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거침없는 ‘미국 우선주의’ 행보로 전 세계가 요동치고 있다. 미국이 설계하고 관리해온 ‘자유주의 세계질서’(liberal world order)는 트럼프의 미국에 의해 훼손되고 있다. 세계가 다시 약육강식의 ‘정글’로 변해가고 있는 것일까.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대표적 수혜국인 대한민국호는 격변의 풍랑 속에서 선장을 잃은 채 표류하고 있는 처지다.

트럼프 1기 집권기에 주미 대사를 지낸 안호영 경남대 석좌교수는 트럼프발 리스크와 관련, “지엽적 사안에 매몰되지 말고 한·미가 ‘윈윈’할 수 있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보 분야에선 트럼프의 ‘힘에 의한 평화’(peace through strength) 실현을 위해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통상의 경우 관세만 바라보지 말고 미국이 원하는 산업 협력 방안을 제시하라고 제언했다. 지난달 17일 서울 종로구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대면 인터뷰를, 지난 3일 전화 인터뷰를 진행했다.

 

트럼프 1기 집권기에 주미 대사를 지낸 안호영 경남대 석좌교수가 지난달 17일 서울 종로구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트럼프발 리스크 대응 방안 등을 얘기하고 있다. 남정탁 기자

―트럼프 2기의 충격파가 1기 때보다 더 강하고 전면적이다. 미국 기류는 어떤가.

"트럼프 정부가 동맹과의 관계를 재조정하는 방식이 유럽에는 굉장히 거칠고 아시아에는 상대적으로 덜 거칠다는 느낌이다. 지난주 참석한 워싱턴 세미나에서 미국 측 참석자들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파국으로 끝난 트럼프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회담이 상징하듯 미국은 유럽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반면 트럼프와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의 정상회동은 화기애애했다. 지난 주 미국을 찾은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 등과의 회동 분위기도 좋았다고 한다. 요즘 미국 외교가에서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를 패러디해서 트럼프가 ‘두 지역 이야기’(A Tale of Two Regions)를 쓰고 있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트럼프의 아시아에 대한 유화 기조가 또 변하지 않겠느냐, 변하지 않게 하려면 뭘 해야 하느냐는 논의가 오가고 있다. 전임 조 바이든 미 행정부에서 국무부 부장관을 지낸 커트 캠벨 같은 인사들은 ‘트럼프가 공짜로 잘해주지는 않는다. 뭔가 기대가 있어서 그럴 텐데 그걸 잘 파악해서 대응해야 한다’는 취지의 조언을 했다.”

―트럼프 정부의 외교 안보 담당자들이 동북아 현안을 얘기하면서 한·미·일 안보 협력을 부쩍 강조하고 있다.

“마이클 왈츠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보좌관이 최근 어느 대담 자리에서 ‘한·미·일 3자 협의체’(2023년 당시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만든 경제·안보 협의체)를 높이 평가하는 걸 들었다. 한·일이 그렇게 사이가 안 좋은데 바이든이 이걸 만들어낸 건 대단한 업적이라는 것이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도 같은 생각이다. 캠벨이 최근 강연에서 한·일을 향해 ”부끄러워하지 말고 한·미·일 3국 협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제안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라. 그게 미국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유지할 방법“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경청해야 할 조언이다.”

―미국의 한·미·일 협력 주문은 다분히 패권 경쟁국인 중국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자유주의 국제질서 속에서 성장해온 중국은 이제 “지구는 중국과 미국이 각자 발전할 만큼 넓다”(시진핑 국가주석)고 말할 정도로 강해졌다.

“미국의 방향 전환에는 중국이 기여한 바가 크다. 중국 상품이 상상할 수 없는 싼 가격으로 미국으로 들어갔다. 미국 제조업이 막대한 피해를 봤다. 미국은 무역뿐 아니라 안보 분야에서도 중국을 견제해야겠다는 전략적 판단을 하게 됐다. 우리는 미국의 동맹국으로 중국 견제를 뼈대로 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기여할 수 있는 분야가 많다. 재래식 군비 규모만 봐도 미국, 러시아, 중국, 인도에 이어 5위다. 트럼프가 원하는 군함 건조나 ‘괴물 미사일’로 부르는 현무 등 방산 능력도 월등하다.”

