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중구역에 자리 잡은 연회장 ‘목란관’엔 대형 ‘해 사진’이 벽에 걸려 있다.

금강산과 동해 위로 붉은 해가 떠 있는 사진이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 일행에게 “저게 해 뜨는 장면 같소, 아니면 지는 장면 같소?”라고 물은 뒤, “아침에 들어와서 보면 해뜰 때, 술 마시다 저녁에 해 질 때 보면 또 저 장면”이라고 자문자답했다는 바로 그 사진이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취재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했던 기자가 보기에도 목란관의 해 사진은 떠오르는 것인지, 지는 것인지 쉽게 분간하기 힘들었다. 남북경협의 상징이라는 개성공단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작금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과정에서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했는가를 놓고 온 나라가 두 패로 갈려 야단법석을 떨었을 때, 그 사진이 생각났다. 개성공단 해법이든, NLL 해법이든 정답은 하나일 수 없다. 보수와 진보, 중도가 각자의 해법을 들고 국민의 선택을 받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다. 그러라고 정치가 있는 것이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은 진보, 그중에서도 이른바 친노(친 노무현) 세력의 대북 해법이 가동된 시기였다. 노무현정부는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을 계승하면서도 안보 면에서는 더 과감한 구상을 실험했다. 그 핵심이 NLL 위에 ‘서해 평화수역’을 덮어씌우겠다는 구상이다. 노무현의 대북 접근법은 무모하고 안이했다. 김정일은 노무현의 서해 평화수역 구상을 NLL 무력화의 불쏘시개로 썼다. 노무현정부를 방패 삼아 미·일의 대북압박을 우회하면서 핵·미사일 능력을 한층 강화시켰다.

2007년 10월2일 저녁, 목란관을 무대로 연출됐던 한 편의 소극(笑劇)이 떠오른다.

당시 노 대통령이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식사를 하던 도중 만찬장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김만복 국정원장과 김장수 국방장관(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등이 북측 관계자들과 함께 일어나서 “위하여!”를 외치자 옆 테이블에서도 남북 인사들의 건배 릴레이가 이어졌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노 대통령은 갑자기 술잔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나 연설 마이크가 있는 단상으로 걸어나갔다. 의전에 없던 돌발 상황이었다.

“오늘 저녁에 여러분이 각 테이블에서 건배하는 것을 보니 신명이 좀 나는 것 같습니다. 나머지 테이블은 따라 하자니 그렇고, 안 하자니 기분이 안 풀리는 것 같으니 다 같이 기분을 풉시다.” 노 대통령의 발언은 계속됐다. “남북한 간에 평화가 잘되고 경제도 잘되려면 빠뜨릴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하시고, 또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건강해야 합니다. 좀 전에 (제가) 건배사를 할 때 두 분의 건강에 대해 건배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만찬장이 술렁거렸다. 어느 한국 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김정일의 만수무강을 빌어준 일이 있었던가. 노 대통령은 “신명난 김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영남 상임위원장, 두 분의 건강을 위해 건배합시다”면서 “위하여!”를 선창했다.

노 대통령은 그 다음날 오전 김정일과의 첫 정상회담을 마친 뒤 수행원들과 취재진이 기다리고 있던 대동강변의 옥류관으로 돌아와 예정에 없던 오찬사를 했다. “남측이 신뢰를 가지고 있어도 북측은 아직도 남측에 여러 가지 의구심을 갖고 있다. 불신의 벽을 허물기 위해선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우리는 개성공단을 ‘개혁과 개방의 표본’이라고 많이 얘기했는데, 우리의 관점에서 우리 편한 대로 얘기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북측이 보기에는 역지사지(易地思之)하지 않은, 그런 것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본인의 표현 그대로, 매사에 북한 입장에서 역지사지하자는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었다고 전제하고 보면, 그가 김정일과의 정상회담 과정에서 “그것(NLL)이 국제법적인 근거도 없고 논리적 근거도 분명치 않은 것인데…”라거나 “남측에서는 이걸(NLL) 영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라고 말한 사실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북핵과 관련해서 “북측의 입장을 가지고 미국하고 싸워 왔고, 국제무대에 나가서 북측 입장을 변호해 왔다”고 한 발언도 자연스럽다. 국제사회의 제재와 중국의 냉랭한 태도로 의기소침해진 북한 정권이 유독 우리 정부에게만은 협박을 서슴지 않고 있는 이유도, 언젠가는 남한에서 ‘북한 입장에서 역지사지하는 정권’이 들어설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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