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미국 가정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로렌조 오일’은 아들의 희귀 유전병을 고치기 위해 헌신하는 부모의 감동 스토리다. 로렌조의 진단명은 부신백질이영양증(ALD). 뇌의 백질이 파괴되면서 점차 운동과 언어·시각 기능을 상실하는 절망적인 병이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980년대만 해도 치료법이 없었다. 부모는 의학 논문 등을 독학하면서 병의 원인을 추적해 두 가지 식물성 기름을 조합한 치료 약을 만들어 낸다. 영화의 제목이 된 ‘로렌조 오일’이다. 병의 진행이 늦춰졌지만 호전되진 않았다. 영화는 로렌조의 거동이 불편해지는 엔딩을 담담히 보여준다. 지금은 로렌조 오일보다 효과가 좋은 신약이 개발됐다. 완치 약이 아닌데도 1회 투여 가격이 300만달러(43억여원)에 이른다. 서민은 꿈도 꾸지 못할 액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희귀질환을 ‘유병률이 매우 낮고 공중보건 개입이 필요한 질환’으로 폭넓게 정의하지만, 우리는 유병 인구 2만명 이하이거나 진단이 어려워 유병 인구를 알 수 없는 질환으로 규정한다. 올해 기준 1389개의 질환이 희귀질환으로 국가 관리 대상 목록에 포함됐다. 매년 5만~6만명대의 환자가 추가로 희귀질환 진단을 받고 2000명 안팎의 환자들이 사망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치료 약 자체가 없는 질환도 있지만, 상당수는 혁신 신약이 있어도 너무 비싼 가격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죽어간다.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희귀난치병 의료비 지원 정책을 펴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가장 큰 걸림돌은 건강보험 재정 악화 우려다. 대표적으로 척수성근위축증 치료제 ‘즐겐스마’는 1회 투약분이 20억원에 달하는데 2022년 건보 급여가 적용된 뒤 환자 본인 부담은 600만원으로 줄었다. 이런 질환이 적지 않다 보니 환자 수는 적어도 선뜻 건보 급여 대상에 올릴 수가 없다.
이재명 대통령이 성탄절 이브에 희귀질환 환우와 가족들을 찾아 “사람의 생명은 귀한 것인데 소수란 이유로 배제되거나 불이익을 받거나 소외되면 안 된다”고 말했다. 건보 급여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이 대통령이 업무보고 과정에서 불쑥 꺼낸 탈모 치료제보다는 희귀질환 치료 약이 더 시급하다.
김수환 추기경은 말년에 건강이 악화하자 일체의 연명 의료를 거부한 채 선종했다. 법정 스님도 위독해지자 연명 의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열반에 들었다. 미국의 평화운동가인 스콧 니어링은 100세가 되던 해 스스로 곡기를 줄여가며 육신에서 벗어났다. 주변에서도 임종기에 이들과 같은 방식으로 삶을 마무리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초월했기에 가능한 선택일 것이다.
고령화와 의료 기술 발전 등으로 연명의료 환자 수는 급격히 늘고 있다. 이제 일반인들도 품위 있고 존엄한 죽음인 ‘웰다잉(Well-dying)’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생명 유지 장치를 주렁주렁 매달고 확정된 죽음을 연기하는 조치는 무의미하다는 자각이 퍼져나가고 있다. 2018년 2월 시행된 ‘연명 의료결정법’은 그런 자각이 낳은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점이다.
