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코펜하겐 인근의 작은 마을 오덴세에는 ‘동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안데르센의 작은 생가가 있다. 구두 수선공 아버지, 세탁부 어머니와 함께 단칸방에서 지내며 가난했지만 성공을 꿈꿨던 안데르센의 유년시절을 간직한 곳이다. 그가 창작한 동화 ‘미운 오리새끼’는 자신의 도약 스토리이기도 한데 그의 성공은 국민 개개인의 적성과 재능을 중시하면서 다양한 성공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덴마크 교육·취업시스템의 바탕이 됐다.
기자는 덴마크에서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국민들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배경에는 계층 이동의 주요 통로인 교육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이런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높은 신뢰가 자리하고 있다. 덴마크에서는 학교마다 학생 수준에 맞는 다양한 학습기회를 보장하고 있다. 자율형사립고교(자사고)와 특수목적고교(특목고)를 없애고 평준화 교육을 추구하는 한국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 결과 덴마크는 세계경제포럼(WEF)이 지난해 처음 발표한 ‘전 세계 사회이동성 지수’(Global Social Mobility Index)에서 1위로 평가됐다.
◆입시경쟁 대신 적성에 주력하는 덴마크
덴마크에서 만난 청년들은 무엇보다 적성을 찾는 데 상당한 시간을 투자한다고 입을 모았다. ‘갭 이어’(Gap year)가 대표적이다. 한국 학생들이 치열한 입시 경쟁에 내몰리는 고등학교 시기에 덴마크 학생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진로를 찾기 위한 여행이나 인턴십을 한다. 덴마크 고등학생 85% 이상이 1년 이상 갭이어를 갖는다.
코펜하겐대학교에서 다문화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마틴 한센(28)은 “덴마크 학생들은 취업에 대한 생각이 유연하다”고 말했다. 그의 본래 전공은 정보통신기술(ICT)이었으나 중간에 다문화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2년간 갭이어를 가지며 이스라엘을 여행했는데 여러 국가의 사람을 만나며 다문화에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그는 “적성을 찾기 위해 투자한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고 자신했다.
로스킬데대학교에서 언론학 석사 과정 중인 요아킴 베르너(27)는 덴마크 알츠하이머 협회에서 인턴십을 하며 만든 다양한 콘텐츠에 흥미를 느껴 기자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됐다. 그는 “덴마크에서 기업 인턴십은 교육 과정의 하나로 여겨지는데 정부가 사실상 임금을 제공한다”며 “기업과 정부 모두 학생들이 다양한 기회를 갖고 사회에 기여하는 시민으로서 교육되는 것을 원한다”고 말했다.
덴마크에서는 나이가 취업의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는다. 고등학교 졸업 후 빵집에서 일해 온 프리다(25)는 최근 심리학에 관심이 생겨 다소 늦은 나이에 대학 입시에 뛰어들었다. 그는 “공부를 하기에 늦은 나이라는 것은 없다”며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모든 학생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각 교육기관은 세심하게 신경을 쓴다. 코펜하겐대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최현주 교수는 “대학마다 설치된 소위원회들이 학생들 각자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전했다. 장애 등 약점이 있는 학생이 다른 장점을 찾아낼 수 있도록 위원회가 교육과정을 살피고, 평가기준을 만드는 식이다. 최 교수는 “학생들 스스로도 자신의 강점을 드러낼 수 있는 활동을 학교에 건의한다”며 “덴마크에선 학생이라는 신분이 사회를 이끌 책임을 갖고 공부를 일처럼 하는 하나의 직업처럼 인식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동체주의와 책임감 함양하는 ‘에프터스콜레’
덴마크 중학생(9학년) 중 절반가량은 졸업 이후 곧바로 고교에 진학하는 대신 ‘에프터스콜레(Efterskole)’라는, 일종의 자유학교에 진학한다. 학생들은 기숙생활을 하며 1년간 스포츠, 음악, 미술 등 원하는 과목을 자유롭게 배운다. 의무교육과정이 아니기 때문에 등록금은 일주일에 최대 2500크로네(약 45만원) 수준으로 다소 비싸다. 하지만 부모 소득에 따른 국가 지원금이 있어 학생 차원에서는 크게 부담되는 수준은 아니다.
지난 5일(현지시간) 덴마크 북쪽 도시 오비브로에 위치한 ‘스포츠 에프터스콜레’(SEA)를 찾았다. SEA 학생들은 오전 6시50분에 기상해 방과 학교 담당구역 청소로 하루를 시작한다. 교과목은 민주주의, 윤리, 언어, 수학 등 필수과목들로 구성돼 있다. 오전에 2교시, 오후에 3교시 수업을 하고 오후 6시쯤 저녁식사를 한다. 이후 학생들은 교사를 찾아가 상담을 하거나 스포츠나 음악 등 공동체 활동에 나선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찾고, 고교 졸업 이후의 진로를 결정한다. 학교나 부모가 정해 주는 대신 학생 스스로 인생의 길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앱슨 마티아센 SEA 교장은 “에프터스콜레는 아이들이 사회로 나갔을 때 책임감 있는 사회 구성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곳에서 생활하려면 함께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 개인주의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마티아센 교장은 “적성을 찾지 못해 고민하는 학생이 있을 때 학교가 길을 제시해 줄 수는 있지만 그런 경우는 많지 않다”며 “학생들은 공동체 활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찾고 졸업 이후 진로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에프터스콜레 졸업 후 학생들은 일반 고교에 진학하거나 전문기술학교, 상업학교 등을 선택한다.
