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 투척은 고대부터 조롱과 모욕, 처벌, 항의의 수단으로 이용됐다. 로마나 중세 시대에는 관객들이 연극이나 거리 공연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계란을 던지며 야유했다는 기록이 있다. 민중의 분노를 산 권력자나 종교 지도자들도 공개 석상에서 계란 세례를 받아야 했다. 계란은 맞는 사람에게 심각한 상해를 입히지는 않지만 계란이 깨지면서 나오는 내용물 때문에 상당한 불쾌감을 안길 수 있다. 계란 투척이 오랫동안 이런 용도로 쓰이다 보니 영미권에선 ‘egg on one’s face’(수치스럽다)라는 숙어도 생겨났다.
선거의 시대가 열리면서 계란 공격은 종종 정치인을 향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인 2002년 전국농민대회 연설 도중 얼굴에 계란을 맞고 “달걀을 맞아 일이 풀리면 얼마든 맞겠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계란을 한 번씩 맞아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 화가 좀 안 풀리겠느냐”는 어록을 남겼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07년 “BBK 전모를 밝히라”고 외치는 남성에게서 계란을 맞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퇴임 후인 1999년 페인트가 주입된 계란을 맞고 얼굴이 페인트로 벌겋게 뒤덮이는 봉변을 당했다. 김 전 대통령은 “살인적 행위”라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고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은 징역형을 받았다.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2021년 계란을 맞은 뒤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면 이리 오게 해달라”며 관용의 제스처를 취해 대범하다는 인상을 남겼다. 반대로 영국 노동당 집권기에 부총리를 지낸 존 프레스콧은 2001년 총선 유세 현장에서 계란을 던진 남성을 주먹으로 갚아줬다.
계란 투척 사건이 정국의 흐름을 바꾼 적도 있다. 노태우 정부 시절 정원식 총리는 1991년 한국외대를 방문했다가 학생들이 던진 계란과 밀가루를 뒤집어쓴 채 쫓겨났다. 그 장면을 담은 사진이 도하 일간지 1면에 실리면서 학생운동을 바라보는 여론이 급속히 악화됐다. 결과적으로 여권에 도움이 됐다. 더불어민주당 백혜련 의원이 어제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도중 건너편 인도에서 날아온 계란에 얼굴을 맞았다. 부활과 희망의 상징인 계란이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와중에 또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로 변질됐다.
“좋은 뉴스든, 나쁜 뉴스든 거짓 없이 전하겠습니다.”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2월1일 미국 전쟁정보국 소속 아나운서인 윌리엄 할란 헤일이 독일어로 방송을 시작했다. VOA(Voice of America·미국의 소리)는 나치 독일과 일본 등 추축국(樞軸國)의 선전선동에 대응하고 미국이 주도한 연합국의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해 창설됐다. 나치 점령하에 놓인 프랑스에선 레지스탕스 대원들에게 연합군의 전황 등을 전하며 사기를 진작시켰다. 프랑스 시민들이 샤를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정부를 지지하도록 유도하는 방송에도 주력했다. 종전 이후에는 소련과 동유럽, 북한, 이란처럼 정보 통제가 심한 나라를 겨냥했다. 지금은 약 50개 언어로 송출되는 국제방송으로 성장했다.
한국어 방송은 일제강점기인 1942년 시작됐다. 일본이 해외 라디오 청취를 금지했지만, 소수의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외에서 VOA 방송을 듣고 전황을 파악했다. 남북 분단이 고착된 이후 한국어 방송은 북한 주민에게 자유민주주의를 전파하고 북한의 실상을 전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VOA 방송 청취는 북한 정권이 극도로 경계하고 적발 시 가혹하게 처벌하는 중범죄다. 그런데도 탈북민 중에는 단파 라디오로 VOA 방송을 듣고 탈북을 결심했다고 전하는 이들이 많다. 대북 단체들이 풍선에 단파 라디오를 넣어서 북한으로 띄우는 이유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예산 삭감 조치로 VOA가 존폐 갈림길에 섰다. 표면적 이유는 재정적자 감축이지만 배경에는 트럼프 정부와의 불화가 깔렸다. 1기 때도 트럼프 대통령은 VOA가 중국이나 코로나19 팬데믹 보도에서 정부의 입장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측근을 VOA 모회사인 미국 국제방송국 수장으로 임명해 통제에 나섰다. VOA는 리처드 닉슨이나 로널드 레이건 정부 때도 베트남전쟁 보도 등에서 국익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부와 갈등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후에 생각을 바꿔 예산을 늘려주고 VOA를 소련과 동유럽의 민주화를 촉진하는 도구로 활용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그럴 뜻이 없어 보인다.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의 바람을 불어넣어 주던 VOA가 사라진다면 우리에게도 손실이다.
