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시대, 진짜 적은 누구인가.’
원전 강화를 골자로 에너지 정책을 재편하고자 하는 새 정부는 당장 이 질문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문재인정부는 탈원전, 재생에너지 확대를 정책 기조로 삼았다. 2016년과 지난해를 비교하면 원자력 발전 비중(한국전력 전력통계월보 기준)은 2.6%포인트 줄고, 신재생에너지의 비중은 2.7%포인트 늘었다. 이 기간 석탄과 가스 발전은 어땠을까. 62%에서 63.5%로 1.5%포인트 늘었다. 현 정부는 “앞선 정부에서부터 진행돼 온 석탄화력발전소 영향”이라고 하지만, 숫자만 놓고 보면 ‘신재생에너지가 원전 몫을 빼앗고, 석탄 발전은 줄이지도 못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반대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측은 지금까지 탈원전 정책은 분명히 했지만, 화력발전 추가 감축 여부는 밝히지 않았다. 현 정부와 마찬가지로 “이미 공사 진행 중인 발전소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이번 정부에서도 화석연료 감축은 그대로 놔둔 채 재생에너지 발전 계획분을 원전이 도로 가져올 판이다.
에너지 전환을 머리싸고 고민하게 만든 기후변화의 ‘주적’인 화석연료는 쏙 빠진 채 원전과 재생에너지 간 ‘제로섬 게임’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과연 이게 최선일까.
에너지·환경정책 싱크탱크인 사단법인 넥스트가 19일 발간하는 ‘차기 정부의 기후·에너지 정책에 대한 평가와 제언’ 보고서는 이 물음의 답을 구할 수 있는 힌트를 제공한다. 넥스트는 양적 방법론과 데이터 분석에 기반을 둔 연구를 통해 2050년 대한민국의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최적 로드맵을 제시하기 위해 2020년 설립됐다.
넥스트 보고서는 새 정부가 원전을 늘리는 만큼 추가 확보한 발전량으로 신재생에너지가 아닌 석탄 발전을 대체한다면 우리나라의 발전부문 온실가스 배출량을 현 목표치보다 30% 이상 줄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새 정부 전원믹스, 온실가스 배출량 큰 차이 없을 듯”
현재 2030 온실가스 감축목표(NDC)에 따르면 2030년 기준으로 원자력은 24%, 석탄 22%, 액화천연가스(LNG) 20%, 신재생에너지 30%, 기타 5%로 전원이 구성될 예정이다. 이 계획에 따른 발전 부문 온실가스 배출량은 총 1억4990만tCO₂eq(이산화탄소 환산)로 집계됐다. 2019년 발전 부문 온실가스 배출량(2억4870만tCO₂eq)보다 39.7% 낮다.
윤석열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최근 2030 NDC에 따른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목표를 준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윤 당선인이 문재인정부의 탈원전 선언 폐기를 공약하면서 원전 확대를 공언한 만큼 기존 2030년 전원믹스(전원별 구성 비율) 계획은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인수위 측은 구체적인 전원믹스를 공개하지 않았지만 2030년 원전 비중이 30∼35% 수준으로 늘어날 것이란 게 중론이다.
넥스트는 새 정부의 2030년 전원믹스에서 원자력 비중이 기존 대비 최대 10%포인트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윤 당선인의 대통령 임기 중 설계수명에 가까운 원전들(고리2∼4호기·한빛1∼2호기·월성2∼4호기·한울1∼2호기)이 계속 가동될 경우 2030년 전체 발전 용량은 기존 NDC에서 8.5GW 더 늘어난 28.9GW에 이를 전망이다. 윤 당선인 취임 이후 건설이 재개될 것으로 보이는 신한울3·4호기의 경우 국내 평균 6.4년인 원전 공사기간 등을 고려할 때 2030년 이전에 운전이 시작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봤다.