연명 의료 중단은 환자의 선택권과 생명권이 충돌하는 민감한 사안이다.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르면 사전연명 의료의향서를 작성한 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 장착, 수혈 등의 연명치료는 중단할 수 있으나 영양 공급은 지속해야 한다. 법 제정 과정에서 영양 공급 중단은 생명권 침해라는 종교계 등의 입장이 강했기 때문이다. 올 8월 의향서 등록자는 300만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의향서 작성 환자라 해도 가족들이 환자의 뜻과 무관하게 연명치료를 이어가는 사례도 많은 실정이다. 가족이라 해도 구성원마다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최근 ‘BOK 이슈 노트’에서 연명 의료의 경제적 부담 증가를 언급하며 “사전연명 의료의향서를 통해 자신의 의료 선호를 명확히 표명한 사람에게는 건강검진 항목 확대나 건강보험료 인하와 같은 실질적 혜택을 부여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고 제언했다. 이 보고서를 읽어본 것인지 이재명 대통령도 지난 16일 보건복지부 업무보고에서 연명치료 중단 환자에게 건강보험료 감면 등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안을 고민해달라고 지시했다. 환자와 가족, 나아가 사회 전체의 부담을 키우는 연명 의료는 줄여나가는 것이 모두에게 바람직한 방향이다. 그런데 환자의 선택권이냐, 생명권이냐는 연명의료 중단 논쟁에 느닷없이 인센티브라는 돈의 개념이 끼어드니 무척 당혹스럽다.
정당 없는 민주주의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민주주의 기틀을 잡은 미국 헌법엔 정당 조항이 없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정당을 ‘필요악’ 정도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정치 결사체는 필요하지만 그렇게 모인 집단은 사회 전체에 해악을 끼친다는 인식이었다.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퇴임 고별사에서 정당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신중한 대응을 촉구했다. 워싱턴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미국의 주요 정당인 공화·민주는 최근의 연방정부 셧다운(일시적 업무 중지) 사태가 보여주듯 정파적 이해를 국익과 민생 앞에 두는 행태를 보인다. 중도 성향 민주당 상원의원 7명이 당론과 다른 소신투표로 셧다운 교착 국면을 해소한 게 뉴스거리가 됐을 정도다. 정쟁이든 양극화든 한국 정치는 선두권이다. 양극화 원인을 놓고는 닭(정당)이 먼저냐, 달걀(강성 지지층)이 먼저냐는 논란도 있지만, 지금은 정당과 지지층이 함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다.
정치 현실에서 강성 지지층은 순기능도 발휘한다. 판을 뒤엎고 정치 지형을 변화시키는 촉매 역할을 한다. 노무현 지지 모임인 ‘노사모’는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도입된 국민참여 경선에서 반전의 정치혁명을 이뤄냈다. 노사모가 주도했던 지지자의 정당 경선 참여와 선거자금 모금 등은 이후 각 정당의 상향식 공천과 정치자금 개혁 같은 제도 개혁으로 이어졌다. 진보 진영의 열성 지지자들은 문재인·이재명 팬덤으로 변화하면서 이제는 더불어민주당을 좌지우지하는 주요 세력으로 부상했다. 민주당은 지지층을 대거 당원으로 편입시키며 100만 당원 시대를 열었다. 대다수 당원이 지난 대표 경선에서 노무현 키즈인 정청래를 밀어 올렸다.
정 대표가 최근 ‘당원중심 정당’을 표방하며 당원 투표 비중을 더 높이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당의 주인인 당원의 권리가 커져야 ‘정당 민주주의’가 발전한다고 했다. 권리당원과 대의원 표의 비중을 지금의 1대 17 수준에서 1대 1로 바꾸자고 한다. 이렇게 되면 당장 내년에 치러질 대표 경선에서 당원 세가 강한 정 대표는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된다. 대표를 어떻게 선출하느냐는 문제는 당의 구성원이 자체적으로 결정할 일이다. 정치권의 관심사는 민주당의 당헌·당규 개정으로 누가 이익을 보느냐는 문제겠지만, 국민은 권리당원의 위상 강화가 가져올 후유증을 걱정한다.
요즘 민주당 지지층은 지나치게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다. 노사모 시절의 순수한 열정은 사라지고 사나워졌다. 몇몇 사태가 이런 변화를 가속했다. 대표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이나 야당 대표 시절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먼지털기식 수사,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등이 떠오른다. 정치는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인데 정청래 체제에선 정치 실종 상태나 다름없다. 이 대통령이 조성한 협치 분위기엔 찬물을 끼얹고 여야 원내대표가 모처럼 절충한 사안도 걷어찼다. 지지층이 원한다는 이유로 삼권분립 원칙에 반하는 사법부 압박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판국에 권리당원의 힘이 더 커지면 정치 양극화는 더 심해질 것이다.
