. '평화를 다지는 길, 번영으로 가는 길. 2007년 10월 2일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이라고 새겨진 표지석의 문구는 노 대통령이 직접 친필로 작성한 것이다.
정부 공식 행사에서 우리 측 인사들이 육로로 평양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특히 한국 기자들에게 육로를 개방한 것은 북측의 폐쇄성을 고려할 때 주목할만한 일이었다. 북한의 실상을 그대로 공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개성에서 평양까지 가는 고속도로는 노면 상태가 고르지 못했다. 오가는 차량도 거의 없었다. 고속도로 옆의 일반 도로는 비포장 흙길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도 보였고 소달구지를 끌고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북측의 가파른 산세는 남한과는 다른 나라같았다.
2007년 10월2일 남북정상회담 취재단 일원으로 버스를 타고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이용해 평양으로 가던 도중, 임시로 설치된 휴게소에서 북측이 제공하는 음료수를 마시고 있다.
개성에서 한 시간쯤 달리자 대동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동강을 가로지르는 '충성의 다리'를 건너자 길가 인도에 평양 시민들이 분홍색 조화를 들고 앉아 있었다. 스피커를 단 차량에서 구령을 외치자 평양 시민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만세"를 반복하며 함성을 질렀다. 환영 행렬은 노무현 대통령의 환영 식장인 4.25문화회관 앞 광장까지 이어져 있었다.
2007년 10월2일 평양 시내 모란봉 구역에 위치한 4.25문화회관 앞 광장. 왼쪽이 필자이고 오른쪽은 대학 동기인 CBS 김재덕 기자.
2007 남북정상회담을 하기위해 평양에 도착한 노무현 대통령을 맞이하는 북측의 공식 환영식이 열리고 있다. 당초 공식 환영식은 평양 입구인 승리동의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광장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한 시간 전쯤 장소가 갑자기 이곳으로 바뀌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오전 9시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은 뒤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2시간30분 정도 달려 평양에 도착한 뒤 인민문화궁전에서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영접을 받았다. 그리고 무개차를 타고 4.25문화회관까지 카퍼레이드를 했다. 필자는 미리 이 곳으로 와서 노 대통령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나기 직전 현장에서 대기하는 남북측 인사들. 김종민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오른쪽 두번째)과 유민명 대변인실 행정관(왼쪽 네번째) 모습이 보인다.
2007년 10월2일 낮 12시쯤 갑자기 문화회관 광장 환영 인파에서 함성이 터졌다. 일부 시민들은 울기도 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어 5분 뒤 노 대통령과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함께 탄 무개차가 광장으로 들어서고 의장대의 군악 연주가 울려퍼졌다. 김 위원장은 노 대통령과 부인 권양숙 여사와 악수를 교환하고 북한 인민군 의장대 사열을 받았다. 노 대통령은 영접 나온 북한 당,정,군의 고위층 인사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이어 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4.25문화회관 앞 중앙단상에 나란히 올라 북한 인민군의 분열을 받았다. 환영식이 끝난 뒤 노 대통령은 숙소인 백화원 초대소로 갔고 김 위원장은 잠시 더 광장에 머물며 환영 인파에게 손을 흔들었다. 김 위원장이 떠날 때 박수와 환호성은 더 커졌다. 2007 남북정상회담은 다음날인 3일 백화원 초대소 영빈관에서 이뤄졌다.