대한민국 헌법기관들이 흔들리고 있다. 헌법에 설치 근거가 명시된 대통령과 국회, 헌법재판소,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기둥 같은 기관들이다. 이런 기관들이 잦은 오작동으로 국민의 신뢰를 잃으면 기둥에 금이 가고 헌정 체제가 붕괴한다. 현행 대통령제에 빨간불이 켜진 지는 한참 됐다. 제왕적인 대통령 권력의 주변부터 문제가 생기더니 급기야 대통령까지 무너지기 시작했다. 대통령 수난사는 참담할 지경이다. ‘1987년 헌정 체제’ 이후만 돌아봐도 8명의 대통령 가운데 3명이 국회에 의해 탄핵소추돼 1명은 파면됐고 1명은 파면 위기에 몰렸다. 1명은 수사를 받던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명은 임기가 끝난 뒤 구속되고 사법처리됐다. 미국은 건국 이후 249년 동안 46명의 대통령이 나왔지만 탄핵당하거나 구속된 대통령은 단 한 명도 없다. 우리 대통령제는 미국 제도를 본떠서 우리 현실에 맞게 튜닝한 것이다. 위험 요소를 방치하면 더 큰 사고를 낳는다. 대통령 머리 위에 씌워진 왕관은 벗겨내야 한다.
국회는 직접선거를 통해 국민 주권을 위임받은 헌법기관이다. 그런 기관은 대통령과 국회뿐이다. 어느 한 쪽이 다른 쪽보다 우월하지 않은 정통성을 가진다. 이런 ‘이원적(二元的) 정통성’은 양날의 칼이다. 동등한 두 기관이 서로 견제하면 대통령은 독재자가 될 수 없고 국회 다수당은 폭주하기 어렵다. 그런데 한국에선 정반대의 현실이 전개됐다. 대통령은 독재정권 시절에 발동됐던 비상계엄 카드를 꺼내 들었다. 국회를 장악한 거야는 정략적 탄핵안을 남발하고 입법권을 남용하면서 국정을 마비시키려 했다. 여소야대에 갇힌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통령 권력을 야당과 나누겠다는 ‘대연정’ 제안을 던진 게 2005년이다. 당시 노 대통령의 발언을 걷어찬 게 지금의 여당이다. 어느 쪽이 권력을 잡든 여소야대만 되면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 언제까지 이런 공멸의 쳇바퀴만 돌릴 셈인가.
선관위는 독립적 헌법기관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간부들의 특혜채용 적발 건수가 10년간 878건이라는 최근의 감사 결과는 오히려 부차적이다. 존재 이유인 선거의 공정성 토대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소쿠리 투표’, ‘편파 판정’ 얘기가 나오더니 이제는 선관위 사무총장이 ‘세컨드폰’을 이용해서 정치인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헌법재판소는 ‘선관위는 헌법기관이라서 감사원 감사 대상이 아니다’라는 결정을 내놨다. 헌법기관은 헌법 위에 존재하나. ‘견제와 균형’이라는 헌법원리를 외면한 기계적 해석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헌재 재판관 9명과 선관위원 9명은 국민이 선출하지 않는다. 대통령과 국회, 대법원이 3인씩 임명·선출·지명한다. 대통령과 국회는 선거를 통해 국민에게 책임지는데 헌재 재판관과 선관위원은 누구에게 책임지나. 국민의 신뢰가 약해지면 헌재 재판관과 선관위원들이 자신을 지명해 준 대통령이나 대법원, 여야 정당에만 충성한다는 인식이 확산한다.