비상계엄과 탄핵 국면에서 국민의힘 지지층도 거칠어졌다. 한때 보수 운동을 이끌었던 ‘뉴라이트’는 우파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나름의 논리라도 있었다. 지금의 극우 세력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아무 근거도 없이 부정선거론을 맹신하고 법정 모독도 서슴지 않는다. 보수의 핵심 가치인 법치를 스스로 훼손하면서 보수라고 자처한다. 이들의 지원을 받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당내의 계엄 관련 대국민 사과 요구에 묵묵부답이다. 국민의힘도 내년 지방선거 후보를 뽑는 경선룰 개정을 통해 당원 투표 비율을 높이려 한다. 장 대표도 ‘당성(黨性)’을 중시하며 당원 권리 확대론에 동조한다. 사사건건 싸우는 양당 대표가 이 점에선 한목소리다.
어느 조직이나 소수의 강경파가 흐름을 주도한다. 이때 강경파에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잡는 당의 리더십이 존재한다면 정치 복원이 가능해지는데 여야 대표들은 반대로 간다. 정당은 정권 획득이 목표지만 공당이라면 사회 갈등을 통합하는 책무도 져야 한다. 정권을 잡기 위해서라도 중도층과 멀어져선 안 된다. 정당과 지지자들이 양극화 행보를 멈추지 않는다면 국민이 투표로 바로잡을 수밖에 없다.
선거 전략에는 당 정체성을 강화해서 지지층인 집토끼를 결집해야 한다는 ‘집토끼론’과 당 정체성을 완화해서 중도를 끌어들여야 한다는 ‘산토끼론’이 있다. 선거가 다가오면 정당에서 두 전략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최근 시도당 위원장들과 만난 자리에서 “산토끼를 잡으려다 선거에서 투표소에 나와 찍어줄 집토끼를 놓쳐선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대표 취임 이후 좌고우면하지 않고 추진해온 검찰·사법개혁 등이 내년 6월 지방선거 승리 전략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그는 “개혁에 반드시 수반되는 반발에 발목 잡혀 실패하면 결국 우리가 죽는다”고도 했다.
정 대표의 개혁 드라이브는 민주당 지지층의 요구에 부응한다. 세계일보가 갤럽에 의뢰한 조사에서 민주당 지지 응답자는 조희대 대법원장 사퇴(73%)와 검찰청 폐지(89%)에 찬성했다. 반면 무당파로 분류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은 검찰청 폐지와 조 대법원장 사퇴에 반대했다. 민주당은 ‘검찰청 폐지법’을 강행 처리하고 전례 없는 방식으로 사법부 수장을 공격하고 있다. 여론조사에 비춰 보면 지지층은 환호하겠지만, 중도로 볼 수 있는 무당파 다수는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
정 대표의 집토끼론 배경엔 초선 시절의 경험도 일조한 것 같다. 정 대표는 민주당 전신인 열린우리당의 국가보안법 폐지 등 개혁 입법 추진이 무산되면서 지지층이 이탈하고 이는 지방선거 완패와 정권 재창출 실패로 이어졌다는 인식을 내비쳤다. 노무현정부 시절인 2004년 정 대표를 비롯한 열린우리당 강경파는 국가보안법 폐지 입장을 고수하면서 여야 지도부가 합의한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무산시켰다. 정 대표는 열린우리당 실패의 원인을 개혁 무산에서 찾았지만, 일방적인 개혁 추진이 부른 민심 이반 탓이라는 분석도 있다. 노무현 청와대 출신의 민주당 원로는 “정 대표가 당시 상황을 거꾸로 해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개혁 추진 방식과 관련해 정 대표와는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우상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방송에 나와 ‘개혁은 필요하다. 다만 국민이 피로감을 느끼는 방식으로 진행돼선 안 된다’는 취지로 대통령실의 불편한 기류를 전했다. 