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에너지 정책에서 ‘파워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링에 오른 선수는 원전과 재생에너지. 누가 정책 판의 주도권을 쥘 것인지 경쟁이 치열하다. 애매한 무승부는 인정할 수 없다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진다.
체급만 놓고 보면 다윗과 골리앗이다. 당연히 원전이 골리앗이다. 출발부터 화려했다.
1978년 7월20일 우리나라 최초의 원전 ‘고리 1호기’가 건설된 부산 기장군 장안읍에서는 성대한 준공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은 “20세기 과학의 찬연한 등불이라고 할 수 있는 원자력발전소를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건설한 것은 조국 근대화와 민족 중흥의 도정에서 이룩한 하나의 기념탑”이라고 강조했다. 매년 전력수요가 20%씩 늘어나던 시절이었다. 월성 1호기, 고리 2·3·4호기가 차례로 가동되면서 불과 10년 만에 원전의 전력 생산 비중은 50%에 이른다.
지금은 원자로 24기(월성 1호기 포함) 22.5GW(기가와트)의 설비가 있다. 전 세계 6위 규모다. 단위면적당 밀집도로 따지면 세계 1위이고, 세계 10대 원전 중 3곳(고리·한울·한빛)이 한국에 있다. 한국의 원전산업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인력 양성이 있다. 최근 발간된 ‘2020 원자력산업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원자력 관련 학과는 서울대, 한양대, 카이스트(KAIST) 등 17곳에 설치돼 있고 2165명이 재학 중이다. 공공기관 경영공시 사이트 알리오에 등록된 한국수력원자력의 최근 1년치 외부 연구용역 계약금액은 147억원(건당 평균 5억7000만원)에 달한다.
재생에너지는 이제 걸음마를 뗀 수준이다. 1998년 제주 구좌읍과 2004년 경북 칠곡에서 각각 풍력과 태양광 발전이 첫 상업운전에 들어갔다. 2004년부터 국가 에너지통계에 잡혔으니 국내 재생에너지 역사는 채 20년이 되지 않았다. 문재인정부 기간 재생에너지 보급이 급증해 지난해 원전 설비용량을 따라잡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원전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준은 아니다. 한국에서 재생에너지 발전량은 원전의 4분의 1 정도다. 풍력·태양광 발전 비중은 세계 평균과도 한참 거리가 있다. 지난달 말 영국 기후에너지 싱크탱크 ‘엠버’의 ‘국제 전력 리뷰 2022’ 보고서에서 한국의 풍력·태양광 발전 비중은 102개국 중 45위로 페루, 도미니카공화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산업이 형성된 역사와 발전량, 세계 순위 모든 면에서 어떻게 파워게임이 가능할까 싶지만, 바로 이런 덩치 차이가 갈등의 시발점이다. 갈길 바쁜 재생에너지는 원자력에 길을 내주라 하고, 원자력은 당연히 누려온 반세기 기득권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다. 싸움을 부추긴 건 정치권이다. 문재인정부의 탈원전 선언은 원전업계에는 곧 선전포고였고, 에너지 문제는 곧바로 진영 갈등으로 포섭됐다.
지난 12일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새 기후·에너지 정책의 밑그림을 발표했다. 원전으로의 회귀가 핵심이다.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전 세계가 에너지 전환에 뛰어든 지금 한국에선 ‘다윗’ 재생에너지와 ‘골리앗’ 원전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세계일보는 갈 길 잃은 에너지 정책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는 ‘원전 vs 재생 파워게임을 넘어서’를 3회에 걸쳐 싣는다.
윤지로 기자 kornyap@segye.com
“원전 중심 발전 정책을 폐기하고 탈핵 시대로 가겠습니다.”
2017년 6월19일 고리원전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이 같은 말로 ‘탈원전’을 선언한 순간, 우리나라에서 에너지는 가장 첨예하고 치열한 갈등의 한복판으로 던져졌다. 당시 문 대통령은 신규 원전 건설 계획 백지화와 원전 설계수명 연장 불가 방침을 밝혔고, 그렇게 원자력을 들어낸 자리에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를 키우겠다고 선포했다.
