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8일

 

7일(현지시간) 막을 내린 미국 대선후보 경선전의 최대 이변은 도널드 트럼프의 부상이다.

부동산 재벌인 그는 정치 경력이 전무한 상태에서 혈혈단신으로 공화당 경선전에 뛰어들어 당의 간판 스타들을 차례차례 쓰러뜨렸다. 공화당 지도부는 트럼프의 후보 지명을 막기 위해 별의별 궁리를 다했으나 트럼프의 파죽지세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당 1인자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 한동안 트럼프 지지 선언을 거부한 것을 보면 공화당 지도부의 낭패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공화당 지도부의 눈에는 ‘트럼프의 반란(叛亂)’이었다. 반란은 성공했고 트럼프는 공화당을 접수했다.

미국 보수를 대표하는 공화당 대선 경선에서 유권자들이 공화당 주자 가운데 가장 진보적 공약을 내세운 트럼프를 선택한 것은 아이로니컬하다. 

조남규 국제부장
미국 노인들이 자식보다 낫다고 말하는 복지 제도가 있다. 노인 의료보험(메디케어)과 사회보장연금 제도다. 두 제도는 민주당 정부의 유산이다. 공화당은 버락 오바마 민주당 정부와의 예산 협상 과정에서 이런 사회복지 예산을 삭감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작은 정부’는 공화당의 핵심 강령이지만 트럼프는 복지는 줄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자유무역주의는 공화당이 100년 넘게 지지해온 정책이다. 오바마 정부의 국정과제들을 사사건건 걸고넘어진 공화당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비롯한 각종 FTA 비준안 만큼은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당시 오바마 정부는 민주당 좌파의 FTA 반대 주장을 무마하느라 진땀을 뺐다. 자유무역 쟁점에서 트럼프는 민주당 좌파나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트럼프가 외교·안보 공약의 기치로 내건 ‘America First(미국 우선주의)’도 세부 내용을 들여다보면 “세계를 경영하기에 앞서 미국인의 삶을 먼저 챙기라”는 진보 진영의 주장과 맥이 닿아 있다.

트럼프의 세금 공약도 공화당의 ‘감세’ 기조와는 사뭇 다르다. 그는 소득 2만5000달러(부부 합산 소득 5만달러) 이하인 저소득층에겐 소득세를 전액 면제해주겠다고 발표했다.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보다 급진적이다. 클린턴의 세금 공약은 소득이 1만달러 이하인 개인의 경우 10%의 소득세율을 현행대로 유지하고 있다. 최근엔 클린턴이 내세운 ‘부자 증세’ 공약도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감세를 신줏단지 모시듯 해온 공화당 우파는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다.

민주당과 공화당, 무소속을 넘나든 트럼프의 인생 역정이 보여주듯 그는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다. 굳이 규정하자면 ‘포퓰리스트’(대중영합주의자)에 가깝다.

트럼프는 선거전략 차원에서 ‘좌파 코스프레’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가 조지 H W 부시 공화당 정부가 체결한 북·미 자유무역협정(NAFTA)을 비판하면서 “(힐러리의 남편인) 빌 클린턴이 사인했다”고 억지 주장을 펴는 걸 보면 그런 심증이 굳어진다. ‘아메리카 퍼스트’는 클린턴 후보가 국무장관 시절 동맹 외교에 치우쳤다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보인다. 트럼프의 실체가 무엇이든 지금까지는 트럼프의 전략이 먹혀들었다. 당내 경선 과정에서 ‘샌더스 역풍’에 시달렸던 클린턴은 본선에서도 샌더스 같은 트럼프를 상대해야 한다.

조남규 국제부장

최근 게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