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D.C.에 새클러 미술관이 있습니다.
국립 스미소니언 박물관의 아시아관이랄 수 있지요.
1987년 아시아 예풀품들을 기증한
아서 M. 새클러를 기념해 설립한 박물관이랍니다.
이 박물관에는 한국이나 중국, 일본같은 동아시아 뿐 아니라
인도나 아랍 국가들의 예술품이 가득합니다.
문화재는 공유해야 한다는 새클러의 정신은 존경할만 하지만
석조 불상이 통째로 전시된 모습에선
문화재 약탈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립니다.
각설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새클러 미술관을 찾았습니다.
그 분야에 문외한인 저로서는 수 백년에서 수 천년의 세월을 견뎌온
예술품들을 실물로 확인한다는 데 의미를 둔 견학이었지요.
그런 정도의 가벼운 마음으로 미술관을 둘러보다
입구에 전시된 대형 설치 미술 작품과 맞닥뜨렸습니다.
실물 크기의 고깃배가 난파된 형태 그대로 복원된 모습입니다.
고깃배 주위로는
자기 그릇 조각이 수북이 깔려 있고요.
건성으로 따라 다니던 애들 눈에는
이 작품이 박물관 소품 정도로 보였던지,
'아빠는 휴지통도 찍을 것'이라면서 놀리더군요.
첫 느낌은 뭐랄까,
객지를 떠돌다
생각지도 못한 고향 사람을 만난 느낌이었습니다.
고향 인근의 어촌인 줄포나 곰소에서 흔히 봤던,
더 이상 고기 잡이용으로는 사용할 수 없어
갯벌에 내버려져 있던 폐선의 이미지.
고향집 장독대 옆에 촘촘히 박혀 있었던 깨진 사기 조각들.
가끔 좋은 음악이나 영화 속의 명 장면 등이 찡하게
와 닿을 때가 있는데 그 작품을 보면서 그런 느낌이었지요.
설치 미술은 아내의 사촌 오빠인
전수천씨의 부상을 계기로 관심을 갖게 됐는데
팸플릿을 보니,이 작품을 만든 중국 출신 채국강(蔡國强. 아래 사진)씨도
전씨와 마찬가지로 베니스 비엔날레를 통해
설치 미술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더군요.
폐선은 일본 어느 해변에 묻혀있던 것을 발굴해서 미국으로 옮겨왔고
자기 조각은 중국에서 실어왔다고 합니다.
채씨는 이 작품을 통해
'아시아 문화의 연대감'을 표현하려 했다고
팸플릿에 적혀 있었습니다.
중국의 자기와 일본의 배,
이 두가지 소재는
두 나라의 역사적 문화적 유대를 상징한다는군요.
배 안에 있어야 할 자기를 배 밖에 흩뿌려 놓은,
일종의 전도(顚倒)는
과거를 재구성해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려는
작가의 욕구를 반영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런 심오한 예술적 함의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작품의 주제-동아시아 문화의 상호 교류를 표현하려 했다는
대목은 난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뭔가 좀 허전하죠?
그 작품에는 중-일 문화 교류의 핵심적 가교 역할을 한
한국이 빠져 있었습니다.
물론 채씨는 일본에서 오래 활동한 분입니다.
작품에 작가의 개인적 체험이 반영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동아시아 문화의 연대감’이 작품의 주제라면,
최소한 한-중-일이 함께 어우러져야
채씨가 재창조하려 했다는 '역사'에
보다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요.
어떻든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 작품을 관람한 수 많은 미국인들은
동아시아 문화 교류의 중심 축이
중국과 일본이라는 인식을 굳힐 것입니다.
요즘 한국에선 독도 문제로 일본 성토 여론이 들끓고 있지만
워싱턴에서는 벚꽃 축제가 한창입니다.
포토맥 강변의 벚나무들은
1912년 당시 유키오 오자키 도쿄 시장이
워싱턴 D.C.에 3000 그루를 선물로 보낸
아라가와 강변의 벚나무라고 미 언론들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미 학계 일각에서는 아라가와 벚나무가 병충해로 죽자
일본이 후에 미국 풍토에 맞는 제주도산 벚나무를 다시 보냈다는
이른바 '한국 원산설'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어느 주장이 맞든,
올해로 93주년인 워싱턴 벚꽃 축제는 미국과 일본의
우호 관계를 상징하는 행사입니다.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은 미국 여인들의 화사한 얼굴이
미국과 일본의 밀월 관계를 반영하는 듯 합니다.
진주만 사건 당시 도끼를 들고나와 포토맥 강변의
벚나무 밑둥을 찍어내던 그 미국인들은
이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미국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은
일본 만화 영화를 보며 말을 배웁니다.
유치한 지적같지만
채씨의 설치 미술전은
일본 화장품 회사인 시세이도가 후원을 했더군요.
정말 미워만 할 수 없는 일본의 저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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