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는 승자독식 한국 사회에서는 명문대에 들어가지 못하면 자신의 실제 능력과 상관없이 고생을 하게 됩니다. 이는 사람들의 불안을 야기하고, 사교육 과잉투자로 이어지죠. 사교육은 계층 대물림을 작동시키는 원리가 되고 있고요.”
한국 사회의 계층 격차, 노동시장 등에 대해 꾸준히 연구해 온 티모 플렉켄슈타인 영국 런던정경대 교수(사회정책학)는 한국의 경직된 사회이동의 주 요인으로 ‘과잉교육’을 꼽았다. 플렉켄슈타인 교수는 ‘끈끈한 바닥(sticky floor)’과 ‘끈끈한 천장(sticky ceiling)’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최상층부와 최하층부에서 사회이동이 일어나기 힘든 불평등 사회를 조장하는 데 있어 한국에서는 사교육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불평등·양극화 문제 해소에 천착해온 박현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사회학)는 이른바 ‘개천용 담론’에 대해 회의적이다. 박 교수는 “절대적으로 개천용이 줄어든 것은 직업구조 변화 등으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그보다는 파이가 성장하며 늘어난 기회를 저소득층이 얼마나 잡을 수 있었는지 분석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계층이동의 양적 측면보다는 분배의 질적인 추이를 살펴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에릭 클라이넨버그 미국 뉴욕대 공공지식연구소장도 불평등이나 사회 갈등, 양극화 문제를 구조(환경)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클라이넨버그 소장은 저서 ‘도시는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 ‘폭염사회’ 등을 통해 “다양한 계층과 배경의 사람들이 대면해 어울릴 수 있는 장소를 고려하지 않고 현대적 도시를 설계했기 때문에 계층 간 분열과 고립이 심화했다”고 진단한다. 훌륭한 공간들이 민간에 의해서만 제공되는 것은 부와 사회적 지위에 따라 접근성의 불평등을 야기한다는 분석이다.
한국 사회의 끊어진 계층사다리를 주제로 연중 기획물을 연재하고 있는 세계일보는 이달 19∼22일 박 교수와 플렉켄슈타인 교수, 클라이넨버그 소장과 각각 화상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들은 한국의 높은 교육열과 엘리트 시스템, 경제적 불평등 심화, 분배와 평등에 대한 소극적 인식 등이 사회의 공정함을 해치고, 결과적으로 낮은 사회이동성으로 나타났다고 입을 모았다.
이번 인터뷰는 사회이동성 최상위 국가인 덴마크, 핀란드, 스웨덴 3국에 대한 현장 취재를 앞두고 이뤄졌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지난해 처음 발표한 ‘전 세계 사회이동성 지수(Global Social Mobility Index)’에 따르면 사회이동성 최상위 4개국은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이다.
한국은 조사 대상 82개국 중 25위로 경제력(12위)과 비교해 사회이동성 지수가 낮은 나라 중 하나였다. 세계 최강의 경제대국인 미국의 사회이동성 지수는 한국보다 더 낮은 27위에 그쳤다. 덴마크, 핀란드, 스웨덴은 공통적으로 사회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높고 평등, 사회적 재분배를 높은 가치로 두고 있다. 보다 적극적으로 경제·사회 불평등 해소에 나서고, 포용적 성장을 중시한다는 점은 이들 ‘공정국가’의 공통된 특징이다.
◆‘개천용’에 대한 오해와 진실
한국과 미국에서 사회이동, 교육불평등, 사회계층, 노동시장 등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박현준 교수는 ‘개천용 담론’으로 사회 개방성을 판단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지난 몇 세대에 걸쳐 개천에서 용이 나는 일이 점점 줄고 더 어려워진 것은 직업구조 변화와 경제 발전 등에 따른 측면이 크며, 이 자체로 사회가 이전보다 더 폐쇄적으로 변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진단이다.
박 교수는 단순히 자녀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높은 계층으로 옮겨갈 수 있느냐는 ‘절대적 이동’보다는 계층별로 상위 계층에 도달하거나 유지하는 정도를 비교하는 ‘상대적 이동’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계층 간의 절대적인 이동이 이전 세대에 비해 현재 세대에 피자 크기가 얼마나 커졌는지 혹은 작아졌는지를 분석하는 문제라면 상대적 이동은 크거나 작아진 피자를 어떤 계층 출신이 어떻게 나누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문제”라고 설명했다. 사회의 유동성 혹은 기회의 불평등을 가리키는 지표는 절대적 이동이 아닌 상대적 이동 수준을 평가해야 제대로 알 수 있다는 설명이다.
