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2017년 사회조사’ 결과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한국인 3명 중 2명은 일생 동안 노력해도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이 ‘낮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 우려스러운 대목은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자식 세대의 계층 상승 가능성에 대해서도 ‘낮다’고 한 점이다. 그렇게 답한 비율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본인과 자식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상류층이라고 생각하는 응답자군에서는 본인 세대와 자식 세대의 계층이동 가능성을 모두 높게 봤다. 소득과 부의 양극화가 희망의 양극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사회는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2010년 6·25전쟁 발발 60년을 맞아 존 놀런 ‘스텝토 & 존슨’ 로펌 회장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6·25전쟁 참전용사인 놀런 변호사는 6·25전쟁을 미국의 독립전쟁에 비유하면서 “미국이 독립전쟁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세웠듯이, 한국전쟁도 어떤 측면에서는 한국이 새로운 나라로 거듭나는 발판이 됐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쟁이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전쟁 자체는 비극이었지만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충격이 신분과 계급의 장벽을 부숴버렸다.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출세할 수 있고, 돈을 벌 수 있는 세상이 열렸다. 이런 신분 상승 욕구가 우리나라를 6·25전쟁이 남긴 폐허 위에서 중견 경제국으로 도약시킨 동력으로 작용했다.
경제학 교수 출신인 조윤제 주미 대사도 놀런 변호사와 유사한 진단을 내리고 있다. 그는 최근 내놓은 저서 ‘생존의 경제학’에서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정부 수립 이후, 특히 한국전쟁 이후 똑같은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면서 이는 한반도 수천년 역사상 초유의 경험이었다고 썼다. 과거 역사에서 소수 지배집단에만 열려있던 출세와 축재, 입신의 기회가 모든 국민에게 허용되면서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역동성을 갖게 됐고, 이는 기적 같은 경제성장 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는 개천에서 용이 나기 힘든 ‘닫힌 사회’로 변해갔다. 모두가 선망하는 양질의 일자리는 소수의 카르텔 속에서 유전되고 있다. 요즘 세간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채용비리 사건이 비단 금감원, 우리은행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발전 동력으로 작용했던 신분 상승 욕구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 곳곳에 기득권을 만들어냈다. 이제는 그 기득권이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기득권 수호에는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 기득권자들의 유착 속에서 공정경쟁은 질식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좌절감과 열패감이 확산된다. 통계청의 2017년 사회조사 결과 그대로다.
문재인정부의 첫 번째 과제는 우리 사회의 역동성을 되살리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다시 6·25전쟁 직후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쟁에 버금가는 충격으로 우리 사회를 혁신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공정경쟁을 가로막는 온갖 종류의 반칙을 걷어내야 한다. 정부든, 기업이든, 노조든, 아니 그 무엇이든 이들 속에 도사리고 있는 기득권을 손봐야 한다. 불필요한 규제는 기득권의 또 다른 이름이다. 기업과 개인의 국제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규제는 하루빨리 없애야 한다. 이미 경쟁력을 잃은 부문, 사라질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혈세를 퍼붓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그럴 돈이 있으면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데 한푼이라도 더 투입해야 한다.
사회의 역동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경제 생태계의 역동성도 커져야 한다. 그러려면 수출 기업의 국제경쟁력과 서비스 산업의 질을 높여야 한다. 과거엔 가계소득을 높여주면 소비가 늘고 국내 기업이 투자에 나서는 선순환이 이뤄졌으나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그 고리가 느슨해졌다. 국내외 소비자들은 더 싸고 더 질 좋은 제품을 손쉽게 찾아다닌다. 국내 산업의 경쟁력을 키우지 않으면 국내에서 풀린 돈이 투자로 이어지기는커녕 자산 거품을 만들어내기 십상이다. 경쟁력을 키우려면 기득권의 양보를 이끌어내야 한다. 독일을 회생시킨 슈뢰더 총리가 지지층의 반발을 무릅쓰면서 걸어간 길이다.
조남규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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