이날 고리1호기의 ‘퇴역’을 지켜보던 원자력계 인사들은 문 대통령의 탈원전 선언에 ‘뺨을 맞은 듯’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는 후문이다. 국내 최초 상업 원전으로 40년 가까이 우리나라 전력 수요에 대응하며 경제성장을 뒷받침한 원자로의 마지막이었던 만큼 특히 원자력계 원로 중심으로 ‘그간의 노고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토로가 쏟아졌다는 것이다.
‘한국 원자력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인순(82) 전 한국원자력연구소장은 17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필이면 원전 앞에서 원자력인들을 모아놓고 탈원전을 외치는 게 얼마나 잔인한 일이냐는 겁니다. 원전이 얼마나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를 했는데, 문재인정부는 역대 정부 중 원자력인들을 가장 푸대접한 정부로 기록될 겁니다.”
당시 행사를 준비했던 한국수력원자력의 한 인사도 “자리에 계시던 원자력 1세대 선배들이 충격을 많이 받았다”며 “원자력에 몸담은 사람들은 다들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 일부는 그런 상황에 이른 데 대해 자책하기도 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취임 40일 만에 이뤄진 문 대통령의 탈원전 선언을 계기로 정부와 원자력계는 서로 등을 돌렸다. 문재인정부는 에너지 부문 의사결정 구조에서 원자력계 인사들을 차차 배제해나갔고, 원자력계는 속속 내려지는 정부 판단에 “전문성이 결여됐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한 에너지 전문가는 이렇게 토로했다.
“저는 노태우정부 때부터 에너지 정책을 짜는 민간위원회에 들어가 있었는데 2017년 문재인정부 출범하면서 전력수급기본계획, 천연가스수급계획 등 전문가그룹에서 모두 빠졌어요. 원자력을 죽일 수 없다는 주장을 계속 해 왔으니깐 낙인이 찍혔던 거 같아요.”
야당은 허탈감에 빠진 이들의 주장을 적극 끌어들였고 에너지 정책은 금세 정파성에 포위됐다. 퇴출 위기에 내몰린 원자력과 그 대안으로 선언된 재생에너지가 여야 갈등의 틀에 갇혀버린 것이다. 원자력과 재생에너지는 결국 에너지 정책을 꾸리는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할 ‘이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김선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부연구위원은 “에너지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해도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국민의힘을 지지하면 친원전, 더불어민주당은 반원전’하는 식으로 사실상 정치적 지지가 에너지 적합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돼버렸다”고 분석했다.
◆아무도 승리하지 못했다
이는 미래 에너지 전환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진통이었을까. 이 질문에 많은 정부기관·환경단체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에너지 부문 공공기관장을 지낸 한 인사는 “문재인정부가 괜히 ‘탈원전’이라는 말을 쓰는 바람에 곤경에 처한 것”이라며 “당시 원전을 그저 나쁜 것, 정의롭지 못한 전원으로만 치부하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 큰 고민 없이 탈원전이란 이름을 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문재인정부가 탈원전 선언 약 넉 달 뒤 내놓은 ‘에너지 전환 로드맵’에는 임기 내내 원전이 계속 늘어나 올해 28기로 정점을 찍은 뒤에야 줄어드는 것으로 계획돼 있었다. 그러다 보니 원자력의 발전량 비중(한국전력공사 집계)은 문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한 2017년 26.8%를 기록한 이후 2019년 25.7%, 2021년 27.4%, 올해 1∼2월 29.1%로 오르락내리락했다. 장다울 그린피스 정책전문위원은 “문 정부의 탈원전 계획을 따랐더라도 탄소중립 목표 시점인 2050년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원전 비중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가 될 것이었다“고 말했다.
