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을 계기로 조선의 17세기가 새삼 조명을 받고 있다. 그 바탕엔 조선이 사대(事大)했던 명나라의 국력이 쇠하고 여진족의 후금(청나라)이 동북아 패권국으로 부상한 당시 정세가 중국의 굴기(堀起)로 미국의 동북아 패권이 도전받고 있는 작금의 상황과 유사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동북아 패권 지형도가 새로 그려질 때마다 우리가 생존의 기로에 서는 것은 대륙·해양 세력 사이에 낀 한반도의 지정학적 숙명이다. 역사평설 ‘병자호란’의 저자인 명지대 한명기 교수가 서문에서 “병자호란은 ‘과거’가 아니다. 어쩌면 지금도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현재’일 수 있으며, 결코 오래된 미래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반추해야 할 ‘G2(미·중) 시대의 비망록’이다”라고 쓴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역사가 기록하고 있듯이, 17세기 조선의 국왕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후금은 '떠오르는 태양', 명나라는 '지는 해'로 봤기 때문이다. 반면 사대사상에 매몰된 조선 신료들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내세우며 광해군에 맞섰다.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옹립(인조반정·1623년)한 조선은 친명 노선을 고수하다 끝내 대청(大淸)제국으로 강성해진 여진의 침략(병자호란·1636년)을 자초했다. 인조는 송파의 삼전도에서 오랑캐 수장이라고 멸시했던 청 태종 홍타이지 앞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치욕이다. 조선 백성은 인조나 조정 신료보다 더 참혹한 수난을 당했다. 청군은 철수할 때 조선 백성 수십만명을 끌고갔다.

                                                                                                     <삼배구고두례>


병자호란으로 능욕당한 조선의 원혼들은 21세기 한반도에 “자강(自强)만이 살길”이라고 통곡한다. 광해군은 말했다. “중원의 형세가 참으로 위급하다. 이런 때에는 안으로 자강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한결같이 고려가 했던 것처럼 한다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행동이 따르지 않았다. 광해군은 성곽을 쌓고 장병을 기르는 데 써야 할 소중한 재원을 궁궐을 짓는 데 탕진했다. 신료들은 틈만 나면 광해군을 흔들었고 광해군은 왕권 강화를 위해 정적(政敵)을 내치는 권력투쟁에 몰두했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후금군에게 격파된 이후에도 조선은 단결하지 않았다. 쿠데타로 광해군을 내쫓은 서인(西人) 정권도 입으로만 전쟁을 외쳤다. 전쟁은 준비하지 않고 화친(和親)만을 반대했다. 후금이 쳐들어오자 임금(인조)은 수도를 버렸고 장졸은 창을 버렸다. 군 최고통수권자와 지도층이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자 조선은 유린됐다. 임진왜란 때도 그랬고 6·25전쟁 때도 그랬다. 17세기 조선의 집권 세력은 임진왜란의 교훈을 잊었고 6·25전쟁 당시 이승만정부는 병자호란의 교훈을 잊었다.

17세기 조선이 취한 대외 전략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광해군 집권(1608년) 당시 조선과 명나라는 동맹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함께 치른 혈맹 관계였다.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왜구의 침략에 맞서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의 은혜(再造之恩·재조지은)를 저버려선 안 된다는 여론도 팽배했다. 아직 후금은 요동 지역도 평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금나라가 강성해질 때까지 화친조약을 거부하며 항전했던 고려의 전례를 따르는 것이 더 실리적이지 않았을까. 물론 이런 가정은 부질없다. 인조반정을 전후한 시점에 여진은 더 이상 명나라와 조선이 맞설 수 없을 만큼 강한 제국이 돼 있었다. 그렇다면 인조와 서인 정권은 현실을 직시하고 광해군의 실용주의 노선을 계승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이 또한 부질없는 가정이다.

조선은 시대착오의 대명사인 돈키호테처럼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모험주의로 치달았다. 정작 싸워야 할 때는 싸우지 않고, 더 이상 싸움이 무의미할 정도로 대세가 기울었을 때는 허상의 명분에 사로잡혀 치욕의 역사, 수난의 역사를 기록해 간 17세기 조선은 격동의 동북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선명한 반면교사로 다가온다.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아래 글은 삼전도비 현장을 찾은 중앙일보 장세정 논설위원의 글. 중앙일보 2020년 6월8일자.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555m 롯데월드타워 옆 3.95m 삼전도비 '패권 싸움 흑역사'

 

지정학이 초래하는 구조적 비극은 언제든 되풀이될 위험이 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은 예나 지금이나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다. 미·중 패권 경쟁이 과열되는 지금, 대륙 패권을 놓고 명·청이 다투던 400년 전 17세기 조선에 눈길이 쏠리는 이유다.  
 어둡고 부끄러운 역사에서 교훈을 얻자는 '다크 히스토리(흑역사) 투어' 차원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관련된 두 유적지를 답사했다. 하나는 임진왜란(1592~1598) 당시 군대를 보내준 명나라의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보답하겠다며 친명 사대주의 의리를 다짐한 만동묘(萬東廟)다. 다른 하나는 병자호란(1636~1637) 때 남한산성의 굴욕을 생생하게 기록한 삼전도비(三田渡碑)다.   