헌재 재판관 8명이 탄핵소추된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 여부를 조만간 결정한다. 국론은 두 쪽으로 갈라졌다. 4일 공개된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조사에서는 탄핵 찬반 여론이 54.0% 대 44.5%였다. 노무현·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사태 때는 진보 진영의 촛불집회가 압도했지만 이번엔 탄핵 찬반 진영이 모두 결집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윤 대통령은 승복 메시지를 내놓지 않고 있다. 헌재 결론이 어느 쪽이든 절반의 국민은 반발할 태세다. 헌재 결정은 분열된 국론을 다시 통합시키는 계기가 돼야 한다. ‘정의는 단지 실현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실현되는 것이 보여야 한다’는 법언(法諺)이 있다. 헌재가 변론 과정에서 공정성 논란을 야기한 점은 안타깝다. 결론을 도출하는 평의 과정에서 제기된 흠결을 최대한 고쳐야 한다. 당사자 모두가 만족하는 결론은 있을 수 없다. 재판관들의 지혜를 모아서 ‘가장 덜 불완전한’ 결정을 내려 달라는 주문을 하고 싶다. 선출되지 않는 재판관들이 국민이 뽑은 대통령의 파면 여부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거침없는 ‘미국 우선주의’ 행보로 전 세계가 요동치고 있다. 미국이 설계하고 관리해온 ‘자유주의 세계질서’(liberal world order)는 트럼프의 미국에 의해 훼손되고 있다. 세계가 다시 약육강식의 ‘정글’로 변해가고 있는 것일까.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대표적 수혜국인 대한민국호는 격변의 풍랑 속에서 선장을 잃은 채 표류하고 있는 처지다.
트럼프 1기 집권기에 주미 대사를 지낸 안호영 경남대 석좌교수는 트럼프발 리스크와 관련, “지엽적 사안에 매몰되지 말고 한·미가 ‘윈윈’할 수 있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보 분야에선 트럼프의 ‘힘에 의한 평화’(peace through strength) 실현을 위해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통상의 경우 관세만 바라보지 말고 미국이 원하는 산업 협력 방안을 제시하라고 제언했다. 지난달 17일 서울 종로구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대면 인터뷰를, 지난 3일 전화 인터뷰를 진행했다.
트럼프 1기 집권기에 주미 대사를 지낸 안호영 경남대 석좌교수가 지난달 17일 서울 종로구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트럼프발 리스크 대응 방안 등을 얘기하고 있다. 남정탁 기자
―트럼프 2기의 충격파가 1기 때보다 더 강하고 전면적이다. 미국 기류는 어떤가.
"트럼프 정부가 동맹과의 관계를 재조정하는 방식이 유럽에는 굉장히 거칠고 아시아에는 상대적으로 덜 거칠다는 느낌이다. 지난주 참석한 워싱턴 세미나에서 미국 측 참석자들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파국으로 끝난 트럼프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회담이 상징하듯 미국은 유럽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반면 트럼프와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의 정상회동은 화기애애했다. 지난 주 미국을 찾은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 등과의 회동 분위기도 좋았다고 한다. 요즘 미국 외교가에서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를 패러디해서 트럼프가 ‘두 지역 이야기’(A Tale of Two Regions)를 쓰고 있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트럼프의 아시아에 대한 유화 기조가 또 변하지 않겠느냐, 변하지 않게 하려면 뭘 해야 하느냐는 논의가 오가고 있다. 전임 조 바이든 미 행정부에서 국무부 부장관을 지낸 커트 캠벨 같은 인사들은 ‘트럼프가 공짜로 잘해주지는 않는다. 뭔가 기대가 있어서 그럴 텐데 그걸 잘 파악해서 대응해야 한다’는 취지의 조언을 했다.”
―트럼프 정부의 외교 안보 담당자들이 동북아 현안을 얘기하면서 한·미·일 안보 협력을 부쩍 강조하고 있다.
“마이클 왈츠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보좌관이 최근 어느 대담 자리에서 ‘한·미·일 3자 협의체’(2023년 당시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만든 경제·안보 협의체)를 높이 평가하는 걸 들었다. 한·일이 그렇게 사이가 안 좋은데 바이든이 이걸 만들어낸 건 대단한 업적이라는 것이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도 같은 생각이다. 캠벨이 최근 강연에서 한·일을 향해 ”부끄러워하지 말고 한·미·일 3국 협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제안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라. 그게 미국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유지할 방법“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경청해야 할 조언이다.”
