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는 독재와 정경유착 같은 후진적 문화를 개선해왔지만 대화와 타협을 통한 협력의 문화를 정착시키지 못했다. 한국 정치의 적대적 대립 문화는 정치 양극화 현상을 심화시키고 지역주의를 고착시켰을 뿐 아니라 사회 각 분야의 갈등을 재생산해왔다. 이런 갈등 구도를 넘어서 상대 진영을 협치의 대상으로 보고 사안별로 공조해야만 중진국의 덫에 걸린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오는 5월 출범하는 윤석열정부는 2024년 총선까지 ‘여소야대’ 속에서 주요 국정 과제를 추진해 나가야 한다. 그것도 180석에 육박하는 거대 야당이다. 협치에 실패하면 새 정부는 국정 과제 이행과 민생 법안 처리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정치 선진화를 위해서는 야당과의 협력 정치, 연합 정치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지적이다.

◆신뢰와 ‘협치’ 관행 쌓아가야

국민의힘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대선 직전 안철수 인수위원장과의 후보 단일화를 통해 김대중·김종필(DJP) 공동정부 이후 두 번째 연합 정치(연정) 실험에 나섰다. 윤 당선인과 안철수 인수위 위원장은 대선 후보 시절 차별화된 공약을 제시하며 선거 캠페인을 펼쳤다. 합당을 전제로 한 단일화여서 정당들이 각자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사안별로 손을 잡는 독일식 연정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안 위원장이 정권 인수위 단계부터 참여해 국정 기조를 설계한다는 점에서 실질적으로 연정의 효과를 낼 수 있다.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한국 정치는 노선이 다른 정치 세력이 서로 다른 정책을 맞교환하거나 비슷한 정책을 타협하는 협치 사례를 만든다는 의미가 있다. 윤석열정부가 안 위원장에게 어떤 역할을 맡길지, 안 위원장이 어느 정도의 정치적 역량을 발휘할지에 따라 윤·안 협치의 수준과 범위가 결정될 것으로 전망된다.

윤석열정부의 또 다른 협치 대상은 입법권을 장악한 제1야당 더불어민주당이다.

우리와 비슷하게 거대 양당이 경쟁하는 대통령제 국가 미국은 대통령이 직접 의원들을 맨투맨으로 접촉하며 협치를 시도한다. 미국 정치도 과거와 달리 양극화 현상이 심해져서 협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대통령과 의원들의 소통은 활발하다.

한국 정치는 이런 방식의 협치 문화에 익숙지 않다. 무엇보다 주요 사안은 당론으로 정해 의원들의 소신 투표는 원천 봉쇄돼 있다. 미국 의회처럼 의원들이 소신에 따라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는 ‘교차 투표’(크로스보팅)를 허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또한 미국은 공직 선거 후보를 상향식으로 공천하고 있지만 우리는 당이 공천 과정에 개입하는 경우가 많다. 의원들이 당론을 거스르기 힘든 구조인 셈이다. 협치를 ‘정치 공작’으로 매도하는 문화도 여전하다. 상대를 적으로 보는 오랜 대결 정치의 역사 속에서 여당과 손잡은 야당 의원과 정당은 ‘배신자’, ‘사쿠라당’(어용 정당)으로 폄하되기 일쑤다.

2014년 세월호 진상조사위 협상 당시 여야는 진상조사위에 기소권을 부여하는 문제를 두고 대립하면서 석 달 넘게 표류했다. 박영선 새정치연합 원내대표는 당내 강경파를 설득하지 못해 합의안을 두 차례나 뒤집었고,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청와대의 ‘기소권 불가’ 방침만 고수했다. 석 달 넘게 표류한 끝에 타결된 최종안은 2차 협상안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타협하면 배신자’라는 후진적 정치 프레임이 국회를 공전시킨 셈이다.