양난(兩亂)으로 불리는 두 전쟁을 치르면서 조선 왕조는 건국 200년 만에 뿌리부터 크게 흔들려 당장 망해도 이상할 게 없는 지경이었다. 왜군과 오랑캐의 말발굽에 짓밟힌 백성은 어육(魚肉)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명·청 교체기에 대외 전략 오판이 자초한 삼전도비와 만동묘는 동전의 양면이다.
  
 ①만동묘, 조선시대 친명 사대주의 상징
 지난 3일 충북 괴산의 만동묘를 찾아 나섰다.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로 2시간, 다시 차로 30분을 달렸더니 조선 성리학자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은거하던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당도했다. 

사실 송시열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이 발탁한 인재였다. 하지만 최명길의 대척점에 있던 척화파 김상헌처럼 숭명배청(崇明排清) 노선을 걸었다.  
 병자호란 이후 1644년 명나라가 멸망했는데도 송시열은 화양구곡( 華陽九曲)의 명당자리에 만동묘를 짓도록 했다. 선조 때 터진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 만력제와 마지막 황제인 의종 숭정제의 위패를 송시열 사후인 1704년 만동묘에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경기도 가평 조종암(朝宗巖)에 선조가 남긴 만절필동(萬折必東) 네 글자를 송시열이 화양구곡의 첨성대 바위 절벽에 새겼고, 첫 글자와 끝 글자를 따서 만동묘라고 이름 붙였다. 만절필동은 황하 흐름이 수없이 꺾여도 결국 동쪽으로 간다는 뜻뿐 아니라 충신의 절개로 의미가 확장됐다.  
 만동묘로 올라가는 계단은 균형을 잡고 걷기 힘들 정도로 위태로웠다. 아래로부터 위를 향해 계단을 3칸, 5칸, 3칸, 5칸을 오른 뒤 맨 위에 황제를 상징하는 9칸 계단을 오르도록 배치했다. 임진왜란으로 망할 위기에 처했던 조선을 살려줬으니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명나라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라는 의도가 숨어 있다. 
만동묘 유적을 몇 년 전에 답사한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전 한국정치사학회장)는 "계단 경사가 70도를 넘을 정도로 가파르고 계단 폭도 매우 좁다"며 "황제를 모신 사당이니 개처럼 기어서 올라가서 개처럼 기어서 내려오라는 무언의 압력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허영란 괴산군 문화해설사는 "계단이 하도 가팔라서 흥선대원군이 하인의 부축을 받고 올라가자 옆에 있던 문지기가 밀어버렸다는 일화가 있다"고 전했다. 봉변당한 분풀이 차원인지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령을 내리면서 1865년 만동묘를 가장 먼저 철거했는데 이에 반발한 유림이 1875년 다시 세웠다.  
 명나라의 임진왜란 개입에 반감을 가졌던 일제는 1942년 만동묘를 불태우고 비석 건립 유래를 새긴 만동묘정비(萬東廟庭碑) 글자를 정으로 모두 훼손하고 땅에 묻었다. 하지만 1983년 대홍수 때 비석이 다시 드러났고, 2004년 괴산 지역 유지에 의해 만동묘와 만동묘정비가 복원됐다.
 공교롭게도 만동묘의 존재를 널리 알린 것은 '친중 정권'이란 지적을 받은 문재인 정부 들어서다. 2017년 12월 5일 당시 노영민 주중대사(현 대통령 비서실장)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면서 인민대회당 방명록에 '만절필동(萬折必東) 공창미래(共創未來)'라는 글을 남겼다. 그의 본뜻은 우호 강조였겠지만 사대주의를 상징하는 용어 사용은 부적절했다. 더군다나 대사 부임 불과 8개월 전인 2017년 4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시진핑은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망언하지 않았던가.  
  