―미국의 한·미·일 협력 주문은 다분히 패권 경쟁국인 중국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자유주의 국제질서 속에서 성장해온 중국은 이제 “지구는 중국과 미국이 각자 발전할 만큼 넓다”(시진핑 국가주석)고 말할 정도로 강해졌다.
“미국의 방향 전환에는 중국이 기여한 바가 크다. 중국 상품이 상상할 수 없는 싼 가격으로 미국으로 들어갔다. 미국 제조업이 막대한 피해를 봤다. 미국은 무역뿐 아니라 안보 분야에서도 중국을 견제해야겠다는 전략적 판단을 하게 됐다. 우리는 미국의 동맹국으로 중국 견제를 뼈대로 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기여할 수 있는 분야가 많다. 재래식 군비 규모만 봐도 미국, 러시아, 중국, 인도에 이어 5위다. 트럼프가 원하는 군함 건조나 ‘괴물 미사일’로 부르는 현무 등 방산 능력도 월등하다.”
―세계무역기구(WTO) 다자무역체제는 미국이 주도적으로 설계한 세계 경영 체제다. 트럼프 대통령은 왜 이 체제를 무시하고 있나.
“강대국은 룰을 만드는 나라다. 불리하면 새로운 룰을 만든다. 미국 내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무역 적자가 커지고 국내 제조업이 쇠락하자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대한 회의감이 커져갔다. 전임 조 바이든 민주당 정부도 자유무역 체제를 손질해 무역불균형을 바로잡으려 했다. 트럼프는 ‘그런 미적지근한 대응은 안 된다. 기존 룰은 잊고 새로운 방향으로 가자’고 한다. 트럼프는 WTO 규약 같은 ‘법의 지배’(rule of law)를 미국에 유리한 ‘힘의 지배’(rule of power)로 바꾸려 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동맹도 봐주지 않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트럼프 2기 내각에는 1기 정부의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같은 ‘어른의 축’도 보이지 않는다.
“매티스는 트럼프 정부가 출범한 지 불과 한 달 만인 2017년 2월 방한했다. 당시 주미 대사였던 저에게 ‘미국은 동맹이 있어 강하다. 그렇게 소중한 동맹이 지금 (대통령 탄핵 사태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느냐. 그런 한국을 먼저 가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큰 감동을 받았다. 지금 매티스 같은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건 부질없다. 이제 트럼프의 생각을 읽고 거기에 맞춰야 한다. 트럼프는 ‘힘에 의한 평화’라는 말을 자주 한다. 방점이 ‘힘’이 아니라 ‘평화’에 있다. 트럼프는 집권 1기 4년 동안 미국이 새로운 전쟁을 단 한 건도 시작하지 않았다는 점을 대단한 치적으로 생각한다. 북한을 향해서도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결국 김정은과 마주 앉지 않았나.”
2017년 5월 안호영 주미 대사가 백악관 집무실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 홍석현 대미특사, 트럼프, 안 대사, 마이크 펜스 부통령.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에서 러시아를 편들고 있다. 러시아에 군대를 보낸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는 러브콜을 보냈다. 북핵 협상 과정에서 미·북·러가 밀착하면 한국이 배제될 수 있다.
“트럼프가 워낙 독특한 리더십을 가진 인사라 그건 모른다. 항상 긴장해야 한다. 북·미의 ‘핵군축’ 회담 가능성도 나왔다. 그런데 최근 미·일 정상회담과 한·미·일 외교장관 회담에서는 ‘북한의 비핵화’ 목표가 재확인되기도 했다. 트럼프도 북한 비핵화가 중요하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김정은을 너무 궁지로 몰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좀 다독거리면서 가자는 생각인 것 같다.”
―트럼프 정부의 통상 압박이 전방위로 가해지고 있다. 관세만 놓고 봐도 국가·품목별로 보편·상호 관세를 총동원하고 있다.
“관세는 국가별 협상이 시작되면 미국과 예외 교섭을 해야 한다. 트럼프 1기 때도 한국 세탁기를 대상으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발동하고 관세를 부과했다. 월풀 등 자국 세탁기 제조업체가 피해를 보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미국에 생산 공장을 짓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번에도 한국 기업들은 미국 투자를 늘리는 수밖에 없다.”