이렇게 원자력 비중이 확대된 만큼 신재생에너지 비중은 문 정부가 계획한 30%에서 20%로 낮아질 가능성이 높다는 게 넥스트의 관측이다. 윤 당선인은 발전 부문 화석연료(석탄·가스) 비중을 임기 내 40%대까지 낮추겠다고 공약한 바 있는데, 이는 기존 2030 NDC의 화석연료 비중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전망을 따를 경우 발전 부문 온실가스 배출량은 총 1억4920만tCO₂eq로 집계됐다. 2030 NDC보다 겨우 0.5%(70만tCO₂eq) 줄어든 수치다. 원전과 재생에너지의 파워게임이 온실가스 감축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방증이다.
◆원전으로 석탄 대체하면 온실가스 31% 더 준다
보고서는 새 정부의 원전 확대 기조를 전제로 한 ‘제3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문재인정부가 목표로 정한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유지하되, 원전을 늘린 만큼 석탄 비중을 대체해나가는 안이다.
이런 착안에 따라 2030년 전원믹스 계획을 새로 짜게 되면 석탄 비중을 2030 NDC나 새 정부안 대비 10%포인트 줄인 12%로 잡을 수 있게 돼 가스(20%)를 더한 전체 화석연료 비중이 32%까지 낮아질 수 있다. 원전 비중은 새 정부안과 같은 34%, 신재생에너지는 2030 NDC 내 목표치가 그대로 이어져 30%로 구성된다.
이런 원전의 석탄 대체안에 따라 예상되는 발전 부문 온실가스 배출량은 총 1억330만tCO₂eq로, 새 정부안 대비 31.1%(4660만tCO₂eq)나 적은 양이다. 모두 석탄 비중을 줄인 데 따라 확보한 온실가스 감축분이다. 이 분량은 2030 NDC에 따라 우리나라가 산업 부문에서 줄여야 하는 온실가스 배출량(3790만tCO₂eq)보다 23.0%나 많은 수치다. 산업을 포함한 발전·건물·수송·농축수산·폐기물 등 전 부문에서 우리나라가 목표로 삼은 감축분(2억9100만tCO₂eq)과 비교해도 16.0% 수준으로 상당한 양이다.
보고서는 이런 분석을 토대로 “차기 정부가 기후변화 심각성에 공감한다면 원전이 재생에너지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화석연료를 대체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지적했다. 더욱이 실제 파리기후변화협약 목표인 지구 온도 1.5도 이내 상승을 실현하려면 기존 2030 NDC 계획상 온실가스 배출량(4억3660만tCO₂eq)보다 18.0%(7872만tCO₂eq) 더 줄일 필요가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만큼 원전의 석탄 대체안은 기후위기 대응 차원에서 필수적인 수단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최근 승인한 ‘제6차 평가보고서 제3실무그룹 보고서’를 통해 지구 온도 상승 폭의 1.5도 제한을 위해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9년(우리나라 기준 7억137만tCO₂eq) 대비 43%(〃 3억158만tCO₂eq) 이상 줄여야 한다고 경고했다.
에너지 정책의 목표가 ‘기후위기 대응’이라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명확하다. 원전과 재생에너지의 힘 겨루기가 아니라 ‘어떻게 화석연료를 더 줄일 수 있을까’에 정책과 연구, 예산을 집중해야 한다. 보고서는 “우리 사회가 원전과 재생에너지 간 정치적 논쟁에 집중하기보다는 원전·재생에너지 같은 경직성 전원의 비중이 높은 전력계통을 어떻게 운영해나갈지, 전통적인 화석연료 발전원 없이도 전력계통 안정성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종합적 고찰에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공급 조절 힘든 원전·재생… ESS, 공존 대안 부상
영국이 원전 비중을 늘리기로 발표했다. 영국 정부가 지난 7일 발표한 에너지 안보 전략은 ‘원전이 유일하게 신뢰할 만하고, 같은 크기의 부지에서 태양광발전의 수백 배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저탄소 전원’이라고 명시했다. 보리스 존슨 총리는 인사말에서 “무궁무진한 바람과 햇빛을 자원으로 이용하겠다”며 “안전하고 깨끗하고 가격이 적절한 원전도 포용하겠다”고 밝혔다.
