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자랑스러운 민주당원, 자랑스러운 미국인, 자랑스러운 힐러리 클린턴 지지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 자리에 서게 돼 영광이다.”

2016년 7월26일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장. 민주당 대선경선에서 클린턴 전 국무장관에 맞서 끝까지 싸운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연설문의 첫 문장을 읽어내려가자 장내에서는 환호성과 우레와 같은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당신이 힐러리에게 표를 던졌든, 아니면 나를 지지했든, 이제는 동일한 목적 아래 당 전체가 단합해야 할 때다” 더 큰 박수가 터져나왔고 대의원들은 ‘No Trump!’를 외쳤다. 샌더스 의원은 “힐러리 클린턴은 나의 후보이다. 그는 우리의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전날 시작된 민주당 전당대회는 개최 직전까지만 해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당 내에서는 클린턴 후보 지명에 불만을 품은 샌더스 지지자들이 전당대회 난동 사태를 촉발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하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전당대회 사흘째, 샌더스는 클린턴에게 또 하나의 선물을 안겼다.

그 날 오전에 전당대회 대의원들은 클린턴과 샌더스를 대상으로 호명(roll call)투표를 실시했다. 롤 콜은 알파벳 순으로 각 주 대표가 나와, 대의원 투표 결과를 공개로 발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미 경선 과정에서 클린턴 후보가 과반 대의원을 확보했기 때문에 롤 콜은 클린턴을 민주당 후보로 지명하는 요식 절차에 불과했다. 샌더스는 이를 당의 단합을 위한 계기로 활용했다.

호명투표가 절반 넘게 진행됐을 때 샌더스는 자신의 지역구인 버몬트주 대의원들 앞에 섰다. “우리 당의 단합을 보여주고 대선 승리를 각오하는 다짐의 일환으로 우리가 한 목소리로 힐러리 클린턴이 우리의 후보이고 우리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자”고 말했다. 그러자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런 뒤 샌더스는 전당대회 호명투표를 중단하고 박수로 오바마를 지명하자고 제안했다. 그 제안은 통과됐고 대의원들은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대의원들은 ‘힐러리’를 연호했다. 전당대회 의장은 호명 투표 중단을 선언했다. 클린턴과 샌더스의 오랜 싸움이 비로소 종지부를 찍었다. 샌더스가 양 진영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씻김굿을 해준 셈이었다.

2008년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버락 오바마(오른쪽)는 민주당 경선 맞수였던 힐러리 클린턴을 새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 임명하면서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이상은 다음달 25일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되는 민주당 전당대회 상황을 필자가 가상해서 그려본 모습이다.

소설을 쓴 것은 아니고 2008년 8월 콜로라도 덴버에서 열렸던 민주당 전당대회의 실제 상황을 토대로 등장 인물만 바꿔서 재구성한 것이다. 버락 오바마를 힐러리 클린턴으로, 힐러리 클린턴을 버니 샌더스로 바꿨다.

올해 민주당 대선경선도 치열했지만 2008년 민주당 경선에서도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과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 죽기살기로 싸웠다.

클린턴은 그 해 6월7일 오바마 지지를 공식 선언했으나 클린턴 지지자들은 경선 과정에서 쌓인 앙금을 쉽게 풀지 못했다. 일부 지지자들은 ‘클린턴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지명하라’는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그 해 8월25일 콜로라도 덴버에서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하루 전날 오바마는 부통령 러닝 메이트로 조 바이든 상원의원을 선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클린턴 지지자들의 실망감은 컸다. 민주당 지도부가 전당대회 난동 사태를 걱정했을 정도다. 공연한 걱정이었다. 전당대회는 축제의 장이 됐다.

워싱턴포스트 정치전문기자인 댄 볼츠는 저서 ‘THE BATTLE FOR AMERICA 2008’에서 당시 정황을 전하면서 힐러리 클린턴과 남편인 빌 클린턴 덕분에 민주당이 내분을 종식시키고 일치단결해서 본선 경기에 임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오바마는 클린턴에게 빚을 졌다. 

클린턴과 비슷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
클린턴 유튜브 캡처

클린턴은 이제 2008년과는 정반대의 상황에 놓여있다. 그는 경선 맞수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그 지지자들을 우군화해야 한다. 8년 전의 클린턴처럼 샌더스도 할 수 있을까. 샌더스 의원은 지난 9일 오바마 대통령과의 회동 직후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된다면 재앙이다. 유권자들이 여성과 소수집단을 모욕하는 사람을 지지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면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고, 조만간 클린턴 전 장관을 만나 협력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상의 클린턴 지지 선언이지만 아직은 2%가 부족하다. 샌더스의 지지자들을 클린턴 쪽으로 돌려세우기 위해서는 필자가 전개한 가상의 시나리오대로 민주당 전당대회가 흘러가야 한다. 사전 각본도 좋아야 하고 샌더스의 연기력도 좋아야 한다.

클린턴과 샌더스 지지자들을 하나로 융합시키는 과정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오바마야말로 샌더스 지지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이다. 진보 유권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오바마는 여전히 80%가 넘는 지지를 받고 있다. 오바마는 8년전 클린턴에게 진 빚을 갚으려 한다. 그런 오바마가 임기말 재선 대통령치고는 괜찮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클린턴에게 행운이다. 

오바마의 클린턴 지원 유세(미국은 한국과 달리 대통령의 선거 지원 운동이 가능하다)는 특히 위스콘신과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같은 경합주 싸움에서 도움이 될 것으로 미 언론은 분석한다. 오바마는 두 번의 대선에서 이들 주를 석권했다. 오바마라면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인 백인 노동자층을 분열시키고, 중도·무당파층을 끌어올 수 있다.

클린턴은 조만간 샌더스와 만날 것이다. 그 자리에서는 민주당 강령을 보다 진보화하는 문제가 최우선 의제가 될 것이다. 이미 샌더스는 경선 과정에서 클린턴을 통상과 월가 개혁 문제에서 좀 더 진보적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샌더스는 이제 시간당 최저임금 인상 등과 같은 경제 이슈와 정당 민주화 부문에서 클린턴의 양보를 요구하고 있다. 클린턴과 샌더스를 중재할 수 있는 최적의 인물도 오바마다. 미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인 오바마는 ‘첫 여성 대통령’을 만들어내는 ‘킹 메이커’를 자처하고 나섰다. 역사와 대화하길 좋아하는 오바마다운 빅 프로젝트다.

조남규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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