노 대통령은 평양 도착 직후 서면을 통해 북한 동포와 평양 시민에게 전하는 도착 성명을 발표했다. 노 대통령은 성명에서 "여러분의 따뜻한 환영에 마음 속 깊이 뜨거운 감동을 느낀다. 남북은 지금 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보면서 더 큰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우리의 생각이 간절할수록, 우리의 의지가 확고할수록 그 길은 더욱 넓고 탄탄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10월 2일 노 대통령과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면담이 있었다. 노 대통령은 북한 최고인민회의 본회의장을 참관한 후 방명록에 '인민행복이 나오는 인민주권의 전당'이라고 서명했다. 면담 이후 평양 시내 목란관에서 김 상임위원장 주최 만찬이 열렸다. 필자는 이 만찬의 풀기자였다. 목란관은 평양 중구역에 자리 잡은 연회장으로 북한의 국화인 '목란'에서 이름을 땄다. 만찬장에 들어서자 헤드 테이블 맞은 편 벽에 걸린 대형 '해 그림'과 반대편 벽에 걸린 '파도 그림'이 눈길을 사로 잡았다.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해 사진'을 가리키며 김대중 대통령 일행에게 "저게 해 뜨는 장면 같소, 아니면 지는 장면 같소?"라고 물은 뒤 "아침에 들어와서 보면 해 뜰 때, 술 마시다 저녁에 해 질 때 보면 또 저 장면"이라고 자문자답했다는 일화가 생각났다. 그래서 '해 사진'을 유심히 관찰했으나 어느 시점의 해인지 끝내 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그 사진이 냉온탕을 반복했던 남북관계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 입맛이 썼다.
목란관에 걸린 해 그림
기자의 옆에 앉은 북측 인사는 조선중앙통신사 간부였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뒤 중앙통신사에 입사한 20년차 기자로, ㅈ로 정치 보도 부문을 담당해왔다고 했다. 신변잡기식 대화를 이어 가던 와중에 우리는 생각하지도 못한 지점에서 분단의 벽을 실감하게 됐다. 대화 도중 '게사니 구이' 요리가 나왔을 때였다.
"게사니가 뭡니까?" 필자가 물었다.
"게사니가 게사니지 뭐겠습니까?"
"남측('남한'이라고 하면 항의를 받는다. 여러 차례 지적을 받은 끝에 필자도 '남측'이라는 표현에 익숙해졌다)에서는 게사니라는 말이 없습니다."
"오리 비슷한 조류인데 몸집이 좀 더 큽니다. 꽥꽥하는 소리를 냅니다."
"그럼 거위군요."
"거위가 뭡네까?"
음식을 내오는 안내원을 불러 물어도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거위려니 짐작하고 대화를 끝내야 했다. 서울로 돌아온 후 북한어 사전을 찾아보니 짐작대로 '게사니'는 거위의 북한어였다.
평양 방문 당시 취재단을 안내했던 북측 인사.
2007년 10월3일 낮 12시에 평양 시내 대동강변에 자리 잡은 옥류관 식당에서 노무현 대통령 초청 형식으로 공식 수행원, 특별 수행원, 공동취재단이 참여하는 오찬 행사가 열렸다. 필자도 냉면을 먹은 뒤 대동강변으로 나와 망중한을 즐겼다.
노 대통령은 이날 오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백화원 초대소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옥류관에서 점심을 먹은 뒤 오후에 백화원 초대소 영빈관에서 다시 김 위원장과 회담을 했다. 2007 남북정상회담의 전환점이 된 노 대통령의 오찬 발언이 이 곳에서 나왔다.
노 대통령은 오전에 진행된 첫 정상회담과 관련,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숨김없이 진솔하게 얘기를 나눴습니다. 한 가지 쉽지 않은 벽을 느끼기도 했다. 남측이 신뢰를 가지고 있더라도 북측은 아직도 남측에 여러 가지 의구심을 갖고 있다. 불신의 벽을 허물기 위해선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예를 들면 개혁과 개방이라는 용어에 대한 불신감과 거부감을 어제 김영남 상임위원과의 면담에서도, 또 오늘 김 위원장과의 회담에서 느꼈다. 우리는 개성공단을 아주 만족스러운 성공적인 사업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북측이 속도의 문제에 대해 섭섭하게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개성공단을 개혁과 개방의 표본이라고 많이 얘기했는데, 우리의 관점에서 편한 대로 얘기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북측이 보기에는 역지사지하지 않는, 그런 것이었다. 개성공단의 성과를 얘기할 때 북측의 체제를 존중하는 용의주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북측의 입장과 북측이 생각하는 방향도 존중해서 불신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노력을 함께해 나가면 좋겠다고 제안 드린다"
사실상 노 대통령의 오찬 발언은 김 위원장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이 발언은 즉각 김 위원장에게 보고됐을 것이다.
평양 주민들에 대한 덕담도 이어졌다.