우 수석은 ‘속도와 온도의 차이’라고 표현했다. 강훈식 대통령실 비서실장은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수술대 위로 살살 꾀어서 마취도 살짝 하고, 잠들었다가 일어났는데 ‘여기 배를 갈랐나 보네. 혹을 뗐네’ 이런 개혁이 되어야 한다고 대통령께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런 인식은 지지층의 목소리만 듣는 개혁 방식으로는 중도로 외연을 넓히기 어렵다는 산토끼론과 맞닿아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표출된 우리 국민의 정치 성향을 보면 진보와 보수는 엇비슷하고 중도층이 가장 두껍다. 위에 인용한 갤럽 조사에서는 보수 28%, 진보 30%, 중도 34%였다. 보수와 진보를 상수(常數)로 보면 결국 중도가 선거 승패를 가른다. 정당은 중도를 어떻게 같은 편으로 만들 수 있을까. 집토끼론에 따르면 중도는 현안에 따라 진보와 보수를 넘나드는 부동층이다. 선거 때마다 더 끌리는 정당에 투표하기 때문에 중도에는 분명한 신호를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당 정체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달리 산토끼론은 중도 역시 중도보수든 중도진보든 나름의 정치 성향을 띤다고 본다. 중도를 우리 편으로 만들려면 정책이나 이념에서 보수 정당은 좀 더 왼쪽으로, 진보 정당은 좀 더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게 유리하다는 것이다.
집토끼론과 산토끼론은 둘 다 나름의 설득력이 있지만, 그 어느 쪽도 복잡한 정치 현실을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중도를 어떻게 규정하든, 이들은 대체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성향의 유권자다. 목소리가 크기보다는 신뢰할 수 있는 정당을 선호한다. 그러니 상식과 합리, 신뢰와 같은 무형의 자본이 잠식된 정당은 아무리 정체성을 강화해도 중도의 마음을 살 수 없다. 집토끼만 쫓고 있는 민주당은 중도의 마음에서 너무 멀어지지 않았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비상계엄과 탄핵 국면에서 중도의 신뢰 자본을 적지 않게 까먹은 국민의힘에도 같은 조언을 하고 싶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국민이 지난 8월 10일 기준으로 300만명을 넘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연명의료는 받지 않겠다거나, 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를 이용하겠다거나 하는 의사를 스스로 작성하는 문서다. 품위 있고 존엄하게 생을 마감하는 ‘웰다잉(Well-dying)’의 출발점이다. 의향서 작성 300만 돌파는 2018년 2월 ‘연명의료결정법’ 시행 이후 7년 6개월 만이다. 국회의원 시절 연명의료결정법 제정을 주도했던 원혜영 ‘웰다잉 문화운동’ 대표의 기여를 빼놓을 수 없다. 지난 25일 서울 서소문 사무실에서 만난 원 대표는 “이제는 연명의료 문제를 포함해 장기 기증과 상속, 장례 등 웰다잉의 여러 분야에서 당사자의 ‘자기 결정권’을 어떻게 보장하고 지원할 것인가를 체계화한 ‘웰다잉 기본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원혜영 ‘웰다잉 문화운동’ 대표가 지난 25일 “죽음을 앞두고 결정해야 할 중대사인 연명의료와 장기 기증, 장례 등에 관한 ‘자기 결정권’을 보장하는 ‘웰다잉 기본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남정탁 기자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300만 시대가 열렸다. 이 숫자에 만족하나.