―세계무역기구(WTO) 다자무역체제는 미국이 주도적으로 설계한 세계 경영 체제다. 트럼프 대통령은 왜 이 체제를 무시하고 있나.

“강대국은 룰을 만드는 나라다. 불리하면 새로운 룰을 만든다. 미국 내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무역 적자가 커지고 국내 제조업이 쇠락하자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대한 회의감이 커져갔다. 전임 조 바이든 민주당 정부도 자유무역 체제를 손질해 무역불균형을 바로잡으려 했다. 트럼프는 ‘그런 미적지근한 대응은 안 된다. 기존 룰은 잊고 새로운 방향으로 가자’고 한다. 트럼프는 WTO 규약 같은 ‘법의 지배’(rule of law)를 미국에 유리한 ‘힘의 지배’(rule of power)로 바꾸려 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동맹도 봐주지 않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트럼프 2기 내각에는 1기 정부의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같은 ‘어른의 축’도 보이지 않는다.

“매티스는 트럼프 정부가 출범한 지 불과 한 달 만인 2017년 2월 방한했다. 당시 주미 대사였던 저에게 ‘미국은 동맹이 있어 강하다. 그렇게 소중한 동맹이 지금 (대통령 탄핵 사태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느냐. 그런 한국을 먼저 가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큰 감동을 받았다. 지금 매티스 같은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건 부질없다. 이제 트럼프의 생각을 읽고 거기에 맞춰야 한다. 트럼프는 ‘힘에 의한 평화’라는 말을 자주 한다. 방점이 ‘힘’이 아니라 ‘평화’에 있다. 트럼프는 집권 1기 4년 동안 미국이 새로운 전쟁을 단 한 건도 시작하지 않았다는 점을 대단한 치적으로 생각한다. 북한을 향해서도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결국 김정은과 마주 앉지 않았나.”

2017년 5월 안호영 주미 대사가 백악관 집무실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 홍석현 대미특사, 트럼프, 안 대사, 마이크 펜스 부통령.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에서 러시아를 편들고 있다. 러시아에 군대를 보낸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는 러브콜을 보냈다. 북핵 협상 과정에서 미·북·러가 밀착하면 한국이 배제될 수 있다.

“트럼프가 워낙 독특한 리더십을 가진 인사라 그건 모른다. 항상 긴장해야 한다. 북·미의 ‘핵군축’ 회담 가능성도 나왔다. 그런데 최근 미·일 정상회담과 한·미·일 외교장관 회담에서는 ‘북한의 비핵화’ 목표가 재확인되기도 했다. 트럼프도 북한 비핵화가 중요하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김정은을 너무 궁지로 몰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좀 다독거리면서 가자는 생각인 것 같다.”

―트럼프 정부의 통상 압박이 전방위로 가해지고 있다. 관세만 놓고 봐도 국가·품목별로 보편·상호 관세를 총동원하고 있다.

“관세는 국가별 협상이 시작되면 미국과 예외 교섭을 해야 한다. 트럼프 1기 때도 한국 세탁기를 대상으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발동하고 관세를 부과했다. 월풀 등 자국 세탁기 제조업체가 피해를 보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미국에 생산 공장을 짓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번에도 한국 기업들은 미국 투자를 늘리는 수밖에 없다.”