"어제도 평양 주민이, 연도에 많은 사람이 나와 따뜻하고 열렬히 환영해 매우 기분이 좋았다. 그와 같이 배려해 주신 북측 당국에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연도에 계신 분들을 가까이에서 보니 표정이 그렇게 간절할 수 없었다. 남북의 국민이 나뉘어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이를 해소해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을 그분들의 표정에서 생생하게 보았다. 그동안 수십개 나라를 다녔지만 북측 땅만큼 먼 나라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까 음식도 똑같고 잠자리도 똑같고 통역도 필요없고 정말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생각한 것보다 훨신 더 좋은 체험이 될 것 같다. 여러분이 역사적 현장에 함께하고 계시다. 양국 간의 평화 정착, 공동의 번영, 마침내 화해와 통일로 가는 과제가 순탄하게 이뤄지길 바란다. 모든 부분에 인식을 같이하진 못했지만, 김 위원장이 평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갖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번에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화해와 통일에 대해서는 논쟁이 따로 없었다. 김 위원장과 북측 인민들의 건강과 행운을 함께 기원한다."
노 대통령의 오찬 발언은 경색됐던 이날 오전 남북 정상회담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오후 회담에서는 김 위원장의 태도가 한결 누그러져 2박3일의 공식 일정을 연기해서 하룻밤 더 묵고 가라는 김 위원장의 권유까지 나올 정도로 회담 분위기가 좋아졌다고 청와대 관계자가 전했다.
평양시 중구역 창전동 대동강 변에 자리잡은 옥류관은 1960년 8월 문을 열었다. 대동강 옥류교 옆에 위치해 있어 옥류관이란 이름이 붙었다. 순메밀 국수로 만든 평양냉면과 고기쟁반 국수, 평양온면, 대동강 숭어국, 송어회 등이 옥류관의 대표 메뉴다. 물냉면은 100% 메밀로 면을 만들고 쟁반냉면은 메밀과 전분을 섞어 만든다고 한다.
북한의 당.정 간부 연회 및 외국인 접대 장소로 자주 이용되고 있다. 북한 주민들도 즐겨 찾는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 곳에서 오찬을 했고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이 곳에서 오찬을 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8년 9월19일 옥류관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 부부와 오찬을 했고 특별 수행원으로 평양에 온 여야 3당 대표와 재계 총수들도 옥류관에서 식사를 했다. 그 때 리선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 재계 총수들에게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고 말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2018년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자유한국당 정진석 의원은 "옥류관 행사에서 대기업 총수들이 냉면을 먹는 자리에 리선권이 불쑥 나타나 정색하고 '아니,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갑니까'라고 했다, 보고 받았느냐"고 하자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고 답변했다. 정 의원이 "왜 그런 핀잔을 준 것이냐"고 묻자 조 장관은 "북측에서는 남북 관계 속도를 냈으면 하는 게 있다"고 했다. 그 자리에는 김능오 평양시 노동당 위원장을 비롯해 손경식 경총 회장,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 최태원 SK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광모 LG회장이 동석했다. 옥류관은 2020년 6월에도 다시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북한이 6.12 미북 정상회담 2주년을 맞아 대미, 대남 비방전을 시작했을 때 북한의 대외선전매체인 '조선의 오늘'에 오수봉 옥류관 주방장의 발언이 소개됐다. '조선의 오늘'은 2020년 6월13일 오수봉 주방장이 “평양에 와서 우리의 이름난 옥류관국수를 처먹을 때는 그 무슨 큰일이나 칠 것처럼 요사를 떨고 돌아가서는 지금까지 전혀 한 일도 없는 주제에 오늘은 또 우리의 심장에 대못을 박았다”며 “몽땅 잡아다가 우리 주방의 구이로에 처넣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필자는 2007년 남북 정상회담 취재단의 일원으로 노 전 대통령이 수행원과 오찬을 할 때 다른 테이블에서 냉면 맛을 봤다.
아래는 그 때 필자가 먹은 냉면 사진.
냉면을 먹은 뒤에는 '에스키모'가 나온다. 디저트 아이스크림을 북측에선 이렇게 불렀다. '얼음 보숭이'를 현대적으로 고친 이름이었다.