더욱이 문 대통령 대선 공약인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은 2018년 공론화 과정에서 공사 재개로 결론이 나면서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자 신규 원전 공사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정치권과 원자력계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신한울 3·4호기 공사 재개를 공약하고 실제 추진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제32대 한국원자력학회장을 지낸 민병주 울산과학기술원 초빙교수는 “당시 탈원전 선언을 뒷받침한 게 결국 안전 문제였다는 걸 떠올려 보면,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설계가 보완된 신고리 5·6호기, 신한울 3·4호기가 기존 원전보다 훨씬 더 안전할 수밖에 없는데도 그걸 백지화한 건 결국 논리적인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다”고 평가했다.
에너지 문제가 진영 갈등으로 비화하면서 재생에너지는 제대로 몸집을 불릴 시간도 없이 정치권에서 몰매를 맞는 처지가 됐다. 2017년 하반기 제20대 국회 국정감사에서 당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최연혜 의원이 내놓은 “태양광 패널이 원자력발전소보다 독성 폐기물을 단위 에너지당 300배 이상 발생시킨다”는 주장은 그 대표적 사례다. 이는 미국의 한 환경단체 주장을 인용한 것으로, 국내에 보급된 태양광 모듈 대부분에 해당 사항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됐지만 여전히 태양광에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됐다. 이유진 녹색전환연구소 부소장은 “당시 국회에서 태양광 중금속 문제가 제기되면서 재생에너지에 대한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평가했다.
문재인정부는 몇 차례에 걸쳐 재생에너지 육성 계획을 내놨지만 실제 발전량은 집권 첫해 4.4%(연료전지·수소에너지 등이 포함된 신재생에너지 기준)이던 데서 4년 만인 지난해 6.8%로 소폭 상승했을 뿐이다. 지난해 정부가 2030년 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발표하며 신재생에너지 비중 목표를 30%까지 끌어올린 걸 고려하면 그 성과가 더 미진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이념’으로부터 에너지를 해방하라
제20대 대선에서 정권 탈환에 나선 대선주자들이 이런 상황을 전략적으로 활용한 건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던 최재형 의원은 정치 입문 자체가 애초 감사원장 시절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결정에 대한 감사를 두고 정부와 갈등을 빚은 게 계기가 됐다. 윤 당선인은 지난해 대선 출마 선언 6일 만에 공개 일정으로 탈원전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해 온 원자력계의 대표 인사인 주한규 서울대 교수(원자핵공학과)를 만났다. 본선에 올라서는 경북 울진군 신한울 3·4호기 건설 중단 현장을 찾아 원자력 공약을 발표했다.
결국 이런 행보의 자장 안에서 대통령 당선 이후 국정운영 방향까지 짜이고 있는 상황이다. 당장 인수위에 소속돼 활동 중인 에너지 전문가들의 면면을 보면 ‘탈탈원전’의 뜻이 강하게 읽힌다. 인수위가 에너지 전문가로 공개한 인사 중 관료를 제외하면 박주헌 동덕여대 교수(경제학), 정용훈 카이스트 교수(원자력 및 양자공학), 김지희 한국원자력연구원 선임연구원이 포함됐다. 박 교수와 정 교수는 탈원전 정책 비판을 주도해온 교수단체인 ‘에너지정책 합리화를 추구하는 교수협의회’ 소속이다.