―최근 한·미의 외교장관, 통상장관들이 만나서 조선 분야와 원자력·액화천연가스(LNG) 같은 에너지 분야, 첨단 기술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트럼프가 원하는 협력 분야들이다. 지난 달 미·일 정상회담에서 이시바 총리가 미국 알래스카 LNG 송유관 건설 사업에 투자하겠다고 했는데 그게 트럼프에게는 무척 반가운 말이다. 이 사업은 트럼프 1기 때부터 나온 얘기다. 주미 대사 시절 알래스카 주지사가 찾아와서 우리에게도 송유관 투자를 요청했지만 막대한 비용 문제로 성사되지 못했다. 일본이 그걸 잊지 않고 있다가 이번 정상회담에서 트럼프에게 선물로 제시한 것이다. 이제는 여건이 변했다. 트럼프가 우리 철강에 25% 관세를 때린다고 하지 않나. 송유관을 수천㎞ 깔려면 철강이 필요하다. 철강 관세를 피할 수 있다. 가스 상태의 LNG를 운반하려면 액체로 냉각시켜야 한다. 냉각 기술이나 LNG 플랜트·수송선 건조 기술은 한국이 제일 잘한다. 반도체도 메모리는 우리가 세계 1위이고 원전도 우리는 ‘저비용, 적시 시공’이 가능하다. 조선업은 트럼프가 한국과 협력하고 싶다고 한 분야다.”

―세계가 트럼프 리스크 관리로 분주한데 우리는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탄핵 소추돼 ‘대행의 대행’ 체제다.

“대통령 권한대행이 총리인 것과 기획재정부 장관인 것은 차이가 있다. 한 권한대행은 총리 두 번에 주미 대사 등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런 이력을 지닌 인사는 세계에서도 흔치 않다. 트럼프가 봤을 때 그 정도면 정상 통화는 할 만하다고 평가했을 것이다. 첫 집권 때는 트럼프 취임 열흘 만에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과 정상 통화가 이뤄졌다.”

조남규 논설위원

 

1939년 8월 20일 독일 총통인 히틀러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인 스탈린에게 직접 서한을 보냈다. 폴란드 침공을 앞두고 소련과 불가침 협정을 맺기 위해서였다. 사흘 뒤 소련 모스크바에서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됐다. 양국은 서로 공격하지 않고 상대국을 공격하는 국가에 가담하지 않기로 했다. ‘평화 조약’으로 선전했지만, 이 조약으로 인근 약소국들의 운명이 결정됐다. 당시 공개되지 않은 ‘비밀 의정서’에는 양국이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고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을 소련에 편입시킨다는 조항이 포함됐다. 조약 체결 이후 한 달도 되지 않아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를 침공해 나눠 가졌다. 강대국들이 전략적 이익을 위해 약소국이나 이해관계자를 희생시킨 대표적인 ‘더티 딜(dirty deal)’이었다.

더티 딜은 강대국 사이에서만 이뤄지는 건 아니다. 1986년 11월 3일 레바논의 주간지 ‘알 쉬라’ 특종보도로 세상에 드러난 ‘이란·콘트라 스캔들’이 그렇다. 레이건 미 행정부는 적대국이었던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고 판매 대금 중 일부를 니카라과 좌파 정권에 맞서 싸우는 콘트라 우파 반군 지원에 썼다. 이는 미국의 대이란 무기수출 금지 정책과 콘트라 반군 지원 금지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불법 거래였다. 특별검사의 수사로 존 포인덱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올리버 노스 해병대 중령 등이 기소됐다. “테러단체와는 거래하지 않겠다”고 공언해온 레이건 대통령의 명성에도 금이 갔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더티 딜을 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부 장관은 우크라이나의 요구 사항인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이나 영토 수복 등에 대해 냉정히 선을 그으며 이런 관측에 힘을 실었다. 그러자 키스 켈로그 미 대통령 우크라이나·러시아특사는 17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에 평화협정을 강요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며 일각의 우려를 불식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푸틴의 협상 의지를 신뢰한다”는 트럼프가 어떤 딜을 할지, 우크라이나와 서방 국가들은 마음을 졸이고 있다. 우리도 눈을 부릅뜨고 북·미의 더티 딜을 경계해야 하겠다.