2007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평양에 온 도올 김용옥(위), 소설가 조정래씨.
옥류관에서 바라본 대동강 풍경
'아리랑' 공연이 열리고 있는 대동강 능라도 경기장(일명 5.1경기장)
노 대통령의 아리랑 공연 관람은 남북정상회담 준비 단계부터 '뜨거운 감자'였다. "대통령이 김일성의 혁명 생애와 선군정치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집단체조를 보는 것은 말이 안되다"는 반대 여론이 일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아리랑 관람은 북측에서 하자는 대로 맡기라"고 지침을 내렸다. 상호 체제를 존중하는 대승적 차원에서 정상회담을 풀어가고 손님도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남측 협상단은 노 대통령의 아리랑 공연 관람이 친북 논란 등 불필요한 이념 논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공연 내용 일부를 수정하기로 하고 북측과 사전 교섭을 벌였다. 북측은 남측의 이같은 우려를 받아들여 공연 내용을 수정하겠다는 태도를 보여 사전 교섭은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이에따라 청와대는 노 대통령의 아리랑 공연 관람 계획을 확정 발표했고 남측 선발대는 북측이 수정한 아리랑 공연을 사전 관람한 뒤 문제될만한 부분은 없다는 평가를 내렸다. 공연 관람 시간은 2007년 10월3일 오후 7시30분. 하지만 오전부터 비가 내린탓에 공연은 예정보다 늦은 오후 8시에 시작됐다. 필자를 비롯한 공동 취재단은 능라도경기장의 주석단 인근에 마련된 특별 좌석에 배치됐다. 북측의 10만여 관객이 경기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노 대통령은 오후 8시쯤 김영남 위원장과 경기장에 들어섰다. 아리랑 공연은 공연자만 10만명이 등장하는 세계 최대의 공연이다. 북측은 약속대로 공연에서 이념성 짙은 내용을 삭제, 수정했다. 원래 아리랑 공연은 서장과 본장 1,2,3,4장, 종장으로 구성됐는데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칭송하는 내용의 서장을 없애고 대신 출연진들이 노 대통령을 향해 모란과 진달래 등을 형상화한 종이꽃을 흔들며 환호하는 대목을 넣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한민족의 수난사로 시작하는 1장 공연으로 들어갔다. 아리랑 공연은 종장에서도 '영광스런 조선로동당', '영원히 번영하라 조선로동당', '위대한 우리 당에 영광을' 같은 카드섹션은 제외했고 2장에서도 북한 인민군의 위력을 과시하는 총검술 장면을 삭제하고 태권도 시범을 보이는 장면으로 대체했다. 김정일 위원장을 형상화한 카드 섹션도 없앴다. 그럼에도 '한 세대 두 제국주의 타승하신 강철의 명장, 어버이 사랑으로 강군을 키우신 대원수', '무궁 번영하라 김일성 조선이여'라는 카드섹션은 바꾸지 않았다.
아리랑 공연은 별 문제없이 끝났는데 논란은 의전 과정에서 불거졌다. 노 대통령과 함께 공연을 관람한 인사가 김정일 위원장이 아닌 김영남 최고인민회의위원장이라는 격식 논란이었다. 또 다른 논란은 노 대통령이 관람 도중 두 차례 기립박수를 친 것이었다. 공연 말미에 관중들이 함성을 지르며 노 대통령을 향해 환호하자 노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며 출연자들과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 대목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에 앞서 이뤄진 첫번째 기립박수는 논란의 소지가 있었다. 이 때 공연 중인 어린 아동들이 "아버지 장군님 고맙습니다"라고 소리치며 달려나오면서 노 대통령이 앉아있는 무대 뒤편으로 '아버지 장군님 고맙습니다'라는 카드섹션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김영남 위원장이 일어서자 노 대통령도 따라서 일어선 것이다.
