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보다 빨리 뛰는데 어떻게 똑같냐고 묻는 아이들이 있어요. 그건 신체적 차이일뿐 인권은 평등한 가치라고 말해줍니다. 가정에서 잘못 형성된 성 관념을 학교에서 이런 식으로 고쳐주죠.”
스웨덴 남부 도시 말뫼의 스타펠베드초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사 에밀리에 크론베크씨는 성평등 교육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동료 교사인 페트라 롱후르스트 클랑씨는 “성평등 사회는 그냥 이뤄지지 않는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교육이 필요하다”며 “스웨덴에서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을 부모에게 전달함으로써 가정의 성평등관에 좋은 영향을 주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2. “스웨덴 사회는 아빠들의 육아가 일상화된 것은 물론 남성의 사회교류 방식으로도 정착한 모습입니다. 놀이터나 도서관에 가면 비슷한 육아 고민을 가진 아빠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동지애를 다져요.”
말뫼에 거주하는 마르틴 야르보씨는 자신의 육아 경험을 소개하며 아빠들 간의 연대가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처음 해보는 육아는 고되지만 다른 아빠들과 늘 ‘육아 동지’로서 모일 수 있기에 힘든 과정을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라떼 파파’(육아에 적극적인 아빠)라는 용어도 정작 이곳에서는 낯선 말이다. “아빠가 아이를 보는 것이 왜 특별한 일이냐”고 반문할 정도로 양육자로서 엄마와 아빠의 구분이 없다.
지속가능한 사회, 포용적 성장을 앞세워 신뢰와 공정성을 끌어올린 복지국가 스웨덴은 모든 국민이 ‘기회의 평등’을 누릴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는 나라다. 무엇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성평등 사회로 잘 알려져 있다. 유럽성평등기구(EIGE)에 따르면 스웨덴은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유럽 내 성평등 국가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성별에 따른 권리나 기회의 제한이 분명히 존재함을 인정하고, 이것이 사회적으로 큰 손실이라는 합의를 바탕으로 이뤄낸 성과다. 여성 인권 향상, 육아·가사의 동일한 분담, 성평등 교육의 일상화 등은 이렇게 사회에 뿌리내렸다.
지난달 22일부터 지난 4일까지 스웨덴 곳곳을 방문해 성평등한 공정사회의 저력을 살펴봤다. 이곳에서는 정부, 기업, 시민이 한마음으로 성평등이라는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도록 선순환을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남성과 여성 모두의 자원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사회가 개인은 물론 국가에도 이롭기 때문이다. 인력 낭비가 없고 세금도 더 많이 거둘 수 있으며 일·가정 양립을 통한 삶의 질 향상이 따라온다. 또한 의지와 노력을 통해 누구나 계층사다리를 오를 수 있는 스웨덴의 높은 사회이동성 지수(세계경제포럼 기준 전 세계 4위)의 발판이 됐다.
◆“여성은 힘 기르고 남성은 지지자 역할”
스웨덴의 전문가와 시민들은 성평등 사회로 가는 첫걸음이 “성별 불평등이 존재하며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인정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 단계를 거치지 않고 실행하는 제도는 전향적일 수 없고 탁상공론에 그치게 된다. 스웨덴은 적극적인 성평등 문화 확산이 필요하다는 합의에 이른 후,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일·가정 양립을 해낼 수 있도록 제도와 지원을 실질적으로 정비했다. 세 차례의 대대적인 육아휴직 개혁을 통해 남성의 육아휴직을 의무화한 것이 대표적이다. 고용주는 직원들이 이를 마음껏 활용하도록 장려했다. 어린 자녀가 아프면 엄마든 아빠든 눈치보지 않고 휴가를 내거나 집에서 근무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러한 변화를 위해 여성과 남성 모두 이전과는 달라져야 했다. 여성은 정치·경제적 힘을 길러 자립 능력과 가정 내 동등한 권리를 획득했다. 지난해 기준 스웨덴은 장관급 직책 여성이 57%, 여성 의원 47%, 대기업 여성이사 비율 39% 등을 달성했다. 이 같은 지표를 통합한 성평등 권력(power)지수는 100점 만점에 84.2점을 받아 유럽 국가 중 월등한 1위다. 반대로 남성은 육아·가사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일·가정 양립의 지속가능성을 높였다. 레나 벵네루드 예테보리대 교수(젠더학)는 이런 단계에 도달하려면 “여성들은 더 많이 주장하고 쟁취해야 하며 남성들은 이를 잘 듣고 지지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이상적 남성성은 재정의됐다. 스톡홀름에서 만난 시그룬 시시씨는 “자기 시간을 가정 내에서 충실히 공유하는 남성이 ‘진짜 남자답다’는 인식이 생겼다”며 “이제 여자들은 그런 남자를 파트너로 원하고, 남자들 역시 좋은 양육자가 되는 것을 삶의 중요한 목표이자 권리로 여긴다”고 말했다. 린다 릴 말뫼대 교수(사회학)도 “스웨덴에서는 남성이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며 “남성들 입장에서도 여성이 경제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이득이라고 받아들인다”고 설명했다.
◆남성 육아휴직, 안 하면 더 튄다
스웨덴의 라떼 파파는 남성의 자발적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문화다. 약 2주 동안 스톡홀름, 말뫼, 예테보리의 거리 곳곳에서 눈만 돌리면 유모차를 끄는 남성과 마주쳤다. 유모차 곁에 있는 남성과 여성의 숫자가 비슷했다는 점에서 이곳의 남성 육아휴직이 얼마나 잘 자리 잡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로 엄마와 아빠가 동일한 기간 육아휴직을 번갈아 쓰는 것이 일상화됐다고 한다. 엄마가 일하고 있을 시간인 평일 낮, 공원이나 놀이터는 아이 손을 잡고 나온 아빠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는 인기 장소다.
