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2일,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에 위치한 서울시아동복지센터에서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실내악 공연이 열렸다. 공연장에 모인 관람객은 모두 5∼12세 어린이. ‘아기상어’ ‘멋쟁이 토마토’ ‘할아버지의 시계’ 등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공연과 함께 율동과 타악기 연주 체험도 이어졌다. 클래식 공연을 처음 경험한 아이들은 공연 후에도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평범해 보이는 연주회 같지만, 사실 이날 공연은 경제적인 이유로 문화 관람이 어려운 ‘문화 소외계층’을 위한 특별 무료 공연이었다.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이런 ‘예술·문화’ 경험은 누구나 손쉽게 누릴 수 있어야 하지만, 자본력에 따라 예술 향유의 기회가 제한되는 것이 현실이다.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클래식 공연만의 얘기가 아니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공연이 줄어드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무료 공연이 쪼그라들고 있는 것이다. 문화 경험의 ‘빈익빈 부익부’는 또 다른 계층화를 빚어내고 있다.
◆소득 낮을 수록 문화 관람도 낮아
‘문화 양극화’는 정부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0년 문화예술활동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600만원 이상 최고 소득과 100만원 미만 최저 소득의 문화예술 관람률 격차는 50.6%포인트로 전년에 비해 더 벌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19로 모든 가구의 관람률이 감소했지만 저소득 가구의 관람률 감소폭이 더 커진 탓이다. 2016년 58.6%였던 가구소득별 문화예술 관람률 격차는 2018년 49.4%포인트, 2019년 40.8%포인트로 감소하는 추세였지만 지난해 50.6%로 다시 확대됐다.
예술 접근성을 방해하는 것은 자본 격차뿐만이 아니다. 지역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지난해 읍·면 지역의 문화예술 관람률(46.5%)은 도시 지역(63.5%)보다 현저히 낮아 대도시와 읍면 지역의 문화예술 관람률 격차 역시 전년(12.7%)에 비해 17.0%포인트로 벌어졌다.
대도시에 살고 소득이 높을수록 다양한 문화 향유의 기회가 많은 반면 소도시에 살면서 소득이 적을 수록 그 기회가 줄어든다는 의미다.
이런 자본력에 따른 문화 경험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정부와 각 지자체는 문화누리카드와 ‘찾아가는 공연’을 운영하고 있다.
문화누리카드는 저소득층이 1인당 10만원의 지원금을 받아 공연, 영화, 여행,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쓸 수 있도록 한 카드다. 문화예술위원회는 “문화누리카드로 50∼80% 할인된 나눔티켓을 구매하면 클래식, 뮤지컬 등을 다양하게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의도와 달리 문화누리카드 사용처는 도서와 영화 분야에 쏠렸다. 지난해 문화누리카드 사용처는 문화분야 71.4%, 관광 분야 26.5%, 체육분야 2.1%를 차지했다. 문화 분야 중에서도 도서 분야 사용액이 849억원으로 전체 사용액의 60%를 차지했다. 영화 비중도 7.6%로 비교적 높았지만 공연은 0.4%에 불과했다. 도서의 경우 참고서와 학습교재, 실용서를 구매하는, 사실상 여가와 문화의 개념보다는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됐다.
◆소외계층 품는 문화생태계 구축해야
‘카드깡’도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 문화누리카드 홈페이지에서는 카드를 양도하거나 카드를 사용해 구입한 나눔티켓을 양도하는 부정행위에 대해서 자격 박탈을 경고하고 있지만 중고물품 판매 사이트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문화누리카드 7만원에 팔아요” 등의 글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배가 고픈데 무슨 문화생활이냐”는 비아냥과 함께 일부에서는 최근 유튜브 등 인터넷을 통한 실황 중계가 늘어난 만큼 디지털이 ‘문화적 평등’을 이뤄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문화 소외계층을 위한 혜택이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디지털로 재생되는 ‘복제’와 현장 ‘직관’을 동일시하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현장에서 느끼는 정서적 울림은 복제품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지자체의 ‘찾아가는 공연’이 더욱 확대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굳이 돈을 내고 공연장에 가지 않아도 생활 속에서 다양한 문화를 접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시향이 서울시와 함께 ‘우리동네 음악회’와 ‘우리 아이 첫 콘서트’ 등의 무료 공연을 개최하고, 민간 오케스트라 심포니 송이 대형 트럭을 오케스트라 홀로 개조한 ‘윙트럭’으로 지방 소도시 등을 찾아가 주민들을 위한 음악회를 여는 것이 대표적이다.