재생에너지와 원전은 많은 면에서 대척점에 있지만, 공통점도 있다. 둘 다 경직성 전원이란 점이다. 마음대로 발전량을 조절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미 전기가 충분해도 햇빛이나 바람을 줄여 전기 생산량을 억지로 줄일 수 없고, 원자로도 일단 발전을 시작하면 출력을 제한하기 힘들다. 그래서 재생에너지와 원전은 동시에 많이 늘릴 수 없다고 여겨진다. 수요보다 너무 많은 양의 전력이 송전망에 공급되면 전압이 너무 높아지고 계통 안정성이 떨어진다. 최악의 경우 블랙아웃이 될 수도 있다. 여름철 태양광이나 제주도 풍력발전을 일부러 끊었다는 말 또한 화석연료발전과 원전으로 이미 전력 공급량이 충분한 상황에서 재생에너지 생산량을 조절하지 못하니 아예 꺼버린 것이다.
그럼 재생에너지와 원전을 같이 늘리겠다는 영국처럼, 재생에너지와 원전은 공존할 수 있을까.
에너지·환경정책 싱크탱크 사단법인 넥스트 대표인 김승완 충남대 교수(전기공학과)는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김 교수가 진행 중인 연구에 따르면 2030년 기준 전원믹스(전원별 구성 비율) 방안에 따라 모의 시험한 결과, ESS(에너지저장장치)를 활용하면 현재보다 원전과 재생에너지를 모두 늘릴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넥스트가 ‘차기 정부의 기후·에너지 정책에 대한 평가와 제언’ 보고서에서 제안한 원전과 신재생에너지가 공존하는 시나리오(원전 34%, 재생에너지 30%)로 전원믹스를 구성하려면 ESS 용량은 18.1GW(125.1GWh) 늘어야 한다. 이번 연구는 원전 비중을 5% 늘릴 경우 ESS 용량이 약 3∼4GW(20∼25GWh)씩 증가한다고 전제했다.
2030년까지 가는 중간 단계로 원전 30%, 재생에너지 25%, 석탄 15% 그리고 나머지 30%는 액화천연가스(LNG)와 기타로 발전할 경우 ESS 필요용량은 7.1GW(35.4GWh)로 예측됐다.
김 교수는 “아직 연구 중인 단계로 원전과 신재생에너지 비중의 동시 상향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보기에는 이르다고 판단한다”며 “ESS에 충분히 투자하면 합리적으로 조정이 가능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경직성 전원인 원전과 재생에너지가 같이 늘어나는 건 힘들다는 의견도 있다. 전영환 홍익대 교수(전기공학)는 “기본적으로 재생에너지와 원자력 두 전원은 공존하기 힘들다고 본다”며 “지금과 같은 대형원전으로는 불가능하다. 대형원전 건설을 중단하고 작고 유연한 형태의 원전이 만들어져야 한다. 소형모듈원자로(SMR)든 뭐든 출력 조절이 쉬운 원전이 들어와야 한다”고 했다.
원전과 재생에너지의 ‘불편한 동거’가 영국에서도 뜨거운 논쟁거리일까. 강해나 주한영국대사관 기후·에너지 담당관은 “영국은 워낙 연안지역 풍력발전을 키워서 원전과 같이 늘리기 어렵다는, 공존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그렇게 많지 않다”고 전했다. 강 담당관은 “원전은 대규모이고 비용도 많이 드는 반면, 재생에너지는 소규모로 분산된 에너지로 같이 늘리기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는 게 대체적인 의견 같다”며 “영국 정부도 에너지 안보 전략 보고서에 원전을 24GW 늘리겠다고 했는데, 풍력발전 등 다른 에너지원도 동시에 늘린다고 밝혔다”고 설명했다.
환경팀=윤지로·김승환·박유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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