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북녘의 동포들이여,목메어 불러도 대답없는 북녘의 형제자매들이여.소리쳐 불러보아도 아무 대답을 들을 수 없으니 우리들 가슴은 미어지기만 합니다』설날인 10일 낮12시 경기도 파주군 임진각 망배단에서 실향민 2백여명이 모여 망향경모제를 지내고 있었다.

동서화해의 국제정세에도 아랑곳없이 분단반세기를 눈앞에 둔 우리의 현실을 대변하는 듯 철조망 앞에 차려진 제상에는 매서운 삭풍으로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걸어서도 갈 수 있는 땅,새들도 자유로이 넘나드는 휴전선을 왜 우리 이산가족들은 오도가도 못하고 뼈저린 아픔만 겪어야 합니까』
통일여성안보회 김천혜자씨(52)가 「북한동포에게 띄우는 글」을 읽어 내려가자 설움에 북받친 실향민들의 흐느낌으로 제단주위는 이내 눈물바다가 됐다.

올해로 10년째 망향제를 주최한 통일경모회장 오훈칠씨(83)는 『10년 전만해도 저같은 실향민 1세들이 많이 나와 망향의 설움을 서로 달래곤 했다』며 『그러나 이젠 그 절반 정도가 북에 두고 온 혈육의 생사도 알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며 「무심한 세월」을 원망했다.또 제단앞 참배객 방명소에서 참배객을 맞고 있던 이정봉씨(82)는 『해가 갈수록 낯익은 얼굴들이 줄고 부모와 함께 오던 실향민 2세들도 부모가 돌아가시면 찾아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차례를 휴양지 콘도에서 지내는 요즘 세태에 비춰볼 때 남한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북에 있는 고향과 친척들의 얘기를 가슴에 새겨들지 않는다고 야속해 할 수만은 없지요』
이씨는 이산가족에 대한 우리사회의 관심이 갈수록 엷어져가는 것 같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1·4후퇴때 북에 여섯 형과 누나 한분을 두고 홀로 남하했다는 평남출신의 박인용씨(65)는 이산가족이 겪는 「분단의 아픔」을 직접 보여주기 위해 남한에서 낳은 세 아들과 며느리 손자등을 데리고 왔다고 말했다.

재작년 남북한의 「기본합의서」가 채택됐을 때 곧 고향땅을 밟을 수 있다는 설레임으로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고 털어놓은 박씨는 『남북한 위정자들이 이같은 실향민들의 절박한 심정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물끄러미 북녘하늘을 바라보았다.<조남규기자> 1994.2.10

 

신문기자 사회에서 '출판 기념회'라는 표현은 또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자신의 기명 기사가 처음으로 활자화되는 날,

동료 기자들에게 한 턱 내는 자리를 '출판 기념회를 갖는다'고 우스개삼아 얘기한다.

위의 기자 칼럼은 나의 '바이 라인'(기자 이름)이 달린 첫 기사다.

수습 기자는 '몇 명'이라고 세지 않고

'몇 개'로 세야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간' 대우를 받지 못했던 수습시절이었다.

경찰서에서 새우잠을 자며 혹독한 기자 훈련을 받던 수습 시절,

내 이름이 활자화된 신문을 받아들고

가슴이 벅차올랐던 기억이 새롭다.

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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