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부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사실상 지원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대다수 한국인은 착잡한 심경으로 바라보고 있다.
(미국은 2013년 10월3일 도쿄에서 열린 미일 외교·국방장관 연석회의에서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일본 아베 신조 정권의 헌법 해석 변경 노력에 대해 '환영'과 '협력'의 뜻을 밝혔다)
집단적 자위권은 동맹국이 공격당했을 때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하고 반격할 수 있는 국제법상의 권리이다. 미국 등 연합국이 1951년 2차대전 패전국 일본과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는 ‘일본은 주권국가로서 유엔헌장 51조에 언급된 개별적 혹은 집단적 자위권을 소유하며…’라고 명문화돼 있다. 미국은 6·25전쟁을 계기로 일본을 동북아 안보전략의 요충 국가로 만들겠다는 그림을 그린 것이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미국이 9·11테러 이후 세계적인 대테러 활동 과정에서 일본 자위대의 적극적인 집단방위 노력을 이끌어 내려 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일본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나 아베 총리 같은 우경화 성향의 지도자가 등장할 때마다 자위대 이지스함의 페르시아만 파견이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일본 헌법 개정 또는 헌법해석 변경 시도를 통해 맞장구쳤다.
그럼에도 지금껏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자제하고 있는 것은 국내 반전 여론 때문이다. 일본이 천황제를 지키기 위한 고육책의 일환으로 고안해낸 ‘평화헌법’도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억제해왔다. 일본 헌법 9조는 ‘일본인은 영원히 국가 주권으로서의 전쟁과 국제분쟁 해결 수단으로서의 군대 사용 또는 위협을 수행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 보수파들은 “일본 헌법이 집단적 자위권을 명백히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고 강변하고 있으며, 아베 정부도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가능하다는 쪽으로 헌법 해석을 변경하려 하고 있다.
미국은 오랫동안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학수고대해왔다. 현행 평화헌법 체제에서는 미국 군함이 적국에 의해 공격을 받았을 때 일본 자위대는 원조 행위를 일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이즈미 총리와 함께 미·일 밀월(蜜月)시대를 구가했던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는 미·일의 원활한 동맹 작전 수행을 위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적극적으로 요구했으며, 일본을 지금보다 강한 방위력을 갖춘 ‘보통국가’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세우기도했다. 최근 들어 일본이 미국의 동북아 미사일방어(MD) 체계에 깊숙이 편입되고 있는 현실은 그 결과물이다.
2013년 10월3일 도쿄에서 열린 미일 외교·국방장관 연석회의(2+2·미일안전보장협의위원회)
곤란하게 된 건 한국이다. 한·미 동맹을 한반도 안보의 주축으로 삼고 있는 우리는 미·일 동맹의 강화 기조를 반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더욱이 재정적자에 짓눌린 미국이 일본과 함께 동북아 안보 부담을 나눠 지려 하는 것을 반대할 처지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미·일의 외교·국방장관들이 만나 축배를 들고 있는 모습에는 왠지 거부감이 앞선다. 대다수 한국인의 감정이 그럴 것이다.
이런 막연한 거부감의 배경엔 100년 전 구한말의 집단 기억도 깔려 있을 것이다. 당시 제 힘으로 제 나라를 지킬 수 없게 된 조선은 미국을 상대로 한 생존외교에 사활을 걸었다가 배신당한 뼈아픈 경험이 있다.
고종은 조선과 미국 사이에 체결된 조·미조약의 ‘거중 조정’(good offices) 조항에 기대 일본의 조선 침략을 막아보려 했으나 당시 미국의 국익은 일본과 손잡는 것이었다. 영국에 이어 해양 패권국이 되고자 했던 미국에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최적의 파트너였다.
21세기의 미국은 조선에 냉담했던 100년 전의 미국이 아니다. 일본도 제국주의 시대로 회귀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일본과 손잡고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은 태생적으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에서 생존전략을 모색해온 반도국가의 지정학적 고충을 가중시키고 있다. 미국을 등에 업고 서슴없이 과거사·영토 도발을 자행하는 일본은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잠재돼 있던 100년 전의 기억을 되살린다. 일본이 철저한 과거사 반성의 토대 위에서 ‘보통 문명국가’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미국이 한·일 역사갈등에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지속한다면 일본의 정상국가화도, 미국의 동북아 안보전략도 온전히 완성될 수 없다.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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