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특파원 시절 미국의 한 유력 싱크탱크가 공개적으로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펴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자유의지주의(libertarian)’를 표방한다는 케이토 연구소였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자유의지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이념으로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자유시장을 신봉한다. 미국 보수를 대표하는 공화당과 유사하지만 대외정책이나 사회정책은 차별된다. 이들은 미국의 대외 개입정책을 긍정하는 공화당과 달리 해외주둔 미군을 철수하라고 외치고 다닌다. 2008년 미 공화당 대선주자로 나섰던 론 폴 전 하원의원이 대표적 자유의지주의자다. 당시만 해도 론 폴의 목소리가 미약했지만 지금은 론 폴처럼 생각하는 미국인들이 늘고 있다.
공화당 유력 대선주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이런 기류에 올라탔다. 트럼프는 이렇게 말하면서 미국인을 홀리고 있다. ‘부자였던 미국이 다른 나라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빚더미에 올라 앉았다. 그 사이에 한국과 일본, 독일, 중국은 부자가 됐다. 대통령이 되면 이런 상황을 바로잡아서 미국과 미국인을 부자로 만들어주겠다.’
트럼프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해외주둔 미군은 미국의 국익을 지키기 위한 세계전략 차원에서 배치된 것이지 주둔국에서 자원봉사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가난한 나라’라는 말도 궤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먹고살기 힘들어진 대다수 미국인은 트럼프에 환호하고 있다. 트럼프가 그들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포퓰리스트다. 이런 트럼프에 공화당 유력 대선주자들이 주류든 비주류든 가릴 것 없이 하나 둘 나가떨어지고 있다. 공화당 지도부는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다. 트럼프를 대선후보로 내세우자니 당이 분열할 것 같고, 내치자니 공화당 유권자를 잃을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공화당이 이런 군색한 처지에 몰린 것은 자업자득이다.
대공황 이후 최대 경제위기를 맞아 공화당은 국민에게 대안은 내놓지 못하고 반대만 일삼는 정치세력으로 비쳤다. 공화당은 버락 오바마 민주당 정부의 첫 번째 법안인 경기부양법안이 상정되자 소속 의원 전원이 반대표를 던졌다. 건강보험개혁이든, 이민개혁이든 오바마 정책이라면 덮어놓고 거부했다. 2010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하원 다수당이 된 뒤 의회의 교착 상태는 더 심화했다.
미국 정치는 허구한 날 정쟁으로 일관했다. 그 여파로 미 연방정부가 폐쇄되는 사태가 빚어졌고 급기야 2011년에는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가 미 연방 정부의 신용등급을 강등시키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정치가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표류하는 동안 중산층, 서민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정치에 실망하고 삶에 지친 이들이 올 대선에서 공화당에서는 트럼프를, 민주당에서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띄우고 있다. 정쟁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한국 정치인들에게 미국 주류 정치인들의 몰락은 훌륭한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
조남규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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