인수위가 지난 12일 탄소중립 정책방향을 발표하면서 기후·에너지팀장을 맡고 있다고 공개한 김상협 상임기획위원의 경우도 이명박정부 대통령실 녹색성장기획관을 지낸 인물이다. 이 자리에서 인수위는 ‘재생에너지와 원전의 조화’를 강조했다. 그러나 사실상 한정된 전력량을 둘러싼 두 전원 간 ‘제로섬 게임’이 될 확률이 높다. 이미 인수위 경제2분과는 최근 새만금개발청 업무보고에서 “근본적으로 신재생에너지 사업을 엄밀히 평가해 그 필요성과 적정성을 점검해보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더욱이 현시점에서 인수위 내에 재생에너지를 대변할 인사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원전의 압도적 승리’가 전망된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원전을 늘리려고 할 거고 그럼 다른 전원이 비중을 줄여야 하니 신재생에너지 보급 목표를 낮추려 할 겁니다. 인수위가 태양광 보급 등에 대한 점검 의사를 계속 밝히고 있는 만큼 재생에너지 산업에 대한 조정도 진행될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원전과 재생에너지 간) 갈등이 더 첨예해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에너지정책학과 교수)
이런 우려를 불식하고 두 전원 간 소모적 갈등을 끝장내기 위해서는 에너지 정책을 이념의 틀에서 해방시키는 정치적 리더십이 시급해보인다. 노동석 연구위원은 “에너지가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순간 망한다”며 “에너지 믹스를 결정하는 우리나라 구조는 정치가 관료를, 관료는 전문가를 지배하는 식으로 구성돼 있다. 그 사슬을 끊어내지 못하면 에너지 정책이 엉망진창이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문재인정부 시절 관련 공공기관장을 지낸 인사는 “에너지가 정권에 따라 1∼2년 내로 왔다 갔다 하면 수급 측면에서도 굉장히 불안한 상태를 야기할 수 있다”며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장기 목표에 여야가 합의하고 그 틀 안에서 정책이 운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너지 관련 연구원장을 지낸 다른 대학교수도 “지금은 많이 잊혔지만 이명박·박근혜정부 때 원전을 둘러싼 일방통행식 의사결정이 문제가 돼 원자력에 대한 불신이 확산했고, 그 여론을 업고 문재인정부가 탈원전을 선언한 것이었다”며 “국익을 위해 에너지 관련 각 그룹의 의견을 충실하게 청취하고 비빔밥처럼 버무릴 수 있는 리더십이 정말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원전은 폐기물·재생은 기상변수 ‘발목’… “독식 어려운 구조”
#1.‘골리앗’ 원전은 뒤처리도 어렵다
전국에 부슬비가 내린 지난 14일 경북 경주. 신경주역에서 토함산을 넘어 동해에 다다르니 어디서 많이 본 돔이 보인다. 월성 원자력발전소다. 차로 달린 지 1시간, 발전소를 지나 도착한 목적지는 입구부터 경비가 삼엄하다. 이곳은 원자력환경공단이 운영하는 ‘경주 중저준위 방폐물처분시설’이다. 국내 24개 원자로에서 나오는 ‘폐기물’을 처리하는 유일한 곳이다.
핵연료로 전기를 만들고 나면 다양한 폐기물이 나오는데, 방사능 농도에 따라 고준위와 중준위, 저준위, 극저준위로 나뉜다. 방사능 농도가 상대적으로 낮다고 해도 방사능은 방사능이다. 이곳에 폐기되려면 우선 원자력발전소에서 예비검사를 받고, 처분 시설에 와서 원자력환경공단과 원자력안전기술원이 각각 실시하는 검사를 모두 통과해야 한다.
드럼에 담긴 폐기물은 10㎝ 두께 콘크리트에 밀봉된 상태로 지하 동굴에 영구 매장된다. 동굴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는 1층, B17, B21 이렇게 세 개의 버튼이 있었다. 폐기물이 내리는 곳은 B17, 지하 170m란 뜻이다. 폐기물은 두께가 1∼1.6m나 되는 콘크리트 사일로(저장고)에 저장된다. 일반인 출입이 허용되는 마지막 지점에 6개의 사일로를 보여주는 모니터가 설치돼 있는데 유독 5번 사일로에만 폐기물이 쌓여있었다.
“발전소마다 각기 다른 사일로에 폐기물을 보관합니다. 5번은 월성 원전에서 가져온 거예요. 월성은 바로 옆이라 차로 옮겨올 수 있는데 멀리 있는 원전은 배로 수송하거든요? 그러려면 미리 지자체 등에 신고를 하는데 어민분들이 싫어합니다. 방사능 쓰레기 들어온다고요. 그래서 다른 사일로는 아직 많이 안 찼어요.”
