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통합당 내에서 대선 패배 이후 “질 수 없는 선거를 졌다”는 자탄이 흘러나왔다.

그런 말이 나올 만하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대선 기간 내내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따른 ‘이명박 디스카운트’에 시달렸다. 야권 대선후보 단일화가 성사된 직후엔 여론 지지율 1위 자리를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에게 내주며 코너에 몰리기도 했다. 이번 대선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이 총결집한 대격돌이었다. 산업화 세력의 상징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은 보수 진영의 대표주자로 나섰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야권후보 단일화만 이뤄지면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의 박빙 경합 끝에 약 57만표 차로 신승을 거뒀던 2002년 대선의 판박이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야권의 바람대로 투표율도 높았지만 결과는 박 당선인의 108만여표 차 승리였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개인적으로 ‘야권이 질 수 없는 선거였다’는 명제에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민주당은 오랫동안 질 수밖에 없는 길을 걸었다는 생각이 든다. 대선 패배는 그 결과물일 뿐이다.

그동안 우리는 이념 과잉의 시대를 살았다.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 공과를 놓고, 해방 이후 대미 종속 여부를 놓고, 또 무엇을 놓고 두 패로 갈려 서양의 보수·진보 개념을 빌려쓰며 좌파니 우파니 하는 이념 투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진보 진영은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선명성 경쟁이라도 하듯이 좌클릭을 거듭했다. 2004년 열린우리당 시절부터였다고 기억된다.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이 만들어낸 비정상적 분위기 속에서 원내 과반인 152석을 얻었는데도 총선 결과를 민심으로 오독(誤讀), 민생과 무관한 개혁 담론에 매몰됐다. 국가보안법 폐지 등 ‘4대 개혁법안’에 올인했다. 그러는 사이 당 지지율은 곤두박질쳤고 ‘100년 정당’을 꿈꿨던 열린우리당은 창당 4년 만에 공중분해됐다.
민주통합당은 지난해 4·11 총선 공천 과정에서도 열린우리당의 전철을 밟았다. 중도·실용파 의원들을 대거 낙천시키고 그 자리를 진보 진영 인사들로 메웠다. 문재인 대선 후보는 진보 진영의 주문대로 자신이 노무현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 추진했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제주해군기지 건설 사업에 제동을 걸고 나서는 자가당착의 태도를 보였다. 민주당이 왼쪽으로 치닫는 동안 새누리당은 ‘경제 민주화’, ‘복지’ 같은 진보의 어젠다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수구 보수의 이미지를 탈색시켰다. 민주당은 새누리당의 경제 민주화, 복지 공약을 ‘짝퉁’으로 몰아붙이며 관련 공약을 더 좌파적으로 만들어갔다.

하지만 세상을 흑백으로 가르는 시대는 오래전에 저물기 시작했다. 좌파 정당인 영국 노동당과 독일 사민당은 1990년대부터 성장과 복지를 조화시킨 ‘제3의 길’을 제시하며 변신을 모색했다. 영국 노동당은 사회주의 성향을 완화한 ‘신노동당’ 기치로 바꿔든 이후에야 만년 야당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뼛속까지 보수주의자였던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공화당)도 2000년 대선 당시 중도파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정적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atism)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정권교체에 성공한 부시 대통령이 집권 8년 동안 보수 본색을 드러내며 ‘신보수주의’로 질주하자 미국인들은 2008년 대선에서 공화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우파든 좌파든 빛바랜 강령 속에 갇혀 있던 정당과 정부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국민들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정당과 정부를 원한다. 무소속 안철수 후보가 간파했듯이, 상식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번 대선의 화두가 됐던 복지를 말한다면, 복지를 하려면 재원이 필요하고, 재원 마련을 위해선 기업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게 상식이다. 글로벌 시대의 경제 첨병인 기업이야말로 복지 재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경쟁력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국가 주도의 복지정책에는 한계가 있다는 게 상식이다. 복지만의 문제가 아니다. 열린우리당 이전의 민주당은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을 표방하며 국민과 함께 호흡했다. 민주당은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조남규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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