조남규 논설위원

영미권에는 “페니를 발견해서 주우면 행운이 따라온다”는 속설이 있다. 미국의 1센트짜리 동전인 페니 앞면에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길에 페니가 떨어져 있어도 링컨이 보일 때만 좋은 징조라고 여기고 뒷면이 보이면 줍지 않는다. 페니는 결혼식 때 신부의 신발 안에 넣기도 하고 시험장으로 향하는 수험생들 주머니에 넣기도 한다. 사고 예방 차원에서 차에 보관하는 이들도 있다. 이 모두가 숫자 1이 새로운 시작과 행운을 상징한다는 믿음과 관련이 있다.

페니의 유래는 8세기 후반 잉글랜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은으로 만들어진 페니가 최초로 유통됐다는 기록이 있다. 페니는 중세에도 사용되다 대영 제국 시절 영국 식민지로 퍼져 나갔다. 미국 최초의 페니는 독립 이후 1793년 필라델피아 조폐국이 주조했다. 당시 페니 앞면에는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는 ‘태양과 해시계’가 디자인됐다. 링컨의 초상이 들어간 페니는 1909년 링컨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됐다. 미국 동전에 인물 초상이 들어간 건 ‘링컨 페니’가 처음이다. 이후 페니의 디자인은 여러 차례 변경됐지만 링컨 초상은 변함 없이 유지됐다. 미국민들의 링컨 사랑 덕분이다.

페니는 미국 동전 중에서 가장 많이 유통되는 주화다. 그런데 주조 비용이 액면가보다 높고 사용 빈도가 낮아지다 보니 페니를 그만 만들자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런 이유로 캐나다와 호주, 뉴질랜드는 이제 페니를 더 이상 주조하지 않는다. 하지만 페니가 사라지면 가격이 반올림되면서 소비자 물가가 상승하고 동전 거래가 많은 저소득층에 피해가 간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특히 링컨 페니는 화폐를 넘어 문화재의 가치가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트루스소셜에 “미국은 너무 오랫동안 2센트 이상의 비용이 드는 페니를 주조해왔다”며 재무부 장관에게 페니 생산 중단을 지시했다고 썼다. 앞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이끄는 미국 정부효율부(DOGE)도 지난달 “1페니를 만드는 데 3센트 이상이 든다”며 페니 폐지론을 폈다. 전통의 링컨 페니가 긴축과 효율을 중시하는 트럼프 시대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처지에 놓였다.

조남규 논설위원

2023년 넷플릭스를 통해 한국에 알려진 영화 ‘페일 블루 아이(Pale Blue Eye)’의 배경은 1830년대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다. 이 영화는 웨스트포인트 퇴학생이었던 시인 에드거 앨런 포를 등장시켜 한 생도의 죽음을 둘러싼 음모와 미스터리를 풀어낸다. 포가 가입한 ‘데비 크로스’는 웨스트포인트의 비밀 클럽으로 살인 사건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데비 크로스는 영화 속 창작물이지만 현재 웨스트포인트에는 100개가 넘는 생도 클럽이 운영되고 있다. 일반인에게는 미국 프로 풋볼 리그(NFL) 경기나 독립기념일에 고공 강하 시범을 펼치는 ‘패러슈트 팀’이 가장 친숙하다. 전국 토론 대회에서 하버드나 예일 같은 명문대팀과 맞짱을 뜨는 ‘디베이트 팀’도 인지도가 높다. 클럽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전통과 의식으로 결속력을 다진다. 꼴찌 졸업생끼리 뭉친 ‘고트(Goat) 클럽’도 있다. 전통적으로 꼴찌 생도는 행사장에서 맨 마지막으로 졸업장을 받는다. 군 경력은 성적순이 아니어서 장군까지 올라간 꼴찌들도 있다. 패러슈트 팀의 경우 혹독한 훈련을 마치고 첫 강하에 성공하면 정식 회원이 된다. 학보를 만드는 ‘웨스트포인터’ 클럽에서는 첫 기사를 쓴 신입 회원이 손에 잉크를 묻혀 신문사 벽에 손자국을 남긴다.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의 영향으로 소수 인종 출신과 여성 생도가 늘면서 클럽도 더 다양해졌다. 한인계 생도들이 주축인 ‘한·미 관계 세미나’를 비롯해 ‘일본 포럼 클럽’, ‘아시아태평양 포럼 클럽’, ‘베트남계 미국인 생도 협회’, ‘라틴 문화 클럽’, ‘미국 원주민 유산 포럼’, ‘전국 흑인 엔지니어 협회’, ‘여성 엔지니어 협회’ 등이 속속 생겨났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역풍이 불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웨스트포인트의 채드 포스터 부교장은 4일 대통령 행정명령과 국방부 및 육군 지침에 따라 이들 소수자 클럽 12개를 대상으로 해산 명령을 내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DEI는 백인과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지지자들의 요청을 수용한 결과다. 동맹도 봐주지 않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국내에서는 ‘백인·남성 우월주의’로 발현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조남규 논설위원