원자력환경공단 관계자가 설명했다. 중·저준위 폐기물 드럼 주변의 방사능 농도는 시간당 1.692µ㏜(마이크로시버트)로 X레이 방사능 농도에 한참 못미친다. 그런데도 실어나르는 것조차 쉽지 않은 현실은 방폐물 처분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폐기물은 원전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원전 밀집도 세계 1위인 한국에서는 더 심각히 다뤄져야 할 문제지만, 국내에선 중·저준위 폐기물만 2015년에 이곳에 처분되기 시작했을 뿐 고준위는 처리 방향성도 잡지 못한 상태다.
전 세계적으로 사용하고 난 핵 연료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처리한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폐연료봉에서 쓸모있는 플루토늄을 뽑아 다시 쓰는 재처리 방식을, 그 외 대부분의 나라는 영구 처분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재처리를 염두에 둔 건 ‘사용 후 핵연료’, 처분을 앞둔 것을 ‘고준위 핵폐기물’이라 부른다.
한국은 재처리를 하기 어려운 나라다. 김경수 사용후핵연료관리 핵심기술개발사업단 단장은 “플루토늄은 무기로 전용될 수 있어 한미원자력협정에 따라 미국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미국은 일부 연구 목적 외에는 허용하지 않고 있다”며 “미국도 재처리를 해 오다 핵확산금지조약을 주도하면서 처분으로 방향을 바꿨다”고 전했다. 미국이 동의한다 해도 재처리는 기술적으로 위험해 영구 처분장을 찾는 것 못지 않게 부지 선정이 어려울 수 있다.
그런데도 지난 40여년간 발생한 폐연료봉은 모두 사용 후 핵연료라는 이름으로 발전소 안에서 보관 중이다. 폐연료봉에 ‘폐기물’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중간저장시설과 영구처분장을 마련해야 하는데 누구도 5년 임기 안에 총대를 매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다. 폭탄 돌리기다.
문제는 폭탄에 붙은 불이 심지 끝까지 타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월성 원전이 99%까지 들어찬 맥스터(임시저장시설)를 증설해 간신히 급한 불을 껐지만, 10년 내로 고리·한빛원전부터 포화에 이르게 된다.
지난해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이 2차까지 나왔지만 이 계획을 이행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없다. 계획 추진을 위해 발의된 특별법은 지난 국회에선 회기 종료로 자동폐기됐고, 이번 국회에선 제대로 논의도 되지 못한 채 계류 중이다. 익명을 요청한 한 원자력 전문가는 이렇게 답답함을 토로했다.
“폐기물은 원자력을 찬성하는 쪽도, 반대하는 쪽도 모두 싫어하는 이슈입니다. 찬핵 쪽에선 폐기물이 아킬레스건이니까 부각되는 걸 싫어하고, 탈핵 쪽에선 폐기물이 잘 처리되면 반대 논리 하나가 힘을 잃으니까 싫어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후세대로 짐을 떠넘길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2.‘다윗’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 4%에도 잡음이
자연 그대로의 바람, 햇볕, 물을 이용해 에너지를 만드는 재생에너지는 ‘청정성’을 가장 큰 장점으로 꼽는다. 그러나 폐기물 발생이 없더라도 재생에너지 또한 넘어야 할 과제가 산적했다. 기상 여건에 따른 간헐성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에너지저장기술(ESS), 농민과 어민 등의 반대와 환경 훼손 우려로 인한 입지 선정 갈등 등이 여전하다.
