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글로벌 경제가 유례없는 위기 상황에 돌입하면서 인수·합병(M&A)을 통한 산업계 지각변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항공업계와 건설업계 등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업종은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한 구조조정의 과정으로 M&A가 불가피해졌다. 반면 시장 패권을 쥐고 있는 대기업들은 위기를 기회 삼아 몸집을 불리는 데 열중하는 모양새다. M&A가 단숨에 시장 지배력을 손에 넣는 과감한 투자가 될 수 있지만, 자칫 부실기업을 떠안는 과정에서 큰 출혈을 겪으며 ‘승자의 저주’에 빠질 수 있는 만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코로나19 여파로 급성장한 M&A 시장
14일 글로벌 금융정보 업체 레피니티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기업 M&A 규모는 1조7400억달러(약 1966조8960억원)로, 관련 집계를 시작한 1980년 이후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지난해 상반기(5117억9000만달러)와 비교하면 3배가 넘는 수치다.
국내 M&A 시장도 뜨겁긴 마찬가지다. 금융정보 업체 딜로직이 올해 상반기 중 금액이 공개된 국내 경영권 거래 규모를 합산한 결과, 43조8605억원(296건)으로 관련 집계를 시작한 이후 가장 많은 액수를 기록했다.
M&A가 급격히 늘어난 배경에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코로나19로 기업 생태계가 급변하면서 부실기업의 구조조정이 불가피해지면서다.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정부의 경기부양 정책과 회사채를 통한 자금조달 방식이 맞물려 기업의 유동성이 늘어난 점도 M&A 시장을 키우는 요인이 됐다.
대한항공은 최근 산업은행과 협의를 거쳐 아시아나항공에 대한 ‘인수 후 통합 전략’(PMI·Post Merger Integration) 계획을 최종 확정했다. 아시아나항공의 경우 2019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매각을 추진했지만, 코로나19 확산 이후 HDC현대산업개발과의 M&A 협상이 좌초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대한항공이 새로운 인수자로 나섰다. 현재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 유럽연합(EU), 중국, 일본 등의 기업결합심사를 기다리며 막판 인수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앞서 터키·대만·태국 등 3개국에서는 기업결합 승인을 받은 상태다. 저비용항공사(LCC) 업계도 M&A 절차가 한창 진행 중이다. 지난해 제주항공으로 인수되는 작업이 불발됐던 이스타항공은 지난달 24일 골프장 관리·부동산 임대업체인 성정과 M&A 투자 계약을 체결했다. 모회사인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간 결합으로 진에어와 에어부산, 에어서울 등도 통합 작업을 앞둔 상황이다. 여기에 제주항공과 티웨이항공 등의 추가 M&A 성사 가능성도 거론된다.
◆M&A로 미래 먹거리 찾는 대기업
신세계그룹은 코로나19 위기를 기회로 삼고 되레 공격적으로 M&A를 시도한 케이스다. 지난 2월 야구단 SK와이번스를 인수한 데 이어 5월에는 SSG닷컴을 통해 여성 쇼핑몰 W컨셉을 사들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지난 5일에는 이마트를 통해 이베이코리아 지분 80%를 인수하면서 온라인 유통업계에 지각변동을 예고했다. 지분 매입에 들어간 금액은 3조4400억원으로, 올해 성사된 국내 기업의 M&A 거래 중 최대 규모다.
정보기술(IT) 업계도 M&A를 무기로 신사업을 개척하는 데 공을 들였다. 나란히 시가총액 3, 4위를 달리는 카카오와 네이버는 콘텐츠와 지식재산권(IP) 확보 경쟁에 뛰어들었다. 먼저 네이버가 지난 5월 9000만명의 글로벌 독자를 갖고 있는 캐나다 웹소설 플랫폼 업체 왓패드와 국내 웹소설 업체인 문피아를 차례로 인수했다. 이에 질세라 카카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북미 웹툰 플랫폼인 타파스와 웹소설 플랫폼 래디쉬를 사들였다.
호반건설을 주축으로 한 호반그룹은 국내 2위 전선업체인 대한전선을 인수했고, 현대차그룹은 첨단 로봇 기술을 보유한 미국 회사 보스턴다이내믹스에 대한 인수 절차를 최근 마무리했다.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소속사 하이브는 저스틴 비버, 아리아나 그란데 등이 속한 미국 대형 미디어 그룹 이타카홀딩스를 품었다. 이들 모두 기존과 다른 새로운 사업 영역으로 진출하거나 더 넓은 해외 시장을 겨냥하기 위한 발판으로 M&A를 활용했다는 게 공통점이다.
