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조남규 외교안보부장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1910년 일제의 조선 병탄과 1945년 일제로부터의 광복,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은 나라의 명운을 가른 분기점이었다. 올해는 광복 70돌이다. 사람의 일생으로 보면 고희(古稀)다. 지난 70년은 식민의 족쇄를 끊어내고 부강한 나라를 이루기 위해 질주해온 분투(奮鬪)의 역사였다. 온 국민의 피와 땀으로 대한민국은 세계 굴지의 중견국 반열에 올랐다. 올해는 분단 7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내부의 힘을 결집해 통일국가를 이루고 선진국으로 도약해야 할 사명이 7000만 한민족의 어깨 위에 놓여 있다.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광복·분단 70년을 맞이해야 하는가. 하영선(68)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은 본지와의 신년 대담에서 “부강국가 건설이라는 지난 70년의 목표를 대체할 새로운 표준을 세워야 한다”면서 “새로운 표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도 그룹, 새로운 리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통일과 선진국 도약을 이뤄야 할 우리에게 광복·분단 70년의 의미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1870년대 중반 이전까지 우리는 중국 중심의 질서 속에서 동방예의지국을 꿈꾸며 살아왔다. 그러다 1870년대 들어 소위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지만 일본에 강점당해 독자적인 근대화 과정이 중단됐다. 지난 70년은 광복 이후 근대국가 건설, 부강국가 건설을 위해 숨가쁘게 달려온 기간이었다. 이제 부강국가 건설이라는 19세기 중반의 표준이 바뀌고 있다. 정치권을 비롯해 우리 모두가 지난 70년을 성찰하고 새로운 70년의 비전을 세우는 2015년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광복 70돌의 시점에서 새롭게 설정해야 할 표준은 무엇인가.



“21세기 환경에서 부국강병은 통일과 선진국 도약을 위한 필요조건은 될지언정 충분조건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부강국가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나는 ‘복합(複合) 국가’를 제창하고 싶다. 경제, 군사 중심으로 뛰어온 지난 세월은 한계에 이르렀다. 경제, 군사만이 아니라 문화, 생태환경을 횡적으로 엮는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 문화국가, 환경국가가 되지 않고는 더 이상 21세기의 선도국가가 될 수 없다. 지식력(力)의 기반 위에 문화·환경력이 더해지고 그 위에 경제·군사력, 통치력이 차곡차곡 쌓인 다보탑을 상상해보라. 이런 새로운 표준을 누가 먼저 세우느냐에 따라 향후 70년, 140년 이후의 고지에서 동아시아의 지형도가 새롭게 그려질 것이다. 새로운 표준을 세울 수 있는 새로운 지도 그룹이 필요하고 이를 선도할 수 있는 리더가 절실하다.”



―세계일보가 신년을 맞아 각계 전문가 100명을 상대로 광복 이후 70년간 한국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국내외 인물 세 사람을 주관식으로 물었다. 가장 많이 거론된 인물이 박정희, 김대중, 이승만 전 대통령 순이었다.



“해방이라는 공간이 주어졌을 때 우리에게는 부강국가 건설이란 절체절명의 과제가 주어졌다. 그때 우리가 사회주의 계획경제 모델을 선택했다면 70년 후 어디에 서 있었을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선택은 옳았던 것이다. 박정희라는 지도자는 일정한 부작용이 있더라도 일단은 산업화로 가야겠다는 확고한 목표를 갖고 나라를 이끌었다. 두 사람은 모두 독재와 권위주의라는 결함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북정책으로 남북 교류협력은 확대됐지만 남북관계의 본질적 변화라는 측면에서는 낙관한 측면이 있다. 우리가 되돌아본 70년은 서구의 400∼500년을 압축적으로 살아온 기간이다. 비교사적으로 보면 이 정도 희생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취했다는 점을 과소평가할 이유가 없다.”



―압축 성장의 부작용이 곳곳에서 분출되고 있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대표적이다.



