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자신들을 고슴도치에 비유하곤 한다.

북한의 ‘고슴도치 동화’에서 미국은 호랑이로 그려진다. 호랑이가 제아무리 최상위 포식자라 해도 가시털을 곧추세운 고슴도치는 어쩔 도리가 없다. ‘핵과 미사일’(가시털)로 시도 때도 없이 한국과 미국을 협박하는 북한이고 보면 제법 그럴싸한 비유다.

기원전 8∼7세기에 활동했던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는 “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안다”고 읊었다. 이 시구에서 영감을 얻었는지, 후대의 우화들은 꾀 많은 여우가 번번이 고슴도치와 싸워 낭패를 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화에서 여우는 갖은 꾀로 고슴도치를 처치하려 하지만 고슴도치가 가시털을 세운 채 몸을 웅숭그리면 여우는 번번이 제풀에 나가떨어진다.

국제사회의 설득과 압박에도, 주민들의 굶주림에도 아랑곳없이 핵과 미사일을 신주단지 모시듯 해온 북한은 영락없이 고슴도치를 닮았다. 북한이 최근 3차 핵실험에 대응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에 맞서 하루가 멀다하고 한반도 위기를 고조시키는 행태도 온몸의 가시를 세워올린 고슴도치를 연상시킨다. 북한이 고슴도치라면 북한과 씨름해온 한·미는 여우의 처지다. 여우는 이 고슴도치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대북 강경론자들은 고슴도치를 제거해버리자고 한다. 수단을 놓고는 군사적 조치에서 대북 심리전에 이르기까지 편차가 다양하지만 3대 세습의 김정은 정권을 붕괴시켜야 한다는 지점에선 일치한다.

그들에게 북핵 1차 위기는 절호의 기회였다. 미국이 1994년 초여름에 계획한 영변 핵시설 ‘족집게 폭격(surgical strike)’이 이뤄졌다면 북핵의 싹을 잘라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북한 정권이 무너지는 급변사태가 현실화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의 영변 폭격에 제동을 건 것은 김영삼정부였다. 빌 클린턴 미 행정부가 영변 폭격을 검토하면서 주한미군과 미 대사관 가족 등을 서울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을 때 김영삼 대통령은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 대사를 불러 “미국이 우리 땅을 빌려서 전쟁을 할 수 없다”면서 결사 반대했다. 보수정권의 대통령이 반대했을 정도로 고슴도치 제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명쾌한 해법처럼 보이지만 여우도 치명상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슴도치를 살살 달래서 가시를 세우지 않도록 진화시켜야 한다는 대북 유화론자들은 한·미의 보수정권인 이명박정부와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의 대북 정책 전환을 못내 아쉬워한다. 김대중·노무현 진보정권의 대북 유화책과 클린턴 정부가 북·미 제네바 합의 이후 취한 대북 개입(engagement) 정책을 이명박, 부시 정부가 계승했더라면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혁·개방의 길로 나섰을 것이란 전망에서다. 이런 주장의 치명적 약점은 칼자루를 북측에 넘겨준 채 핵 포기든 미사일 발사 유예든 북한의 선의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북핵 6자회담은 미국의 대표적 대북 강경파인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마저 “남북한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6자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앉은 ‘혁명적인 대화틀’”이라고 극찬해 마지않은 협상이었다. 6자는 진통 끝에 북한이 원하는 평화협정 체결을 포함한 포괄적 합의(2005년 9·19공동성명)를 도출해냈지만 북측의 선의가 작동되지 않는 순간 합의문은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한때 한·미 정부가 활용했던 ‘선의의 무시(benign neglect) 전략’에 따라 제멋대로 날뛰는 고슴도치를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박근혜정부는 고슴도치를 우리 안에 가두고(제재) 먹이를 조절하면서(단계적 지원) 길들이는 능동적 압박정책을 채택한 듯하다. 김영삼, 이명박 정부는 ‘북한 붕괴론’에 대한 과도한 기대감에 빠져 고슴도치를 고사시키려 했으나 고슴도치의 화를 돋웠을 뿐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북한의 진정성’에 대한 과도한 기대감에 빠져 고슴도치를 진화시키려 했으나 고슴도치는 받아먹은 먹이로 가시만 키웠을 뿐이다. 박근혜정부의 고슴도치 길들이기는 북한 붕괴론이나 북한의 진정성에 대한 기대감을 버리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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