최근에는 대규모 태양광 패널이 들어서면서 생산된 전기를 사용하기까지 변전소, 송전망, 송전탑 등 각종 설비 설치도 새로운 문제로 떠올랐다. 전남 무안군이 대표적이다. 무안군 현경면에는 지난해부터 주변 재생에너지 발전기에서 생산된 전력을 전력망에 잇기 위한 송전설비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지난 14일 나주역에서 무안으로 가는 길, 듬성듬성 눈에 띄는가 싶던 전봇대가 점점 빈번하게 나타났다. 희뿌연 하늘에는 거미줄같은 굵은 선들이 뒤엉켜 있었다. 전선이다. 무안에는 2003년 들어선 운남변전소에 더해 재생에너지 민간사업자들이 허가받은 3개 변전소가 추가 신축 중이거나 건설을 마쳤다.
송건용씨 집에서는 변전소 네 곳이 한 눈에 보인다. 대다수 군민이 농민인 이곳에서 송씨 역시 양파 농사를 짓는 농민이다. 송씨는 지난해 12월 구성된 주민대책위원회 총무를 맡고 있기도 하다.
“동네가 이렇게 된 지가 얼마 안 됐습니다. 주변에 태양광이나 풍력발전소가 늘어나며 변전소가 들어서기 시작한 건 3∼4년 전부터였습니다. 지난 겨울에 작업해 지금은 180m 정도 깊이 땅 속에 굵은 전선들이 묻혀 있어요. 변전소나 송전탑 바로 옆에는 사람 사는 집이랑 논밭이 있고 땅에 묻힌 선로는 마을 도로와 농지 아래를 지납니다. 사전에 한국전력이나 민간사업자들한테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은 적은 없어요. 법적으로 근린생활시설인 공간에 변전소를 짓겠다고 지자체 허가를 받아 아무 문제도 안 된다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 계속 살았고 앞으로도 30년 넘게 살 사람들이잖아요.”
우리나라 송전용 변전소가 사용하는 송전 전압량은 154㎸이다. 무안군에는 이런 변전소 네 곳이 붙어있다. 전기 선로를 땅 밑에 묻는 ‘지중화’를 하면 전자파가 다소 줄어든다는 말도 있으나 변전소와 송전선이 몰려있는 지역 주민들은 전자파 노출을 우려한다. 지가가 떨어지고 재산권 행사가 어려운 점은 차후의 문제다.
무안군 농지의 절반 이상은 지역 농민이 아닌 외지인이 주인이다. 발전사업자들은 외지인인 지주에게 싸게 땅을 구입해 많게는 수십만평에 태양광 패널을 깔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기는 송전선을 타고 광주, 서울 등으로 흘러간다. 농지를 내주고 변전소와 송전탑을 지척에 끼고 살아야 하는 주민과 이익을 공유하자는 이야기는 몇 년전부터 나왔지만 지지부진하다. 전국에서 재생에너지 개발이익을 지역주민과 공유하도록 조례로 제정한 지역은 전남 신안군이 유일하다.
“재생에너지 확대에는 절대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력망을 확보하고 시설을 설치하는 방법이 잘못됐어요. 돈벌이를 위해 재생에너지를 놓는 사업자들이 있어서 정권과 관계없이 이런 갈등은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재생에너지 설치 후를 생각했어야 합니다. 변전소 기준 거리를 측정해 가까운 주민의 이주를 돕거나 이곳을 재생에너지 마을로 지정해 지역 사람들은 그 에너지를 쓸 수 있게 하는 조치가 있었어야 합니다. 재생에너지 설비가 들어서는 시골에서는 80세 넘은 노인들을 데리고 매일 싸울 수도 없습니다.”
에너지원을 둘러싸고 진영 갈등이 첨예하지만 우리나라는 한쪽이 에너지판을 독식하기 어려운 구조다. 원자로를 24기나 보유한 나라에서 새 원전을 짓고, 송전탑을 세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고준위 핵폐기물 처분은 시작도 못했다. 태양광과 풍력은 전체 전력의 4%를 담당하고 있을 뿐인데도 갈등의 축으로 떠올랐다. 지역사회 갈등과 기술적 한계를 넘어 믿을 만한 에너지원으로 자리잡기까지 얼마나 걸릴 지 알 수 없다. 원전과 재생에너지의 파워게임이 덧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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