박 교수는 사회이동을 늘리기 위해서는 ‘파이’를 키우는 성장도 중요하지만 분배 문제를 개선하지 않는다면 실질적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불평등 또는 격차 줄이기가 공정사회를 만드는 필요조건이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직업구조가 농민 위주인 사회가 화이트칼라층 중심인 사회로 변해가면서 사회 전반의 절대적 이동이 늘어났듯이 4차 산업혁명 등을 계기로 다시 절대적 이동은 늘어날 수 있다”며 “하지만 늘어난 파이를 상층부가 먼저 가져가 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다. 이러면 절대 이동이 늘더라도 개방된 사회라고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계층사다리가 사라졌다는 불만이 나오는 데 대해 박 교수는 “올라가고 내려오는 정도는 사실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사다리 간의 높이 차가 더욱 커진 데서 기인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상층부와 하층부의 격차는 계속 커지는데 기회가 열리면 상층부가 모든 자원을 동원해 이를 먼저 포착해 버리니 박탈감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공정 이슈와도 연결된다. 최근 한국 사회에선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기회의 공정’이 양극화나 불평등을 줄이지 못하고, 오히려 계층 세습화를 정당화하는 명분이 되고 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이 최근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라고 반문했던 ‘능력주의 신화’의 문제점이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논의의 초점을 보다 근본적으로 상대적 이동 기회를 늘리는 것에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커진 파이를 저소득층이 얼마나 더 가져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노동자 계층의 4년제 대학 진학률을 높여 이들이 중산층이 될 수 있도록 견인하는 개혁 등이 필요하다’는 조언이다. 박 교수는 “기득권층이 개혁을 주도하기는 힘들 것 같고 결국 정치와 정책의 영역”이라며 “불평등 구조를 바꾸려면 분배 측면에서 굉장히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위정자들에게 먼저 당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보다 북유럽 모델 참고해야”
플렉켄슈타인 교수는 한국의 과잉교육 현상에 주목하는 사회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국제적 기준으로 봐도 극심한 수준인 한국의 사교육 열풍이 사회의 기존 계층 질서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플렉켄슈타인 교수는 “한국의 사교육은 당신이 어떤 계층에 속해 있든 간에 이를 유산처럼 다음 세대로 내려보내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며 “불평등을 조장하고, 능력과 상관없이 부모의 투자에 따라 계층 세습화를 용이하게 만드는 사회는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실제 한국 사회에서 기득권층이 계층 대물림을 위해 가장 큰 공을 들이는 부분 중 하나는 교육, 구체적으로는 ‘학벌’이다. 한국의 대학교 시스템은 명문대 중심으로 서열이 매겨져 있고 그 간판을 따기 위한 주요 방법은 엘리트 교육에 있다. ‘SKY’, ‘인서울’을 위해 학생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서열에 집착해 과도한 경쟁을 벌인다. 이러한 불안은 계층 고착화와 과잉교육이라는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게 만든다.
플렉켄슈타인 교수에 따르면 한국과 미국은 수직적 엘리트 시스템에 의존하고 사회보장이 미비하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사회이동성 지수에서도 한국(25위)과 미국(27위)은 ‘도긴개긴’이다. 특히 한국은 현재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복지에 지출하는 비용이 너무 적고 세금도 매우 적게 낸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사회시스템이나 공정함에 대한 신뢰도가 낮은 탓에 높은 세율을 적용하기 힘든 악순환도 발견된다. 서울연구원이 지난해 서울에 거주하는 청년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우리 사회는 노력에 따른 공정한 대가가 제공되고 있다’는 문항에 10명 중 6명이 ‘그렇지 않다’(60.4%)고 답했다. ‘자신의 계층상승이 힘들 것 같다’고 답한 서울 청년은 10명 중 7명(69.5%)에 달했다.
플렉켄슈타인 교수는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사회는 사회적 이동성을 약화시킨다”며 “사회적 계층이 낮을수록 사다리를 점점 더 올라가기 힘들고, 지위가 높을수록 이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사회이동성 측면에서 실패한 미국보다는 유럽의 사회·교육정책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 더 나은 성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지 않을 경우 “도덕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적 관점에서도 어리석다”고 지적했다. 플렉켄슈타인 교수는 “평등한 사회일수록 경제성장률도 높은 경향이 있다”며 “더 많이 가진 강한 사람이 더 큰 짐을 지고, 취약한 사람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해주는 식으로 ‘자원의 공유’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도 ‘자원 재분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대표적 나라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사회적 인프라의 중요성
클라이넨버그 소장은 “사람들이 모여 교류하는 공간, 사회적 인프라를 만드는 것은 이제 ‘사회정의’의 문제가 됐다”며 “이는 사회이동성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비싼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새로운 삶을 경험하고 기회를 만들어갈 수 있는 대표적 수단으로 도서관을 든 클라이넨버그 소장은 “이와 같은 ‘모두를 위한 궁전’이 늘어나는 것이 불평등 해소와 사회이동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클라이넨버그 소장은 같은 계급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배타적 성격의 공간보다는 모든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교량적 사회 인프라’를 짓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는 “평등을 위해 노력하고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민주사회의 주된 원칙”이라며 “통합을 추구하는 프로젝트를 거부하고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여기는 이들은 늘 존재하지만 그런 사회는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서도 잘 드러났듯이 모든 사람은 모든 공간과 연결되어 있다. 클라이넨버그 소장은 “현대 사회에서는 서로 분리된 삶을 산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다양하고 개방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 어렵지만 더 나은 길”이라고 강조했다.
정지혜, 안승진, 배소영 기자 wisdom@segye.com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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