“보수와 진보, 좌우라는 표현은 더 이상 21세기 상황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한 세대 이전의 잣대들이다. 1980년대 진보의 가치로는 2010년대의 진보를 이야기할 수 없다. 보수나 진보 모두 국제관계나 남북관계가 변화하고 있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소위 지도자라는 인사들이 국민을 리드하기보다는 국민 뒤에서 발목을 잡고 있다. 시대의 조류를 따라잡는 새로운 안목의 지도자가 없는 탓에 정치가 3류로 전락했다. 새로운 안목을 갖춘 주도 세력이 한 번은 등장해야 대한민국의 국운이 융성할 수 있다.”


―새해에는 민족 문제가 뜨거운 이슈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방위 제1위원장을 만나서라도 남북관계의 물꼬를 터야 하지 않나.



“역대 정부의 대북정책이 냉온탕을 반복하면서 지금은 남북정상회담으로도 해법을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활로는 공진(共進·co-evolution)의 길이다. 남북이 함께 진화하는 것이다. 소위 진보라는 입장에서는 북이 어떻든 그냥 한 번 해보자는 주장을 편다. 그렇지만 남북 공진의 원칙으로 변환하지 않으면 남북정상회담도 돌파구가 될 수 없다. 변환의 톱니바퀴는 북한이 먼저 돌려야 한다. ‘핵·경제 병진(竝進)’으로는 안 된다. 북한이 핵·경제 병진론을 고수하면 21세기 중반의 무대에서 북한이 설 수 있는 공간은 없다. 북한은 1970년 전후로 남한에 추월당한 뒤 사실상 한 세대를 허송세월한 것이나 다름없다. 두 세대 정도 그러면 대개 망한다. 북한은 중국이 78년부터 한 세대 동안 두자릿수의 성장을 기록했던 길로 나서야 한다. 북한이 ‘비핵(非核)·경제 병진’으로 움직일 조짐이 보이면 우리도 톱니바퀴를 빨리 돌려야 한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한반도는 통일된 민족국가 완성이란 무거운 숙제도 안고 있습니다.



“남북이 해방 국면에서 통일됐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사용하는 ‘재통일(reunification)’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21세기 통일은 ‘신통일(new unification)’이 되어야 한다. 근대 부강국가 시대에는 이탈리아나 독일의 경우처럼 내부 결합을 통한 독립으로서의 통일이 중요했다. 21세기엔 그런 차원의 통일만으로는 안 된다. 한반도를 넘어서 동아시아, 나아가서는 세계적 차원까지 아우르는 통일이 아니면 통일 한반도가 21세기의 주역이 되기 어렵다. 남북이 합쳐봐야 우리가 가진 힘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동아시아판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우리가 설 자리가 달라진다. 간신히 통일을 이뤘는데 동아시아, 세계 차원에서 접목되지 않은 통일이라면 통일의 시너지를 폭발시킬 수 없다.”



―중국의 부상으로 동북아에서는 미·중의 패권 경쟁이 가열되고 있다. 이런 국제 질서 속에서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통일 역량을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외교 전략을 구사해야 하나.



“경제 부문에서 일본이 2010년 중국에 추월당했다. 2020년 상반기에는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다들 예상한다. 그런데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최근 “미국이 21세기에도 세계를 리드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그 질문은 잘못됐다. 미국이 어떻게 리드할 것이냐고 물어야 한다”고 답변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21세기의 힘은 ‘복합력’이다. 중국이 국내총생산(GDP)에서 미국을 따라잡았다고 해서 중국이 판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한국과 같은 미들파워 입장에서는 70년, 140년 앞을 내다보고 형세를 읽어야 한다. 섣부르게 ‘연미연중(聯美聯中)한다’는 식의 표현을 하면 안된다. ‘안보는 미국이고, 경제는 중국’이란 말도 10년 전에나 통했던 문법이다. 미·중이 갈등,협력,공생하는 영역을 예리하게 관찰해서 그에 적합한 대응 전략을 짜야 한다. 한·미·일의 전통적 연대는 중요하지만 냉전 시대처럼 중국을 배제하기보다는 중국을 끌고 갈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


정리=김민서 기자, 사진=남정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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