대통령이 야당 의원을 총리나 장관으로 입각시키려 하거나 법안 등을 놓고 개별 설득에 나서면 ‘공작 정치’라는 야당의 반발에 직면하곤 했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 김효석 의원에게 입각을 제의했다가 ‘야합’이라는 공세에 시달렸다. 윤석열정부 인수위 내에서도 통합 차원에서 상대당인 민주당 출신 인사들이 총리 후보로 거론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통화에서 “여소야대는 협치를 위한 ‘정치적 현실’이나 의심과 배신, 혐오까지 있는 ‘정치적 문화’는 연정과 협치를 가로막는다”며 “원론적이지만 상대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선 양당(국민의힘, 민주당) 대표들과 대통령의 의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장성철 대구카톨릭대학교 교수는 “현재 상태로는 여야 모두 협치 의지가 있어도 당내 강경파들의 반발 때문에 할 수 없다”며 “작더라도 조그마한 합의를 먼저 시작해서 양쪽의 신뢰감을 쌓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협치 위한 제도 개선도 필요

정치 대결 문화를 만들어낸 요인 중 하나로는 ‘승자독식제’인 현행 선거법이 거론된다. 우리가 채택한 소선거구제는 1개 선거구에서 1명만 당선되는 단순다수대표제다. ‘결선투표제’ 없는 대통령 선거도 그렇다. 승자가 독식하는 구조이다 보니 선거 과정부터 사생결단식의 대결이 펼쳐지고 선거가 끝난 뒤에도 대화와 협치가 들어설 공간이 없다는 지적이다. 낙선 후보에게 던진 유권자의 표가 통째로 사표(死票)가 되다 보니 결과적으로 소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치 세력이 형성되지 않고 거대 양당이 적대적으로 공생하는 기형적 정치 구도를 만들어내게 된다. 이는 지역별로 특정 정당이 의석을 싹쓸이하는 현상을 낳아 지역주의를 고착화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재작년 4월 치러진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지역구에서 전체 득표수의 49.9%에 해당하는 1434만여표를 얻었다. 제1야당이었던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은 전체의 41.4%에 해당하는 1191만여표를 얻었다. 두 당 간 득표 격차는 8.5%포인트, 243만여표 정도였다. 하지만 민주당은 전체 지역구 의석(253석)의 64.4%인 163석을 차지하는 대승을 거뒀다. 통합당은 33.2%(84석)에 그쳤다. 8.5%포인트였던 지지율 격차가 의석수에서는 31.2%포인트로 확대됐다. 한 선거구에서 2명 이상의 의원을 뽑는 중·대선거구제도나, 대선에서 과반 득표자가 안 나올 경우 1, 2위 후보가 다시 승부를 펼치는 결선투표제 등을 통해 정파 간 연합정치를 제도화하자는 지적이 끊임없이 나오는 이유다. 대선 결선투표제는 항상 과반수 지지를 받는 당선인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정권의 정통성이 강화되는 장점도 있다.

정치권에서는 승자독식 선거제 개선을 위한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때마다 정치적 유불리만 계산하다 흐지부지되곤 했다.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등이 손잡고 정당 득표율에 연동해 의석을 배정해 승자독식을 완화하자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됐지만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이 배제된 채 만들어진 불완전한 합의였다. 2020년 총선 과정에서 이 제도를 무력화하는 위성정당이 만들어지면서 이마저도 실현되지 못했다. 이내영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제도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선거제도 개편”이라면서 “연동형 비례제도를 제대로 하면 되고 그게 어려우면 중·대선거구제도를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선거제도 개편과 관련해선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도 대선 TV토론 과정에서 “국민들의 대표성이 제대로 보장되는 중·대선거구제를 오랫동안 선호해왔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은 최근 제3정당이 기초의회에 입성할 수 있도록 기초의원 선거구에서 최소 3명을 선출하고, 4인 이상을 선출하는 경우 거대 양당에 유리한 ‘선거구 쪼개기’를 금지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윤 당선인이 이 법안에 힘을 실어주면서 민주당과의 협치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국민의힘 정병국 전 의원은 통화에서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근본적 구조 변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개헌과 더불어 어느 당도 ‘절대적인 1당’이 되지 않도록 하는 방향으로 선거제도를 개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회 운영의 실질적 주체인 교섭단체 요건을 완화하자는 목소리도 높다. 현행 국회법은 의석 20석 이상인 교섭단체들이 본회의 개최 등 국회 운영을 좌지우지하도록 하고 있다. 국민 세금으로 지원되는 정당보조금의 50%를 교섭단체에게 배분한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교섭단체 의석 수를 줄이는 대신 교섭단체에 부여하는 세금 혜택이나 정책연구위원 배분과 같은 특혜를 없애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고 조언했다.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도 오랜 정치개혁 주제였지만 지금까지 실현되지 않고 있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는 “3당, 4당이 나오려면 비례대표를 늘려야 하는데 지방 지역구 의원들은 의석수 하나를 줄이는 것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말했다.

