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23일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경제성장의 과실을 즐기며 살아온 미 중산층은 전 세계인의 모델이었다. 같은 회사에서 높은 임금과 의료보험 같은 양질의 복지혜택을 받으며 40년 정도 근무한 후 기업연금 보장을 받으며 은퇴했다. 그리고 안락한 노년을 즐기다 편안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적자생존의 경쟁이 더 치열해지고 사회적 불평등이 더 심화하고 사회안전망에 구멍이 뚫리면서 중산층의 삶은 고단해지기 시작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비우량 주택담보대출) 금융위기가 촉발한 최근의 경제 침체는 그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

    ◆경제 침체 직격탄 맞은 미 중산층=아이다호주 보이즈에 거주하는 릭 캡(44)은 부인과 두 자녀를 둔 평범한 중산층 가장이었다.

    2003년 보이즈에 위치한 반도체 생산회사에서 연봉 6만5000달러의 괜찮은 일자리를 구했다. 이사오면서 30년 상환 주택담보대출(모기지론)을 받아 17만5000달러짜리 집도 한 채 장만했다. 부인은 대학에 등록했고, 첫째 아이에게는 바이올린 레슨을 시켰다. 디즈니랜드로 가족여행도 다녀왔다. 그러면서 학자금 대출(4만달러)과 신용카드 빚(1만1000달러)이 생겼으나 집값(30만달러)이 뛰었던 만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2006년 말 부동산 가격과 주식 가치가 추락하면서 상황은 일변했다. 캡의 가족은 허리띠를 졸라맸으나 지난해 10월 캡이 정리해고되면서 ‘빈곤선’(4인가족 기준 연 수입 2만1200달러 이하) 으로 내려앉았다. 미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은 캡 가족의 일화를 전하면서 “보이즈의 실업률이 지난해 11월 6%로 전년 동기보다 3.3% 늘었다”고 보도했다.

    중산층을 위협하는 실업 공포는 보이즈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 노동부의 1월 초 발표에 따르면, 미 전역에서 2008년 한 해 동안 사라진 일자리는 250만개에 달했다. 이 같은 수치는 1945년 이래 최대치다. 실업률은 지난해 12월 7.2%로 치솟았다. 지난주(1월12∼17일) 조사에서도 신규 실업자 수가 58만9000명으로 한 주 전에 비해 6만2000명이 증가했다고 미 노동부가 22일 발표했다.
    ◆의료비로 파산하는 미 중산층=쿠바 망명자 후손인 호세 카브레라는 2005년 의료빚 때문에 개인파산을 선고받았다. 급성충수염으로 입원해 수술하고 하루 입원했을 뿐인데 병원 측은 그에게 1만2000달러를 청구했다. 다니던 회사 보험으로는 충당할 수 없어 신용카드로 의료비를 갚아 나가던 중에 아내가 출산하면서 병원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저널리스트인 쓰쓰미 미카는 저서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에서 “1980년대 이후 미 정부가 복지 축소정책으로 전환한 후, 중산층 사람들이 잇달아 파산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2005년 통계를 보면 개인 파산 204만 건 중 절반 이상이 비싼 의료비 부담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의료보험제도가 없는 미국에서 의료비는 중산층의 가계를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요소다. 전미의학생협회(AMSA)에 따르면 미국민 가운데 의료보험 무가입자는 4600만명으로 이 중 900만명이 어린이다. 직장에서 의료보험을 제공하는 회사도 2006년 전체 회사의 59%로 줄었다. 카브레라의 경우처럼 보험은 있지만 보장이 불충분한 보험 가입자도 2500만명에 달해 자칫 큰 병에 걸리면 빈곤층으로 내려앉기 일쑤다. 질병이 걸리면 해고를 당하기 쉽고 해고를 당하면 직장의료보험 혜택도 없어진다. 그들 중엔 가진 돈을 다 써버리고 자진해서 공적 의료보험(메디케이드) 대상인 빈곤층이 되기도 한다.

    중산층을 재생산하고 빈곤층 자녀의 사회적 이동을 촉진하는 교육체계도 제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미 대학 등록금은 지난 25년 동안 중산층 가계소득 증가 추세를 앞질러 중산층 미국인들이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 됐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미국공공정책고등교육센터(NCPPHE) 연례 보고서를 인용해 대학 등록금과 각종 경비가 1982∼2007년 사이에 439% 상승, 같은 기간 중산층 가계소득 증가율(147%)을 3배 가까이 넘어섰다고 보도했다.

    ◆중산층 제약하는 소득 불평등=지난 30년 동안 미국 전체 경제는 성장했으나 실질 가계 소득 증가율은 별로 나아진 게 없다면 그 모든 부는 어디로 간 것일까? UC버클리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인 로버트 라이시는 최근 저서 ‘슈퍼자본주의(Super Capitalism)’에서 이 같은 물음을 던진 뒤 “대개는 가장 높은 곳(소득 최상층부)으로 갔다”고 진단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저서 ‘한 진보주의자의 양심(The Conscience of a Liberal)’에서 “현실적으로 극심한 소득 불균형은 극심한 사회 불평등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라면서 “수백만의 중산층 가정이 자녀를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실제 형편보다 무리해서 집을 사고, 갚을 수 있는 능력보다 많은 빚을 지는 것은 큰 문제”라고 우려했다.

    하버드 법대 파산법 전문가인 엘리자베스 워런 교수는 2005년 보스턴리뷰에 “미국 중산층은 욕심이 많거나 멍청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녀에게 점점 더 불평등해지는 사회에서 기회를 마련해 주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가운데 어쩔 수 없이 빚을 지게 됐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 조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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