―최근 한·미의 외교장관, 통상장관들이 만나서 조선 분야와 원자력·액화천연가스(LNG) 같은 에너지 분야, 첨단 기술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트럼프가 원하는 협력 분야들이다. 지난 달 미·일 정상회담에서 이시바 총리가 미국 알래스카 LNG 송유관 건설 사업에 투자하겠다고 했는데 그게 트럼프에게는 무척 반가운 말이다. 이 사업은 트럼프 1기 때부터 나온 얘기다. 주미 대사 시절 알래스카 주지사가 찾아와서 우리에게도 송유관 투자를 요청했지만 막대한 비용 문제로 성사되지 못했다. 일본이 그걸 잊지 않고 있다가 이번 정상회담에서 트럼프에게 선물로 제시한 것이다. 이제는 여건이 변했다. 트럼프가 우리 철강에 25% 관세를 때린다고 하지 않나. 송유관을 수천㎞ 깔려면 철강이 필요하다. 철강 관세를 피할 수 있다. 가스 상태의 LNG를 운반하려면 액체로 냉각시켜야 한다. 냉각 기술이나 LNG 플랜트·수송선 건조 기술은 한국이 제일 잘한다. 반도체도 메모리는 우리가 세계 1위이고 원전도 우리는 ‘저비용, 적시 시공’이 가능하다. 조선업은 트럼프가 한국과 협력하고 싶다고 한 분야다.”
―세계가 트럼프 리스크 관리로 분주한데 우리는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탄핵 소추돼 ‘대행의 대행’ 체제다.
“대통령 권한대행이 총리인 것과 기획재정부 장관인 것은 차이가 있다. 한 권한대행은 총리 두 번에 주미 대사 등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런 이력을 지닌 인사는 세계에서도 흔치 않다. 트럼프가 봤을 때 그 정도면 정상 통화는 할 만하다고 평가했을 것이다. 첫 집권 때는 트럼프 취임 열흘 만에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과 정상 통화가 이뤄졌다.”
1939년 8월 20일 독일 총통인 히틀러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인 스탈린에게 직접 서한을 보냈다. 폴란드 침공을 앞두고 소련과 불가침 협정을 맺기 위해서였다. 사흘 뒤 소련 모스크바에서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됐다. 양국은 서로 공격하지 않고 상대국을 공격하는 국가에 가담하지 않기로 했다. ‘평화 조약’으로 선전했지만, 이 조약으로 인근 약소국들의 운명이 결정됐다. 당시 공개되지 않은 ‘비밀 의정서’에는 양국이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고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을 소련에 편입시킨다는 조항이 포함됐다. 조약 체결 이후 한 달도 되지 않아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를 침공해 나눠 가졌다. 강대국들이 전략적 이익을 위해 약소국이나 이해관계자를 희생시킨 대표적인 ‘더티 딜(dirty deal)’이었다.
더티 딜은 강대국 사이에서만 이뤄지는 건 아니다. 1986년 11월 3일 레바논의 주간지 ‘알 쉬라’ 특종보도로 세상에 드러난 ‘이란·콘트라 스캔들’이 그렇다. 레이건 미 행정부는 적대국이었던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고 판매 대금 중 일부를 니카라과 좌파 정권에 맞서 싸우는 콘트라 우파 반군 지원에 썼다. 이는 미국의 대이란 무기수출 금지 정책과 콘트라 반군 지원 금지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불법 거래였다. 특별검사의 수사로 존 포인덱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올리버 노스 해병대 중령 등이 기소됐다. “테러단체와는 거래하지 않겠다”고 공언해온 레이건 대통령의 명성에도 금이 갔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더티 딜을 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부 장관은 우크라이나의 요구 사항인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이나 영토 수복 등에 대해 냉정히 선을 그으며 이런 관측에 힘을 실었다. 그러자 키스 켈로그 미 대통령 우크라이나·러시아특사는 17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에 평화협정을 강요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며 일각의 우려를 불식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푸틴의 협상 의지를 신뢰한다”는 트럼프가 어떤 딜을 할지, 우크라이나와 서방 국가들은 마음을 졸이고 있다. 우리도 눈을 부릅뜨고 북·미의 더티 딜을 경계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