주연주 서울시향 제1바이올린 단원은 “아이들과 음악회를 통한 만남은 연주자에게도 힐링이 된다. 음악과 문화는 차별 없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돼야 한다”며 ‘문화복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대중문화와 실용서에 편향된 문화누리카드에 과감하게 분야별 쿼터제를 도입하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특히 기초예술 분야에 대한 지원이 더욱 커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대현 문화평론가는 “인터넷 등 ‘복제’ 공연으로 느낄 수 있는 정서적 울림은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생동감과 비교할 수도 없다”며 “특히 공연수익 등 상업성보다는 다양한 창의력과 실험을 시도하는 클래식, 연극, 본격 문학 등 기초예술 분야에 대한 기회 제공이 확대돼야 그 뼈대 위에 또다시 예술의 경계가 확대되고 다양한 콘텐츠가 생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예술인 10명 중 4명 ‘투잡’… 한국판 조앤 롤링 요원하나
지난 2001년 전세계는 ‘해리포터’의 마법에 걸렸다. 해리포터의 작가는 이제 전 세계인이 아는 조앤 K 롤링. 오랜 시간 생활보조금을 받고 근근이 살아가던 가난한 예술인은 책 판매만으로만 3조원, 영화 등으로 300조원으로 추산되는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후, 한국에서는 독립영화 등에서 실력을 인정받던 젊은 작가가 지병에 영양결핍이 겹치면서 사망했다. 촉망 받는 젊은 작가의 ‘아사’ 소식에 사회는 들끓었고, 작가 이름을 딴 일명 ‘최고은법’(예술인복지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지난 2012년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출범하면서 가난한 예술인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예술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한 창작준비금 지원, 생활안정자금 융자, 예술인 파견지원 등의 혜택이 생겨났다. 1년에 300만원이 지원되는 창작준비금은 창작활동이 중단된 공백기간에 ‘실업급여’처럼 생활비로 쓸 수 있다. 또 생활안정자금 융자를 통해 은행 문턱이 높은 예술인들이 낮은 금리로 전세자금 등을 마련하고, 파견지원 사업을 통해 예술활동과 관련된 부업으로 재능을 활용하면서도 활동비을 받을 수도 있게 됐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예술인복지법 이후에도 심심찮게 예술인들의 극단적 선택 소식이 들리는 것이 이를 반영한다.
지난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투잡’을 뛰는 예술인은 42.6%에 이르렀다. 겸업 예술인의 70% 이상은 불규칙하고 낮은 소득으로 예술활동에 전념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예술인의 가구 총 수입은 평균 4225만원. 배우자의 소득과 ‘부업’으로 벌어들인 돈을 합한 것으로, 예술활동으로 인한 개인 수입만 놓고보면 평균 1281만원을 벌어들인다. 분야별로는 문학과 사진 분야가 각각 550만원, 329만원으로 적은 소득을 기록했다. 건축과 방송연예 분야는 각각 5808만원, 2065만원으로 상대적으로 높은 소득을 올리는 것으로 나왔다.
창작준비금 지원도 지난해 신청자가 3만명이 넘었지만 실제 지원이 이뤄진 것은 1만5260명으로 절반에 불과했다. 그나마 코로나19로 지원이 대폭 늘어난 것이 이 정도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 관계자는 “창작준비금이 큰돈은 아니지만 절박한 상황에서 지원금을 받고 예술활동을 이어가고 이후 영화제나 공모전에서 수상하는 사례들이 이어지고 있다”며 “예술생태계 보호를 위해서 불공정 계약이나 예술활동에 참여하고 돈을 받지 못하는 등의 상황을 방지하고 정당한 보상을 위한 사회안전망이 탄탄히 구축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진수 기자 je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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