기립 박수를 할 것인지 여부는 방북 전에 청와대 내에서 논의됐던 사안이었다. 공연을 관람하면서 일어서서 박수를 쳐야할 상황이 생겼을 때 손님으로서 그냥 앉아있기도 그렇고 기립박수를 치자니 남측 국민의 정서에 배치될 수도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청와대 참모들은 '일어서기는 하되, 박수는 치지 않는다'는 절충안으로 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무슨 소리요. 가서 전부 박수 치는 걸로 해!"라면서 참모들의 결정을 질책했다. 그러나 수행했던 각료들이 우려를 표명해서 원래대로 '일어서되 박수는 치지 않는다'로 최종 확정됐다. 노 대통령은 "그럼 나 혼자만 치지"라고 말하고 공연장으로 떠났다고 한다. 노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 사이에서도 이 문제는 고심거리였다. 권 여사가 "나는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노 대통령은 "나와 우리는 다르니 당신은 치지 마시오"라고 정리했다. 관람을 마친 뒤 권 여사는 노 대통령에게 불평을 토로했다고 한다. "나는 이제 이 사람들한테 인심 다 잃었다. 나는 북쪽에 오면 매 맞게 생겼고, 당신은 남쪽에 내려가면 매 맞게 생겼으니까. 이제 우리는 북에 가도 욕먹고 남에 가도 욕먹게됐다"
노 대통령은 나중에 기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나도 고민을 많이 했는데, 북쪽의 인심을 얻어야 되는가, 남쪽의 인심을 얻어야 되는가. 우리 여론의 인심을 얻어야 하나 북쪽의 호감을 사야 하나, 하고 고민했다. 그러다 결국 내가 여기 온 걸음이 얼마나 어려운 걸음인데, 그래도 와서 마지막까지 하나라도 더 본전 찾고 가자면 북쪽의 호감을 선택하는 것이 맞다 싶었다. 그래서 제가 박수를 쳤습니다."
북한 최고의 명문대인 김책공대 컴퓨터실에서 학생들이 컴퓨터를 다루고 있다.
북한도 취업난이 심각했다. 엘리트들이 갈 곳이 없어 국정원 직원 격인 안내원들도 김일성종합대학 출신들이 많았다. 기업체가 활발히 생겨나지 않으니 공무원으로 몰리는 셈이다. 그렇다보니 북한 주민들도 자녀 교육이 큰 관심사였다. 신분 변화가 활발하지 않다보니 자녀 교육에 더 매달리는 것이다.
2007 남북정상회담 취재진 숙소인 평양 고려호텔 내부. 숙소는 1인1실로 주어졌고 방은 트윈룸이었다. 세탁 서비스, 미니바 서비스는 모두 무료였다. 호텔 서비스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호텔 방의 라디오 스위치는 떨어져 나간 채였고 시계는 고장 나 있었다. 방문은 아귀가 맞지 않아 여닫을 때마다 힘을 줘야 했다. 금방 고칠 수 있는 사안인데도 그대로 둔채 운영되고 있었다.
아침, 점심, 저녁 식사는 2층 식당에서 코스 요리 형태로 제공됐다.
고려호텔 44층 스카이라운지에서 바라본 평양 전경.
고려호텔 스카이라운지는 회전 장치로 되어 있어 시내 전경을 사방에서 볼 수 있는 구조였다. 대동강맥주, 사이다, 들쭉 단물, 커피 등이 제공됐다. 남성 직원 한 명에 여성 카운터 한 명, 여성 봉사원 두 명이 근무했다. 호텔 지하의 '화면노래반주실'은 홀의 형태로 되어 있었다. 호텔에서는 이 곳에서만 양담배(던힐)를 팔았다. 노래는 북측 혁명가요, 일제강점기 때의 대중가요(북에서는 '계몽기 가요'라고 함), 서양 팝송 등이 있었다. 1층 로비에 마련된 매점에서는 농산품, 보약류, 주류, 버섯류 등이 구비돼 있었다. 카운터에 가서 전표를 구입한 뒤 매장에서 물품으로 교환하는 형식이었다. 카운터 옆에는 환율표가 붙어 있었다.
평양 건물 외벽이나 옥상에는 붉은 글씨로 쓴 선전 구호가 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선군정치의 위대한 승리 만세', '혁명의 수뇌부 결사옹위', '자주 자립 자위', '미제는 몰아내고 조국을 통일하자', '영광스러운 조선노동당 만세', '수령님은 만인의 태양', '김정일 원수님 고맙습니다' 같은 글귀였다.
