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마을에 여행객 한 명이 방문했다. 불황으로 많은 주민들이 빚을 지고 있었다. 그 여행객은 여관 주인에게 숙박비로 5만원권 지폐 한장을 건네고 방으로 들어갔다. 모처럼 돈이 생긴 여관 주인은 정육점을 찾아가서 빚 5만원을 갚았다. 정육점 주인은 그 돈으로 밀린 병원비를, 병원 의사는 단골 술집에 달아놓은 외상 술값을 각각 치렀다. 술집 주인이 그 돈으로 여관 주인에게 빌린 5만원을 갚으면서 5만원권 지폐는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투숙했던 여행객은 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그 돈을 돌려받은 뒤 떠났다. 5만원권 지폐는 그 마을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졌지만 주민들의 빚을 없애주고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서구에서 회자되는 돈에 관한 우화를 한국식으로 바꿔봤다.
오래전에 토머스 홉스는 화폐의 유통을 혈액순환에 비유하면서 “화폐는 우리 몸의 각 부분에 영양을 주는 혈액처럼 이 사람 저 사람에게로 옮겨다니면서 사회에 활력을 부여한다”고 말했다.
그런 돈이 요즘 한국에서는 돌지 않고 있다. 통화당국이 금리를 역대 최저 수준으로 내리고 시중에 돈을 풀어대고 있는데도 그렇다. 기업과 가계의 은행 예금액이 크게 늘었다. 기업은 투자를 하지 않고 가계는 소비를 하지 않는다는 방증이다. 돈은 이윤을 좇아 쉴 새 없이 흘러다녀야 정상이다. 그러지 않는 이유는 경제의 혈관 내벽에 불확실성과 규제라는 혈전(血栓)이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자유무역을 옹호해온 전임 대통령들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사업가 출신답게 전략적으로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있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한반도 배치에 대응해 중국 시진핑 정부가 보복 수위를 어디까지 높일지도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다. 이럴 때 대외 불확실성을 줄이고 이를 상쇄시킬 만한 유인을 제공해서 기업과 가계의 경제활동을 진작시키라고 국민은 세금을 내가며 정부를 운영한다. 대표를 뽑아서 국회에 보내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국회에서 규제개혁 문제를 놓고 편이 갈려 있는 현실은 답답하다. 주요 경제 쟁점을 보수와 진보의 정쟁거리로 만드는 나라는 국민을 힘들게 한다. 일자리를 만들고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는 일은 진영 논리를 넘어서야 한다. 지금 대다수 가계는 경기침체로 소득이 줄어들면서 심각한 빈혈 증상에 시달리고 있다. 쓰고 싶어도 쓸 돈이 없는 형편이다. 돈이 돌지 않는 또 다른 이유다. 경기가 얼어붙어 있을 때는 정부도 재정을 보다 적극적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금리 인상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미국 금리는 이달 중순부터 순차적으로 연내 3,4차례 인상될 조짐이다. 한국은행은 당분간 금리를 올리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미국 금리가 우리 금리보다 높아져도 그런 기조를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장기적으로 금리 인상은 불가피하다. 소득은 주는데 금리만 오르면 1300조원을 넘어선 가계부채 뇌관이 터질 수 있다. 금리인상기에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들은 빚을 진 저소득층이다. 사슬의 강도는 가장 약한 고리가 결정한다.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기침체를 불러온 글로벌 금융위기가 취약계층에게 팔린 부동산담보대출 상품이 부실화하면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곳곳에 잠겨 있는 돈이 투자되고 소비돼야 경제가 살아나고 취약계층의 도미노 파산 가능성도 줄어들 수 있다. 경제 주체들이 앞서 소개한 우화 속 주민들처럼 활발히 돈을 돌릴 수 있어야 한다.
조남규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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