“지난해 말 65세 이상 노인 1000만명 시대가 열렸다. 전 인구의 20%가 노인층인 초고령사회로 진입했고 숫자가 많은 베이비 부머가 속속 노인층에 편입되고 있다. 의향서를 작성한 300만명은 현재 노인 인구의 절반도 안 된다. 사전연명의료중단 문제를 상담하고 등록해줘야 할 기관이 보건소인데 절반 가까이가 그 기능을 안 하고 있다. 정부 차원의 홍보 노력도 부족하다. 지방자치단체는 관련 조례를 만들고 지원해야 하는데 아직 미흡하다. 그런데도 300만명이 됐다는 건 대단한 성과이긴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죽음에 대한 얘기를 꺼리는 문화가 있다. 개인적으로 노모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고 얘기했을 때 마음이 불편했다.
“당사자인 어르신들이 연명치료 중단 문제에 제일 관심이 많다. 주변 사람들이 연명치료를 받으며 고통스럽게 숨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안 그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자발적으로 의향서를 작성한다.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수명이 대폭 늘었다. 삶의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면 생각하고 결정해야 할 일이 많다. 연명의료를 받을지 안 받을지, 연명의료를 받지 않는다면 그 대안으로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받을 것인지도 결정해야 한다. ‘잘 죽는 것’이야말로 ‘잘 사는 것’의 완성이다. 죽음을 우리가 회피할 수 없는 이상,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잘 준비해야 한다.”
―웰다잉 문화운동의 취지는 무엇인가. 어떤 일을 하고 있나.
“평균 수명이 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이제는 회복될 가능성이 희박할 때 연명치료를 받을 것이냐 말 것이냐는 실존적인 결정을 해야 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해 놓지 않은 채 쓰러지면 병원은 인공호흡기를 끼우고, 심폐소생술을 하고, 투석하는 등 가능한 모든 조치를 다 취한다. 원하지 않는 힘든 치료를 받으며 소중한 가족이나 지인과 함께 보내는 시간,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정리하면서 보낼 기회를 흘려보낸다.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는 경우 그 사람의 희망을 존중해줘야 한다. 삶을 품위 있고 존엄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이 자기 결정권이다. 당사자가 이런 문제를 숙고해서 나름의 방안을 미리 결정해 놓는 문화를 만들고, 사회는 그 결정권을 존중하도록 하자는 것이 웰다잉 문화의 핵심이다. 우리는 그런 문화를 확산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스님이 삶을 마무리한 방식이 떠오른다.
“두 분 모두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기도 전에 웰다잉을 몸소 실천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건강이 악화하자 인공호흡기 장착 등 일체의 연명의료를 거부했다. 장기를 기증해서 다른 생명을 살렸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장기 기증 서약이 무려 6배나 늘었다고 한다. 법정 스님도 위독해지자 연명의료를 거부했다. 수의와 장례식을 거부한 본인의 뜻대로 스님의 장례는 아주 소박한 다비식으로 진행됐다. 이들의 품위 있는 죽음은 웰다잉 문화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은 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이 인공호흡은 거부할 수 있어도 인공 영양급식은 거부할 수 없게 돼 있다.
“늙고 병들고 쇠약해져서 밥도 못 먹을 정도가 되면 그때는 밥을 억지로 먹이는 게 더 고통스럽고 평온한 죽음을 방해할 수도 있다. 최소한 건강한 사람이 곡기를 끊어서 생기는 그런 고통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과정이니까 그런 점에서 인공영양 공급 중단이 자연의 법칙에 부합한다는 의미다. 미국이나 다수 유럽 국가 및 대만 등에서는 인공영양 및 수분 공급을 중단 가능한 연명의료에 포함하고 있다. 연명의료결정법 제정 당시에도 인공영양 급식도 연명의료중단 대상에 포함하자는 주장이 나왔지만, 신중론에 밀렸다. 개선이 필요한 대목이다.”
―스스로 곡기를 끊는 방식으로 임종하는 경우를 가끔 본다.