◆하반기도 M&A 활발하겠지만, 과열경쟁 ‘주의’
하반기에도 M&A 시장에서는 거물급 매물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국내 배달 애플리케이션 점유율 2위인 요기요는 다음달까지 주인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지난해 독일 딜리버리히어로가 배달 앱 1위 사업자인 배달의민족을 인수할 당시 공정거래위원회는 M&A 허용 조건으로 요기요 매각 명령을 내린 바 있다. 한때 몸값이 2조원 안팎에 달할 것이란 전망도 나왔지만, 최근 매각을 희망하는 사모펀드들은 1조원 안팎을 제시하면서 M&A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동차 에어컨 등 공조기 전문업체인 한온시스템은 하반기 M&A 시장 최대어로 꼽힌다. 투자은행(IB) 업계에서는 일본 도요타의 자회사 덴소에 이어 글로벌 점유율 2위를 기록하는 한온시스템의 지분 가치가 7조원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전기자동차가 각광을 받는 가운데 한온시스템은 전기차에 들어가는 히트 펌프와 전동 컴프레서 등의 열 관리 부품의 핵심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재계 40위권이며, 건설사 중 시공능력평가 6위권인 대우건설의 대주주인 KDB인베스트먼트는 최근 중흥건설을 매각 우선협상대상자로 지정했다. 중흥건설은 국내 시공능력평가 순위로는 35위의 중견업체라는 점에서 이례적이란 평가가 나온다. 대우건설 M&A를 위해 우선협상대상자가 지정된 것은 2018년 호반건설 이후 3년 만이다. 당시 호반건설은 실사과정에서 해외 공사와 관련한 대규모 부실 정황이 확인되자, 우선협상대상자로 지정된 지 8일 만에 인수를 포기했다. 이밖에 국내 보톡스 1위 업체인 휴젤과 국내 1세대 온라인 쇼핑몰 인터파크, 가구·인테리어 업계 한샘이 시장에 나와 있다.
김광석 한국경제산업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코로나19 사태로 실물경제가 나빠지면서 수익성이 떨어지는 사업을 정리하려는 움직임과 성장 기업이 사업영역을 확장하려는 산업재편 흐름이 맞물리면서 앞으로도 M&A 딜이 활발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일선 한국CXO연구소 소장은 “기술력이 있더라도 코로나19로 자금 동원에 어려움을 겪어 매물로 나오게 되는 기업도 늘고 있다”며 “최근 인터파크가 매각을 추진하는 것도 코로나19로 공연업계에 타격을 입은 상황이 영향을 미쳤고, 앞으로 여행업계나 호텔 등 숙박업계도 지각변동이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M&A 시장이 과열되면서 매각 대금이 지나치게 늘어난 상황에도 주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M&A 과정에서 과도한 인수비용, 무리한 사업 확장 등으로 타격을 입을 경우 M&A에는 성공했더라도 결국 후발주자에 밀리는 ‘승자의 저주’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SK, 하이닉스 인수해 그룹 간판기업으로 키워
인수·합병(M&A)은 하나의 기업이 다른 기업의 경영권을 인수해 두 기업이 하나로 합병하는 과정을 아우르는 말이다. 전통적으로 M&A는 두 기업의 시너지 효과를 통해 경영 이익을 극대화하거나 기업의 몸집을 불려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추진된다.
우리나라는 현행 상법을 통해 기업 간 M&A 계약과 절차 등을 규정하고 있다. 한 기업이 다른 기업을 흡수하는 일반적인 합병 형태 외에도 상법 절차에 따라 합병 회사를 모두 없애고 새로운 회사가 이어받는 형태의 신설합병도 있다.
국내 대기업은 일찍부터 M&A를 발판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는 경영 방식을 활용해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SK그룹이다. SK그룹은 2012년 하이닉스를 인수해 지금의 SK하이닉스를 키워냈다. SK하이닉스는 현재 글로벌 D램 시장 2위, 국내 시가총액 2위를 유지하며, SK그룹의 간판 계열사로 우뚝 섰다. 최태원 회장은 이후에도 동양매직과 LG실트론을 사들여 각각 SK실트론과 SK매직으로 재편한 뒤 꾸준히 실적 성장세를 이뤄내고 있다.
삼성은 취약한 분야를 M&A로 보완하는 전략으로 재미를 보고 있다. 신설 회사를 세우는 것보다 일정 부분 기술력을 갖춘 기업을 인수해 단숨에 점유율을 끌어올리는 것이 효율적이란 판단에서다. 삼성은 2015년 모바일 결제 전문업체 루프페이를 사들인 덕분에 삼성전자의 휴대폰에 삼성페이를 탑재할 수 있게 됐다. 삼성페이는 국내 모바일 결제시장을 접수한 데 이어 유럽과 중국, 동남아시아, 호주 등에도 진출한 성공적인 M&A 사례로 평가된다. 2016년에는 미국의 하만을 인수해 전장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계기로 삼았다.
한화그룹의 경우에도 한화케미칼, 한화생명, 한화큐셀, 한화토탈 등 그룹의 핵심으로 꼽히는 화학과 보험, 방위산업 분야 계열사들이 모두 M&A를 통해 이룬 결실이다.
M&A의 실패 사례도 적지 않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2006년 대우건설, 이듬해 대한통운을 인수하며 순식간에 재계 서열 7위까지 오를 정도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곧이어 찾아온 글로벌 금융위기 때 재무상태가 급격히 악화하면서 두 회사를 다시 헐값에 내놔야 했다. 그럼에도 유동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금호타이어, 금호석유화학, 아시아나항공 등을 매각한 데 이어 지난해 말에는 그룹 내 컨트롤타워인 전략경영실 폐지를 발표하는 등 사실상 그룹 해체 수순을 밟았다.
재계 관계자는 “M&A로 기업을 단숨에 키우려는 생각은 도박이나 마찬가지”라며 “SK도 SK하이닉스와 SK텔레콤 등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일부 사업을 매각하고, 자산을 처분하는 등 다양한 구조조정으로 착실하게 실탄을 마련한 것과 달리,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오너가의 방만한 경영과 임원들의 비리가 겹치면서 M&A 성과를 발로 차버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세준 기자 3j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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