◆정부 신뢰와 복지가 끌어올린 사회 이동성
덴마크 청년들은 폭넓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정부와 사회에 대한 높은 신뢰도, 복지정책을 통해 줄어든 직업 간 격차 덕분이다. 덴마크는 평균적으로 소득의 40%대를 세금으로 거둬 직업별 소득 보존 등 적극적인 소득재분배 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렇게 조성한 재원 덕분에 우리나라의 유치원 막학기에 해당하는 0학년부터 대학원 석사까지 전 교육과정이 무료다. 대학에 입학하면 정부에서 매달 국가교육지원금(SU)이 나온다. 학생들이 학비·생활비 걱정 없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인 셈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계층간 소득불균형 정도를 0(완전평등)과 1(완전불평등)을 기준으로 나타내는 ‘지니계수’를 활용해 2018년을 기준으로 덴마크를 분석한 결과 세금이 부과된 전후 지니계수는 0.40에서 0.27로 0.13%포인트가량 격차가 줄었다. 한국의 지니계수는 같은 기간 세전 0.37에서 세후 0.33으로 0.04%포인트가 변했다.
크리스티안 비욘스코프 오르후스대 교수(경제학)는 “덴마크 역시 직업별 사회적 지위와 소득격차는 존재하지만 대기업 이사가 청소부와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로 직업 간의 격의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전 세계 여러 지표에서 덴마크가 사회이동성이 높다는 결과가 나오지만 막상 국민들은 계층을 특별히 인식하고 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덴마크인들은 정부가 나라를 공정하게 이끈다고 믿는다. OECD에 따르면 지난해 덴마크의 정부신뢰도는 72%로 한국(45%)의 1.6배에 달한다. 국가청렴도는 같은 해 100점 만점에 88점으로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이는 덴마크가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사회복지 정책을 펼칠 수 있는 선순환의 원동력이다. 벤트 그레우 로스킬데대 교수(사회과학)는 “모든 시민이 공정하게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하는 등의 품질 좋은 사회복지시스템은 국민들이 사회를 공정하다고 여기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분야별 격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도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최근 덴마크에서는 대도시와 시골에 사는 청년들의 빈부격차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소도시의 청년들에 충분한 기회를 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레우 교수는 “덴마크에는 8개 대학이 큰 도시에 하나씩 있는데 작은 도시로 대학을 쪼개는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며 “시골에 살면 일자리나 교육에 있어 상대적으로 기회가 적은 것을 보완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이어 “대도시에 집중돼 있는 기업을 지방으로 보내 균등발전을 도모하려는 노력도 함께 이뤄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덴마크에서도 높은 복지 수준에 따른 노동 의욕 감소는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비욘스코프 교수는 “실업급여나 빈곤 복지 지원으로 인해 덴마크 실업자의 10~15%가 직업을 가지고 일할 동기가 없다는 조사결과가 있다”며 “지난 25년 동안 덴마크 내에서 끝없는 논쟁이 이어졌지만 이를 해결할 정책이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대목이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코펜하겐, 오덴세, 오비브로(덴마크)=안승진 기자 prodo@segye.com
“개천에서 용 난다고요? 모두가 용일 수는 없을까요?”
한국에서 16년간 생활하며 ‘상상 속의 덴마크’를 집필한 작가 에밀 라우센은 한국 사회의 계층이동 문제에 대해 “덴마크에 비해 진학이나 취업 과정에서 경쟁이 심한 환경 때문에 생겨난 측면이 있다”고 진단했다.
지난달 31일 덴마크 코소르 자택에서 만난 에밀은 “덴마크의 사회계층에 대한 인식은 한국과 많이 다르다”며 “직업이나 부(富)로 계층을 나눈다는 것이 덴마크에는 어울리지 않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그는 “덴마크에서 직업은 사람의 정체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진 않는다”고 강조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직업이 있는 거지 남들과 비교하고 부러워하는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덴마크에는 ‘얀테의 법칙(Janteloven, Law of Jante)’이란 게 있다. 자신을 남보다 특별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갖는 일종의 사회규범이다. 그는 “덴마크에서 의사나 변호사 등 일부 직업을 얻기 위해 더 많은 공부를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덴마크에서는 일부 해외 영업직을 제외하고 굳이 명함을 만들지 않는다. 사회적 권력을 가진 시장이나 국회의원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격 없이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에밀의 아버지는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이고 어머니는 교사지만 에밀에게 직업이나 진학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어떤 꿈이 있니”, “좋아하는 것이 뭐니”라고 꿈을 물었을 뿐이다. 실제 그는 학창시절 7년간 신학을 공부했고 1년 반 동안은 사회복지를 공부했다. 에밀은 “부모님이 교회를 안 다녔는데 신학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었다”며 “한국이었다면 부모님이 이해를 못 했을 수도 있다”고 웃음 지었다.
덴마크가 과거부터 이런 모습은 갖춘 건 아니다. 덴마크 1950∼60년대를 다룬 드라마에서는 환경미화원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며 직업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묘사되곤 한다. 에밀의 아버지가 의사를 직업으로 선택한 이유도 부모의 영향이 컸다. 에밀은 “지금 같은 사회로 변화하기 위해 덴마크인들의 많은 노력과 논의가 있었다”며 “행복한 사회로 나아가자는 모두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행복의 나라’라는 명칭이 붙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부 덴마크 학생들은 자신의 적성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에밀은 “아이들은 자신의 진로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지만 때로는 너무 많은 자유에 막막함을 느끼기도 한다”며 “때로는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 강박관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답은 없다”며 “다만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중요한 건 확실하다”고 조언했다.
코소르=안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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