“미국의 평화운동가인 스콧 니어링 박사는 100세가 됐을 때 단식을 하며 세상과 작별했다. 가을이면 나무가 영양공급을 줄이고 무성한 나뭇잎을 하나둘 떨어뜨리는 것처럼, 인간 생명의 흐름도 자연으로 돌아갈 때는 영양분을 서서히 줄여가고 종국엔 끊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 니어링의 곡기 끊기는 자연 질서에 순응하면서 내 삶을 내 뜻대로 마무리하는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주변에서도 의외로 그런 사례가 많다는 피드백을 받고 있다. 이건 법을 바꿀 필요도 없이 본인 결정만으로 가능한 선택이다.”
―연명의료결정법을 개정할 때 고려해야 할 또 다른 문제는.
“연명의료결정법은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를 연명치료중단 대상으로 하고 있다. 임종 과정인지 여부는 의사가 판단하지만, 언제부터가 임종기인지를 놓고는 견해차가 있을 수 있다. 2023년 기준 사망자 중 연명의료를 중단한 비율은 12.7%에 불과했다. 적극적으로 치료해도 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예상하는 진단을 받은 ‘말기 환자’는 연명치료중단 대상이 아니라서 인공호흡기도 뗄 수 없다. 다른 나라들처럼 연명치료중단 대상을 말기 환자까지 확대할 필요가 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법적 효력이 충분히 보호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일단 본인 의사가 제일 중요한데 현실은 다르다. 의향서를 작성했어도 당사자가 말도 못하는 상황이면 자녀들이 연명치료 중단에 반대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법에는 원론적으로 본인의 뜻을 존중한다고 돼 있지만, 가족이 이렇게 강하게 요구하면 의료진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가족끼리도 의견이 다를 수 있다. 본인의 결정이 존중돼야 한다는 점을 좀 더 강하게 규정해 놓을 필요가 있다. 그에 앞서 당사자가 평소에 가족들과 충분히 소통해서 연명의료중단에 관한 자기 뜻을 이해시키고 그 뜻을 존중할 수 있도록 당부해 놓는 것이 중요하다.”
―19, 20대 국회에서 ‘웰다잉 문화 조성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을 만들고 마지막까지 노력했지만 이루지 못한 것이 ‘웰다잉 기본법 제정’이라고 아쉬워했다.
“연명의료에 대한 결정뿐만이 아니라 장기 기증이나 장례, 상속 모두 본인이 죽음을 앞두고 결정해야 할 중대사다. 웰다잉 문화 전체 중에서 유일하게 완성된 문화가 화장(火葬) 문화다. 아름다운 화장 시설을 건설하고 자기도 화장을 선택한 SK그룹 최종현 선대회장이 큰 역할을 했다. 웰다잉 문화의 핵심은 삶의 마무리에 관한 문제에서 당사자에게 자기 결정권을 인식시키고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웰다잉기본법의 취지는 초고령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국민에게 이해시키고 이를 실천하도록 홍보하고 교육하는 역할을 국가에 맡기자는 것이다. 물론 연명의료중단이나 장례, 상속, 기증은 개별법이 규율하고 있다. 하지만 전체를 포괄해서 자기 결정권이라는 관점에서 웰다잉 결정 방식을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
―웰다잉기본법 제정에 따른 재정 부담은 없나.
“국가의 모든 복지 사업은 연금을 주든 틀니를 해주든 모두 돈 먹는 기계다. 그런데 웰다잉 문화를 확산시키는 일은 교육과 홍보 비용 말고는 돈 들어갈 일이 없다. 사망 직전 1년 동안 들어가는 연명치료 비용이 1인당 2000만원 정도다. 연간 30만명이 넘게 죽는데 10만명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안 받으면 연 단위로 의료비 2조원이 절약된다. 건강보험공단이 사전의료연명의향서 등록을 열심히 하는 이유다. 연명의료중단으로 가계 부담을 줄이고 건강보험 재정도 아낄 수 있다. 장기 기증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니까 소중하고 합리적 장례 문화는 사회적, 개인적 경비 절감으로 이어진다. 웰다잉 기본법을 만들어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지원하면 된다.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라 무관심해서 안 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라도 웰다잉 문화 만드는 일을 국가 정책 과제로 다뤄주길 요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