미국 컬럼비아대 마틴 챌피 교수는 투명한 외피를 지닌 벌레의 신경조직을 검사할 때마다 벌레를 죽이는 연구 방식이 영 불편했다. 한 세미나에서 초록빛 해파리 안에 있는 형광성 단백질에 자외선을 쏘면 초록색을 발산한다는 강연을 듣는 순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투명한 벌레의 몸 속에 형광성 단백질을 넣으면 자외선으로 단백질의 이동을 추적 관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벌레를 죽이지 않아도 됐다. 요즘엔 형광성 단백질이 다량으로 복제돼서 암 세포 추적과 같은 의학 분야 등에서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챌피는 이 아이디어로 2008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인공지능(AI) 시대의 총아인 HBM(고대역폭메모리) 반도체가 탄생하는 과정에서도 이런 통찰이 있었다. 김정호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는 메모리 반도체의 성능을 높이는 화두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었다. 더 작게 만드는 방식은 기술적 한계에 봉착한 상황이었다. 어느 날 반도체에 구멍뚫는 작업을 하고 있는 동료 교수 방에 놀러갔다가 의외의 돌파구를 찾았다. 여러 층으로 쌓은 반도체 속에 구멍을 내고 그 구멍을 통해 전력과 신호를 공급할 수 있겠다는 통찰이다. '3차원 적층 구조' 방식의 HBM 신화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중국의 AI 스타트업인 딥시크(DeepSeek)가 지난 27일 애플 앱스토어에서 오픈AI의 챗GPT를 밀어내고 다운로드 1위를 기록하며 전 세계 AI업계에 충격을 줬다. 일부 성능 테스트에서는 오픈AI가 지난해 9월 출시한 AI 모델 'o1'을 앞질렀다고 한다. 딥시크는 자사 AI 모델에 엔비디아의 저사양 칩을 장착했고 개발비는 557만6000달러(약 80억원)였다고 밝혔다. 이게 사실이라면 메타의 AI 모델인 '라마3' 개발 비용의 10분 1 수준이다. 미국 내에서는 "AI의 스푸트니크와 같은 순간"이라는 말이 나온다. 미국 기술주들의 주가가 줄줄이 하락한 것은 이런 딥시크의 잠재력 때문이다.
 
창업자 량원펑(梁文鋒)은 27일 '더 차이나 아카데미'와의 인터뷰에서 '어떻게 이런 혁신이 가능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한 젊은 연구원이 기존 방식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순간적으로 대안(代案)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며 "혁신은 무엇보다 신념의 문제로 자신감이 필요하고 그런 면에서 젊은 사람들이 해내기 쉽다"고 답변했다. 그러면서 "더 많은 투자가 반드시 더 많은 혁신을 낳는 것은 아니다"고도 했다. 한 연구원의 통찰과 팀원들의 혁신 노력이 미국 주도 AI 판도를 흔들었다. 딥시크의 사례는 미국 빅테크들의 천문학적 AI 투자에 지레 위축됐던 한국 AI 개발 기업들에게도 시사점을 던진다.

조남규 논설위원 coolma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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