말뫼에서 아트 프로듀서로 일하다 지난 4월부터 4달째 육아휴직 중인 요한 올드브링씨는 “아이를 돌보며 엄마들이 느꼈던 감정을 아빠가 똑같이 경험해보는 것이 중요하다”며 “아이도 엄마와 아빠에게 똑같이 친밀감을 느끼는 등 관계 형성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아빠는 늘 일을 했기 때문에 엄마랑 더 가까웠다고 한다. 올드브링씨는 “나만 육아휴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빠들이 다 같이 자연스럽게 쓰는 분위기이고 커리어에 전혀 지장이 없다는 점도 큰 몫을 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여성이든 남성이든 육아휴직 중인 사람이 모든 집안일도 책임지며, 상대방은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전했다.
◆법·제도·교육이 이끈 시민의식 개선
스웨덴 사회에 정착한 높은 성평등 의식은 저절로 숙성된 것이 아니다. 여성 인권 신장을 통한 성평등에 도달하기 위해 제도권과 시민단체의 일관되고 오랜 노력이 있었다. 올해는 스웨덴 여성이 첫 투표권을 행사한 지 100년이 된 해다. 1970년대에는 거센 페미니즘 물결에 힘 입어 부부가 아닌 개인별 소득세 징수, 고품질 저비용 보육정책이라는 두 가지 주요 법안이 통과됐다. 이런 배경이 여성들의 직업활동 진출을 촉진했다. 초등학교, 어린이집에서부터 성평등 교육이 이뤄진 것은 물론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것이 매우 상식적으로 여겨지는 분위기도 자리잡혔다.
2014년 전 세계 최초로 ‘페미니스트 정부’를 선언한 스웨덴 정부는 모든 정책 및 예산 계획 시 우선순위에 성평등 가치를 놓고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이르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카린 스트란도스 성평등부 차관은 지난 1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스웨덴 역시 90년대에는 사회 전반의 성 인지 능력을 높이는 데 난관을 맞았다”며 “무엇이 수용 가능한 범주인지에 대한 자각 등에 있어 ‘규범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굉장한 노력을 요하는 전환”이라고 밝혔다.
스트란도스 차관은 “힘들더라도 성평등 의제를 자꾸 이야기 할수록 문제의 심각성을 직면하지 않을 수 없으며, 얼마나 더 많은 층위의 논의가 필요한지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이는 스웨덴이 정부 차원에서 ‘성 주류화’(gender mainstreaming) 전략을 추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성 주류화에 대해 “규범을 바꾸려면 통계와 확실한 근거를 사회가 직면하도록 해야 한다. 성차별적 맥락을 내포한 데이터를 계속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현실이 절대 평등하지 않음을 이해시켜야 한다”고 설명했다.
성평등 연구 지원 등을 전담하는 정부 기관인 스웨덴 성평등에이전시(Swedish Gender Equality Agency)의 안나 콜린스팔크 수석도 “때로는 법과 제도가 선행돼야 한다. 그런 후에야 사람들이 이를 내면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여성이 어떻게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지 더 많은 자료와 통계를 내밀고, 미디어는 여성의 성취를 더 많이 조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콜린스팔크 수석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에 여러 나라의 사례를 비교하며 분명히 알게 된 것은 여성의 역할을 돌봄노동자로 한정하는 한 여성을 생산적으로 활용할 기회가 사라진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성평등을 무엇보다 경제적 문제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그는 “여성의 경제적 참여는 제로섬도 아니고 남성들이 패배하는 차원의 문제도 아니다”며 “모두가 이기는 길이라는 점을 정부나 미디어가 더 잘 보여줘야 한다”고 밝혔다.
◆북유럽 최대 젠더연구도서관 ‘크빈삼’
스웨덴이 성평등 사회의 토대를 단단히 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은 변화를 주도해 온 여성의 기록을 잘 보존했기 때문이다. 지난 1일 방문한 국립 젠더연구 도서관 ‘크빈삼’(KvinnSam)은 이러한 작업을 북유럽 최대 규모로 하는 곳이다. 예테보리대학교 도서관 안에 자리한 이곳은 1958년 ‘여성 역사 기록관’으로 시작해 1997년 ‘국립 젠더연구도서관’으로 격상됐다. 도서관 이름은 스웨덴어로 여성을 뜻하는 ‘크빈(Kvinn)’과 수집물을 뜻하는 ‘삼(Samling)’을 결합해 만들었다. 스웨덴 여성운동의 역사와 인물별 업적, 여성문학, 120여종의 젠더연구 간행물, 여성 혹은 성 인지적 관점으로 쓰인 책과 언론기사 등이 방대하게 아카이빙돼 있다. 현재까지 15만건 넘는 데이터가 쌓였으며 지금도 계속 추가되고 있다.
이곳의 사서인 산나 헬그렌씨는 “처음엔 일할 사람을 구하기 힘들 만큼 열악했지만 지금은 사서가 8명에 이르고, 국립 자료도서관으로서 존재감을 확보했다”며 “여성 활동가나 기관들이 자신의 기록과 자료를 믿고 맡길 곳이 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스톡홀름, 말뫼, 예테보리(스웨덴)=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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