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 DC의 ‘내셔널 몰’은 미 연방 의사당과 링컨기념관 사이에 조성된 정방형 광장이다.
이곳은 미 전역과 전 세계의 워싱턴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이다. 워싱토니안들과 인근 버지니아주 주민들이 조깅을 하거나 산책을 즐기는 휴식공간이기도 하다. 바로 이 광장의 서편에 조성된 ‘한국전 참전기념공원’도 일년이면 방문객 수백만 명을 맞고 있다. 3일 한국전 참전기념공원을 찾은 기자는 반가운 화환 하나를 발견했다. 한국전쟁을 형상화한 조각상들 맨 앞에 놓인 그 화환의 리본에는 영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WE REMEMBER YOU FOREVER’(우리는 당신들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REPRESENTED BY CLASS 1963 SEOUL NATIONAL UNIVERSITY’(서울대 1963년 졸업생 일동 기증)
‘THE PEOPLE OF REPUBLIC OF KOREA’(대한민국 국민)
이 화환은 ‘사랑하는 아빠에게’라는 리본을 단 화환과 아무런 리본도 달지 않은 화환들 옆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공원을 찾은 많은 방문객들이 리본에 적힌 문구들에 관심을 보였다. 취재 결과, 기자의 눈에 띈 이 화환은 일회성 행사용 화환이 아니었다. 꽃이 시들면 새로운 화환으로 교체되면서 올 봄부터 지금껏 공원을 지키고 있었다. 한국에서 의뢰를 받은 버지니아주의 한인 꽃집에서 정기적으로 이 화환을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리본의 문구들을 읽어내려가면서 지난 몇달 동안 취재과정에서 만났던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나이에 낯선 신생국 코리아의 전쟁터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든 참전용사들은 하나같이 한국의 발전상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면서도 한미 양국에서 한국전쟁이 잊혀지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워런 H 위드한 ‘미 한국전 참전 기념재단’ 사무총장(예비역 대령)은 얼마 전 기자와 만나 “요즘 젊은이들에게 전쟁은 관심사가 아니다”면서 “한국만 그런 게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는 첫 동료였던 찰리를 비롯해 수많은 전우의 죽음을 지켜봤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피를 흘린 한국 내에서 전우의 죽음이 헛된 죽음으로 변해가지 않을까 우려하는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1995년 가을, 처음으로 한국전 참전기념공원을 찾았을 때 받은 충격은 강렬했다. 더운 여름날 우비를 걸치고 행군하는 군인들을 형상화한 조각상들은 용맹스런 군인의 모습 대신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인간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 배경과 관련해선 수많은 이론이 존재할 수 있지만,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참전용사들은 그 누군가에게 생명 같은 자식들이었다는 점이다.
공원 내에 설치된 연못 가장자리에는 한국전쟁 당시 숨진 유엔군과 미군의 숫자가 각인돼 있다. 유엔군 사망자 62만8833명 중 미군 사망자는 5만4246명이었다. 린든 존슨 미 대통령은 1965년 7월 베트남전 추가 파병 기자회견 자리에서 “꽃 같은 우리 젊은이들, 멋진 젊은이들을 전쟁터에 보내기는 정말 싫다. 그들의 어머니가 얼마나 울고, 그들의 가족이 얼마나 슬퍼할지 저 역시 잘 알고 있다”면서 고개를 숙였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아프가니스탄 전쟁 추가 파병을 앞두고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제아무리 최첨단무기가 동원된다 해도 전쟁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미 의회는 얼마 전 한국전쟁 휴전일(7월27일)을 미국의 국가기념일로 정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한국전쟁 참전용사 인정 법안’(Korean War Veterans Recognition Act)’을 상·하원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며 한국전쟁을 국가적 차원에서 기리도록 했다. 대한민국 국민의 이름으로 한국전 참전기념공원에 헌화된 화환은 자국의 꽃다운 젊은이들을 한국에 파병하기로 결단한 미국 정부와 미국 국민들에게 한국 국민들이 전하는 감사의 메시지다. 이 화환 하나가 한미 우애를 외치는 수많은 수사를 압도하는 민간외교관 노릇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터 샤프 한미연합군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이 5일 한국전 참전기념공원을 찾아 헌화할 예정이다. 샤프 사령관과 함께 옛 전우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공원을 찾아올 위드한 총장 등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공원에 놓인 이 화환을 보고 가슴이 훈훈해졌으면 좋겠다.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조선일보 관련 기사>
2012년 8월12일
광복절을 사흘 앞둔 12일(현지 시각) 오후 미국 워싱턴DC '6·25전쟁 참전 기념 공원(Korean War Veterans Memorial)'. 이날도 인근 버지니아에 거주하는 현운종(73)씨는 6·25전쟁 때 사망한 미군을 기리는 화환을 참전 용사 동상 앞에 바쳤다. 2009년 광복절을 시작으로 1주일에 한 번꼴로 이어오고 있는 헌화다. 빨간 수국, 파란 수국으로 태극기 모습을 표현한 화환에는 '우리는 당신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한국 국민으로부터…'라는 영어 문구가 적혀 있었다.
