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미국을 강타한 9·11 테러 이후 ‘테러’는 미국 대선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가 됐다.
9·11테러 이후 치러진 첫 선거인 2004년 대선이 특히 그랬다. 그해 재선에 도전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박빙 승부를 펼친 끝에 민주당 존 케리 후보를 꺾었다.
부시 대통령은 민주당 앨 고어 후보와 맞붙었던 2000년 대선에서는 과반 선거인단(271명)을 확보하며 승리했지만 일반 유권자 득표에서는 54만여표를 졌다.(연방제 국가인 미국의 대통령은 50개주와 워싱턴DC에서 선출하는 선거인단이 뽑는다. 각 주에 배정된 선거인단은 일반 유권자 투표에서 1표라도 더 많이 얻은 후보가 독식한다. 전체 선거인단 538명의 과반인 270명 이상을 확보한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
첫 번째 재임 기간 내내 ‘반쪽 대통령’이란 조롱을 받아야 했던 부시는 4년 뒤 치러진 대선에서 선거인단은 물론 일반 유권자 투표에서도 케리 후보를 301만여표 차로 꺾고 재선에 성공, 체면을 회복했다. 공화당 후보가 일반 유권자 투표에서 민주당 후보를 누른 것은 1992년 대선 이후 처음이었다. 9·11 이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인 ‘테러와의 전쟁’은 부시 승리의 일등공신이었다.
지난 12일(현지시간) 발생한 올랜도 총격사건으로 올해 대선에서도 테러 변수가 돌출됐다.
테러 변수는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과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 중 누구에게 유리하게 작용할까.
정치학자들의 유권자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체로 테러 위협이 고조된 시기에는 ‘공화당 후보, 남성 후보, 국가안보 분야 경력이 있는 후보’가, 그리고 강경책을 제시하는 후보가 더 능력 있는 후보로 비쳐진다. 국내 선거에서 ‘북풍(北風)’ 변수가 불거지면 보수 정당이 유리해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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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남성 후보’가 유리하다는 가설은 올랜도 테러 직후 실시된 로이터-입소스의 여론조사 결과와 일맥 상통한다.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후보를 묻는 질문에서 트럼프(45%)는 클린턴(41%)보다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국가안보 분야 경력에서는 클린턴이 트럼프를 압도한다. 클린턴은 2000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국방위를 노렸다. 그리고 국방위에 공석이 생기자마자 그 자리를 꿰찼다. 그는 워낙 성실하기도 하지만 군사위 청문회는 반드시 챙기며 펜타곤(미 국방성)과 미군의 신뢰를 얻었다. 외교안보 분야에서 클린턴은 민주당 내에서 매파로 통한다.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전쟁 개전 결의안에 주저없이 찬성표를 던졌다. 이 일로 2008년 민주당 대선경선에서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2005년 실시된 리더십 평가 조사에서 클린턴은 부시 대통령과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케리 상원의원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지만 국무장관을 거친 이후엔 상황이 달라졌다. 상원 군사위와 국무장관 경력으로 ‘민주당 여성 후보’라는 취약점을 보강한 것이다. 클린턴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국무장관 제의를 수용한 것은 2016년 대선까지 내다본 절묘한 한 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트럼프는 딱히 공화당 후보로 규정짓기도 힘든 ‘아웃 사이더’다. 대외정책과 관련해선 공화당의 ‘국제주의(개입주의)’ 기조를 반대하고 있다.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대외정책을 담당했던 인사들은 공식적으로 트럼프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은 정치전문매체인 폴리티코에 “트럼프는 공화당원으로 보이지 않는다. 공화당 이슈들을 배우려 하지도 않는다”면서 “클린턴 전 장관이 후보가 되면 그에게 투표하겠다”고 말했다. 아미티지를 비롯한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 담당자들은 대다수가 트럼프 반대파가 됐다. 트럼프가 ‘America First(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면서 부시 정부가 시작한 이라크 전쟁을 ‘외교 정책의 재앙’으로 매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시 집권기를 ‘실패’로 규정짓기도 했다. 참다못한 부시 전 대통령은 얼마 전 대변인을 통해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테러 변수는 전통적으로 공화당 후보에게 유리했지만 올해는 트럼프와 클린턴의 우열을 가리기 쉽지 않게 됐다.
트럼프는 올랜도 총격 범인이 아프가니스탄계 이민자 아들로 판명되자 ‘무슬림 입국 금지’ 공약을 다시 꺼내들었다. 트럼프의 반응은 9·11 테러 직후 무슬림 센터를 찾아가 “테러는 무슬림의 참 모습이 아니다”면서 단합과 연대의 메시지를 던진 당시 부시 대통령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공화당 경선 과정에서는 무슬림이나 히스패닉을 희생양으로 삼는 트럼프의 편가르기 전략이 백인 노동자층을 결집시키는 효과를 냈다. 무려 1330만여명이 트럼프를 찍기 위해 투표장에 나왔다. 편가르기 전략이 먹힌 것이다. 사실상 본선이 시작된 이후에도 트럼프는 이런 경선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이 전략은 본선에서도 통할까. 공화당 경선에서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은 45세 이상의 백인 노동자층으로 조사됐다. 본선에서는 이들의 비율이 낮아진다. 본선 승리를 위해서는 공화당 온건파는 물론이고 중도층과 무당파의 표도 필요하다. 특히 경합주(스윙 스테이트)에서는 중도층과 무당파의 향배가 중요하다.
2012년 대선에서 승리한 오바마 대통령이 얻은 일반 유권자 표는 6600만 표(선거인단 332명)에 육박했다. 공화당 밋 롬니 후보는 약 6000만 표(선거인단 206명)를 얻고도 졌다. 산술적으로 트럼프가 본선에서 이기려면 경선에서 얻은 표에 5000만 표 이상을 보태야 한다. 트럼프 마니아만으론 이 숫자를 채울 수 없다. 히스패닉과 흑인의 트럼프 지지율은 역대 공화당 후보 중에서 최저치다. 트럼프는 전문대졸 이상의 백인 고학력층에서도 클린턴에게 밀리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무슬림 입국 금지 같은 트럼프의 과격한 공약을 지지하지 않고 있다. 공화당 지도부도 마찬가지다. 공화당 1인자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 무슬림 입국 금지 공약을 공개적으로 반대한 것은 여론에 따른 반응이다. CBS와 블룸버그뉴스이 조사 결과, 유권자의 5분의3 이상이 무슬림 입국 금지 공약에 반대했다.
공화당 지도부는 트럼프가 공약을 순화해야 공화당 텐트가 넓어진다고 본다. 하지만 트럼프는 그 과정에서 자신을 띄운 지지층이 돌아설 것을 염려할지도 모른다. 트럼프는 선택의 갈림길 앞에 섰다. 하나는 기존 공약을 수정해서 외연을 넓혀나가는 전략이다. 다른 하나는 공약을 유지한 채 핵심 지지층의 투표율을 높이는 전략이다. 그는 어느 길로 걸어갈 것인가. 미국 대선의 주요 관전 포인트다.
조남규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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