 ②삼전도비, 청나라에 항복한 굴욕 상징
지난 2일에는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와 함께 삼전도비를 찾아 나섰다. 김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남한산성'의 여운이 강렬했던 이유도 있지만, 굴욕의 역사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석촌호수가 넓어 비석을 찾으려면 애를 좀 먹겠거니 생각했는데 뜻밖에 너무 쉽게 찾아냈다. 잠실 광역환승센터 2번 출구에서 석촌호수 공원 안으로 불과 20여m 걸어 들어가니 대한민국 사적 101호 '서울 삼전도비'가 눈앞에 들어왔다.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라 새겨진 이 거대한 비석은 귀부(龜趺, 거북 모양의 받침)를 뺀 몸체 높이만 3.95m다. 32t 화강석을 충북 충주에서 캐낸 뒤 한강을 통해 배로 실어 날랐고 인부 400여명이 육지로 끌어서 옮겼다고 한다.
 명·청 교체기에 실리외교를 폈던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반정 세력들은 아무런 대비 없이 기울어가던 명나라를 섬기다 신흥 세력 후금(청)의 눈 밖에 난다. 김상헌의 척화파와 최명길의 주화파가 치열하게 대립했지만, 묘수를 찾지 못했고 끝내 굴욕적 군신 관계를 받아들여야 했다.  
 삼전도비 주변을 둘러보는 심정은 여러모로 불편했다. 병자호란이 터진 1636년 겨울 남한산성에서 약 50일간 농성하던 인조가 오랑캐로 여겼던 청 태종 앞에서 항복했다. 세 번 무릎 꿇고 아홉번 이마를 땅에 조아린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행한 굴욕의 역사가 지금도 생생해 속이 불편했다.   

사실 삼전도비는 건립 과정과 건립 이후에도 수차례 수난을 겪었다. 청 태종은 비문을 조선이 직접 작성하도록 강요했고, 비석 크기를 문제 삼아 중간에 다시 제작하도록 했다. 명나라를 섬기던 조선의 관리들은 청나라에 머리 숙인 굴욕적 비문을 쓰지 않으려고 서로 떠넘겼다. 결국 문신 이경석이 쓴 비문에서 인조는 "내가 어리석고 미혹되어 하늘의 벌하심을 자초해 만백성이 어육이 됐으니 죄가 내 한 몸에 있다"고 했다.  
 청·일 전쟁에서 판세가 일본으로 기울자 고종은 사대주의를 상징해온 삼전도비를 아예 뽑아버리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1917년 일제가 다시 세웠고 해방 10주년이던 1955년 이승만 정부가 땅에 묻기도 했다. 
 이런 절절한 역사를 있는 그대로 설명해주는 유적 안내가 너무 부실했다. 부끄러운 역사라 감추고 싶었다면 근시안적 '역사맹(盲)'이다. 석촌호수에 놀러 나온 20대 젊은이들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배웠는데 유적 설명이 너무 부족하다. 어두운 역사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삼전도비 현장을 촬영하다 카메라 앵글에 삼전도비(3.95m)와 롯데월드타워(123층, 555m)가 동시에 들어와 깜짝 놀랐다. 무력으로 조선을 짓밟은 청나라의 강압으로 세운 삼전도비, 신중화주의로 무장한 중국에 의해 사드 보복을 당한 롯데가 세운 대한민국 최고층 빌딩. 인연인지 악연인지 그 둘이 지금 불과 100여m 거리를 두고 나란히 서 있으니 이런 역사적 아이러니가 있을까.  
 삼전도비는 고증을 거쳐 2010년 4월 현재의 위치에 옮겨졌다. 2016년 7월 주한 미군의 사드 배치 방침이 발표되면서 중국의 사드 보복이 시작됐다. 롯데월드타워는 그해 12월 완공됐지만, 중국은 사드 기지 부지를 제공한 롯데를 부당하게 괴롭혔다. 군사 주권과 기업의 자율을 무시한 중국의 폭거였지만 한국 정부는 저자세다. 이 판국에 대통령은 "중국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 "한·중은 운명공동체"를 역설했으니 갸우뚱해진다.

신복룡 전 석좌교수는 "대한민국 최고층 빌딩을 배경으로 삼전도비를 바라보니 정보기술(IT) 최강의 나라가 아직도 소(小) 중화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갈라파고스 (거북) 증후군'에 빠져 있는 듯해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장은 "미·중 패권 경쟁이 요동치는 상황에서 외교·안보가 까막눈이면 자칫 인조의 길로 갈 수도 있다.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해양세력과 연대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만동묘와 삼전도비가 우여곡절을 겪은 것처럼 한반도는 국제 질서 재편 때마다 시련과 능욕을 경험했다.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할 능력을 갖춘 나라가 됐다"(이수혁 주미대사)는 발언은 성급한 자만이다. 주요 11개국(G11) 가입을 거론하며 김칫국부터 마시지만, 망국의 그림자는 자만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태종과 세종 치세를 논하기에 앞서 선조·인조·고종의 시행착오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역사의 거울에 지금의 우리를 차분하게 비춰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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