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민주당원들의 기억 속에 2000년 대선은 쓰라린 패배로 남아있다.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는 일반투표에서 공화당 조지 W 부시 후보를 54만여표 앞섰으나 정작 대선 승부를 좌우하는 선거인단 집계에서는 부시 후보가 5명 앞섰다.(부시 271명, 고어 266명) 연방대법원까지 개입하는 우여곡절 끝에 부시는 불과 537표 차로 고어를 누르고 플로리다 선거인단 25명을 차지하며 대선에서 승리했다. 플로리다가 고어에게 갔으면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당시 진보 진영에서는 녹색당 후보로 출마한 랠프 네이더 책임론이 흘러나왔다. 진보 성향의 네이더가 고어 표를 잠식한 탓에 플로리다를 빼앗겼다는 비판이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 격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고어와 네이더의 지지층이 일부 겹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2000년 대선 승부는 네이더가 플로리다에서 얻은 9만7488표가 갈랐다고 볼 수 있다. 



 

올해 대선에서도 진보 진영에선 녹색당의 질 스타인 후보가, 보수 진영에선 자유당의 게리 존슨 후보가 각각 출마했다. 

민주, 공화 양당제가 정착된 미국 대선에서는 제3후보가 여간해선 판세를 좌우하기 힘들다. 역대 대선에서 제3후보들은 항상 있었지만 존재감이 미미했다.

 

 스타인과 존슨은 2012년 대선에서도 각각 녹색당, 자유당 후보로 나섰지만 그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올해 대선에서는 제3후보 변수가 중요해졌다.

미국 자유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된 게리 존슨 전 뉴멕시코 주지사가 지난 5월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열린 자유당 전당대회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올랜도=AP연합뉴스

무엇보다 스타인이나 존슨 같은 제3후보의 득표 공간이 대폭 확장됐다. 역대 어느 대선보다 민주, 공화 후보를 싫어하는 유권자층이 두꺼워졌기 때문이다. 지난달 26일(현지시간) 발표된 월스트리트저널(WSJ)·NBC의 조사에 따르면,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와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비호감도가 각각 55%, 60%에 달했다. 클린턴과 트럼프를 지지한 응답자 대부분이 두 후보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상대 후보가 더 싫어서 어쩔 수 없이 클린턴이나 트럼프를 선택했다는 얘기다.

4자 구도의 지지율은 클린턴(39%), 트럼프(38%), 존슨(10%), 스타인(6%) 순으로 나타났다.

 

 

지지후보가 없다는 응답자(7%)에게 한번 더 물었더니 이들 중 존슨과 스타인을 택하겠다는 응답이 각각 31%, 17%에 달했다. 트럼프와 클린턴에게 표를 던지겠다는 응답은 12%, 8%에 불과했다. 본선전이 본격화하면 민주, 공화당 후보에게로 표가 결집되는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현재까지는 제3후보의 득표력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하나, 2012년 대선 당시 4% 포인트 미만 격차로 승부가 갈린 곳이 4개주 나왔는데 올해 대선에선 2000년 대선의 플로리다처럼 제3후보가 승부를 가르는 주들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커졌다. 


1992년부터 2012년까지 역대 6차례 대선을 돌아보면 민주당 후보는 펜실베이니아 등 18개 주와 워싱턴DC에서 연전연승했다. 그래서 이들 18개 주는 ‘민주당 장벽(Blue Wall)’으로 불렸다. 그런데 올해 대선에서는 트럼프 후보가 민주당 성향의 백인 노동자층을 흔들면서 민주당 장벽의 일각을 허물어뜨리고 있다. 민주당 아성이 경합주(Swing State)로 바뀐 것이다.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주가 특히 그렇다. 최근 6차례 대선 중 민주당이 5번 승리한 아이오와와 뉴햄프셔주, 4번 승리한 오하이오주 같은 민주당 우세주도 이번엔 경합주로 변했다. 의회 전문매체인 ‘더 힐’은 28일 이들 경합주에서 클린턴과 트럼프가 오차 범위 내 접전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현재로선 제3후보가 클린턴과 트럼프 중 누구에게 치명타를 가할지 예단하기는 쉽지 않다. 진보 성향의 스타인 후보는 클린턴 후보와, 보수 성향의 존슨 후보는 트럼프 후보와 지지층이 일부 겹친다. 박빙 경합주에서 존슨이 선전하면 클린턴이, 반대로 스타인의 득표력이 커지면 트럼프가 웃을 것이다.



 

미국 녹색당 대통령 후보 질 스타인

참고로 존슨의 자유당은 50개주 모두에서, 스타인의 녹색당은 50개주의 4분의3 정도에서만 투표용지에 이름을 올릴 것으로 전망됐다. 이는 클린턴에게 반가운 소식이다. 하지만 충성도에 있어서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클린턴 지지자들보다 단단한 것으로 집계됐다. WSJ·NBC조사의 클린턴·트럼프 양자대결 상황에서 클린턴을 택한 응답자는 4자 구도에서 13%가 제3후보로 이동한 반면 트럼프 지지자들은 같은 상황에서 9%만 떨어져 나갔다. 

조남규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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