평양의 거리는 도시계획이 제법 잘돼 있었다. 왕복 6차로가 대부분이었고 고층 건물 외벽도 회색 일변도가 아닌 다채로운 색깔로 단장돼있었다. 인도와 차도는 깨끗했다. 젊은 여성들은 대부분 양장 차림이었고 미니에 가까운 치마에 부츠를 신은 멋쟁이들도 보였다. 외국인 관광객들도 눈에 띄었다. 취재진은 외국인 관광객처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기념 촬영도 제지당하기 일쑤였다. 몰래 촬영하다 적발되면 곧바로 디지털 카메라를 빼앗아 해당 사진을 지웠다. 거리에는 곳곳에 공중전화 박스가 비치돼 있었다. 사람들이 줄지어 서서 기다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교차로에는 수신호를 하는 여성 교통보안원이 신호등을 대신했다. 출퇴근 시간대에 근무를 섰는데 통행 차량이 많지 않아 교통은 원활하게 이뤄졌다. 건널목에는 대부분 지하도가 연결돼 있어 보행자들은 지하도로 다녔다. 차량들은 오래된 일본 자동차들이 대부분이었다. 도요타, 닛산 등이었고 일본에서 바로 건너온 것이라서 오른쪽에 핸들이 달린 승용차도 많았다. 벤츠, 폭스바겐, BMW 같은 유럽 자동차도 많았다. 한국차와 미국차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연식이 오래된 탓인지 매연을 내뿜는 차량들이 많았다. 택시 캡을 단 흰색 택시도 드물게 보였다. 택시는 주로 외국인들이 이용했고 평양 시민들은 대부분 전기로 움직이는 전차식 버스를 이용했다.
북한의 밤은 칠흙이었다. 밤 10시 이후 평양은 상점과 음식점에서 전등을 한두개 켜놓고 손님을 기다릴뿐 다른 곳은 불이 꺼져 있었다. 밤 11시가 넘으면 거리의 차량은 통행조차 끊겼다. 가로수는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불을 밝힌 전구들로 장식돼있었지만 정상회담을 의식해 켜놓은 것으로 추정됐다. 그도 그럴 것이 고층 아파트에서도 불 꺼진 집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2007 남북정상회담 프레스센터는 평양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고려호텔 2층에 마련됐다. 고려호텔의 프레스센터는 통신, 통화, 통행의 '3통'이 단절된 장소였다. 남북측의 사전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 인터넷도 되지 않아 취재진이 들고간 노트북은 워드프로세서 기능으로만 사용됐다. 기자들의 호텔 밖 출입도 엄격히 통제됐다. 기사 송고는 서울 프레스센터와 연결된 '인포넷' 라인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 때와 달리 적어도 호텔 안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했다. 2000년 정상회담 때는 북측 안내원들이 취재 기자들을 철저히 통제했다. 2007년에는 호텔 지하 사우나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했고 헬스클럽과 탁구장도 개방했다. 원래는 유료 시설이지만 정상회담 취재진에게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했다. 하지만 호텔 밖 이동은 통제됐다. 김정일 위원장 관련 행사에서는 기자들의 접근 취재가 원천 봉쇄됐다.
2007 남북정상회담 취재단 구성은 시작부터 경합이 치열했다. 청와대 출입 언론사 수와 기자들은 늘어났으나 취재단은 여전히 50명으로 한정됐기 때문이다. 남과 북의 협의와 청와대 기자실 내부의 협의 절차를 통해 최종적으로 정상회담 취재단 구성이 확정됐다. 중앙기자실에서 통신사 기자 1명(연합뉴스), TV방송사 기자 6명(KBS 1명, MBC 1명, SBS 2명, MBN 1명, YTN 1명), 종합지 기자 10명(경향, 국민, 내일, 동아, 서울, 세계, 조선, 중앙, 한겨레, 한국), 경제지 기자 5명(매일경제, 머니투데이, 서울경제, 이데일리, 한국경제), 라디오방송 기자 1명(CBS), 영문지 1명(코리아타임스), 인터넷 신문 1명(프레시안)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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