◆독일의 연합정치
이명박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김황식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 등은 우리 정치도 이제 정당 간 연합정치를 시도해볼 때가 됐다고 말한다. 보수와 진보의 대결 정치, 세대별 대결 구도로는 북한 비핵화와 노동·교육·규제 개혁 등 첨예한 갈등 현안을 해결할 수 없는 만큼 동·서독 통일과 노동개혁 같은 난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연정을 통해 초당적 추진력을 확보한 독일 정치의 사례를 참고하자는 것이다.

독일은 건국의 아버지인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기민당)부터 지난해 말 총리가 된 올라프 숄츠(사민당)에 이르기까지 연정을 통해 협치를 꾀하고 있다. 이 중 우파를 대표하는 기민당과 좌파를 대표하는 사민당이 손을 잡는 ‘대연정’만 해도 4차례나 된다. 대연정은 우리 정치에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연합정부를 구성하는 파격적인 정부 운영 행태다.

독일 연정의 대표적 성공 사례는 ‘하르츠 개혁’, ‘어젠다 2010’으로 알려진 포괄적 노동·사회 개혁이다.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노동시장 유연화, 연금 수령 연령 상향, 부가가치세 인상 등을 골자로 한 하르츠 개혁을 성사시켰지만 그 여파로 총선에 패배해 권력을 잃었다. 권력을 잡은 기민당의 앙겔라 메르켈은 사민당과 대연정을 통해 이 개혁 정책을 이어받아 ‘유럽의 병자’로 불리던 독일을 ‘유럽의 성장 엔진’으로 뒤바꿔놨다.
우리 정치사에선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제1야당이던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을 향해 연정을 제안한 바 있다. 노 대통령은 선거제도 개혁을 전제로 국회 1당에 총리직을 내주겠다는 제안을 한나라당에 했다가 거부당했다. 한나라당뿐 아니라 대통령 소속 정당인 열린우리당과 지지층까지 “배신 행위”라면서 노 대통령의 연정 제안을 반대했다.

독일의 연정은 연정에 참여한 정당들이 서로 다른 공약이나 정책들을 조율해서 ‘연정 협약서’를 만든 뒤 이를 토대로 정책을 집행하는 형식으로 이뤄진다. 내각도 참여 정당들이 협상을 통해 구성한다. 대화와 타협의 문화가 없는 정치 환경 아래서는 성사 자체가 불가능한 모델이다. 김 이사장은 저서 ‘독일의 힘, 독일의 총리들1’에서 연정을 통해 ‘단절이 아닌 계승 진화의 정치’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어떤 정책이든 정당 내부 및 국민 사이에 신중한 논의를 거쳐 수립되므로 일부 정파의 이해에 따라 쉽게 변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정권 교체가 이뤄지더라도 연립정부 전통 아래서 1개 정당은 계속하여 집권당으로 남아 있어 그 당이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도형 기자 scop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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