3년 동안 150회가 넘은 미군 참전 용사에 대한 헌화는 한국에서 배창모(73) 한국금융투자인회 회장 등 서울대 상대 17회(59학번) 동기생들이 뜻을 모은 데 따른 것이다.
- 배창모 금융투자인회 회장이 13일 서울대 상대 17회 동기생 한병무(왼쪽) F&F 회장과 함께 워싱턴 6·25참전 기념공원 헌화 사진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워싱턴DC 6·25전쟁 기념공원 참전 용사 동상 앞에 화환을 놓고 있는 현운종씨. /김지호 객원기자 yaho@chosun.com, 워싱턴=임민혁 특파원
배 회장은 2009년 뉴욕 맨해튼의 배터리파크를 방문했다가 그곳에 있는 6·25 참전비 앞이 썰렁한 것을 보고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를 위해 숨진 미군 장병들의 이름 앞에 꽃다발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최소한의 보은이라 생각했다.
그는 얼마 후 서울 상대 17회 동기 모임에서 미국의 6·25 참전 기념비에 대한 헌화를 제의했고, 동기들은 흔쾌히 동의했다. 배 회장과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 김승만 한테크 회장, 김항덕 중부도시가스 회장,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 심춘석 이포CC 회장, 배정운 철강신문 회장, 성하현 한화리조트 부회장, 한병무 F&F 회장 등이 헌화 추진위원이 돼 3000여만원을 모금했다. 헌화 장소는 상징성 등을 고려해 워싱턴의 참전 공원으로 결정했다.
마침 배 회장의 용산고 동기인 현씨가 워싱턴 인근에 거주하는 데다 그의 부인이 꽃집을 운영하고 있어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연세대 상대 출신으로 미 농무부, 의회 도서관 등에서 30년 넘게 공무원 생활을 한 현씨는 "내가 화환을 들 힘이 있는 한 무슨 일이 있어도 헌화를 책임지겠다"고 했다. 서울 상대 동기회는 모금한 돈을 꽃값으로 보냈고, 작년 초 2700만원을 2차로 모금했다.
배 회장은 "6·25 참전 80대 노(老)병사들이 찾아와 화환을 보고는 '우리 삶이 헛되지 않았다'며 울기도 한다"면서 "우리도 헌화를 계속할 것이지만 이제 미국 교민들도 직접 나서서 사는 동네마다 미군 6·25 참전 기념비를 세운다면 한미 간 교감은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임민혁 특파원
'조기자의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미 옥죄는 평화협정 굴레 (0) | 2010.03.08 |
---|---|
[특파원칼럼]미국의 음주운전 처벌 (0) | 2009.12.28 |
[특파원칼럼]오바마, 미셸리 교육개혁 (0) | 2009.11.30 |
[특파원칼럼]뉴욕 온 리근의 두 얼굴 (0) | 2009.11.02 |
[특파원칼럼]의원 품위에 엄격한 미국 (0) | 2009.09.12 |
[특파원칼럼]미국은 한일 과거사 바로봐야 (0) | 2009.09.07 |
[특파원칼럼]소통과 불통의 차이 (0) | 2009.07.13 |
[특파원칼럼]미 의회청문회가 준 감동 (0) | 2009.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