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대선후보(이하 힐러리)는 1947년 10월26일생이다.

한국 나이로는 70세(만 69세)이지만 생일 기준으로 계산하는 미국 나이로는 68세다. 대통령이 되기엔 나이가 좀 많은 편이지만 나이가 걸림돌이 될 정도는 아니다. 힐러리는 남편 빌 클린턴의 선거 캠페인을 물론이고 자신의 상원의원 선거, 국무장관직 수행,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정적(政敵)도 인정할만한 끈기와 집념을 보였다. 건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힘든 일이다. 

힐러리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것은 국무장관 재임 말기인 2012년 겨울이다. 그해 12월 힐러리는 욕실에서 쓰러지면서 머리를 바닥에 부딪쳤다. 원인은 장염에 따른 탈수 증세. 이 달 11일 뉴욕에서 열린 9.11 테러 희생자 추모 행사장에서 사실상 졸도 상태에 이른 이유도 탈수 증세였다.(힐러리 주치의는 폐렴에 걸린 힐러리에게 항생제를 투여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힐러리는 2012년 추수감사절 연휴 전후로 중동과 동남아 등지를 순방하는 와중에 장염에 걸렸다. 결국 아랍에미리트를 포함한 중동 순방을 취소한 채 자택에서 쉬고 있는 동안 욕실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힐러리는 뇌진탕 진단을 받았다. 힐러리는 그 해 12월20일 미 하원과 상원에서 ‘벵가지 사건’(2012년 9월11일 리비아 무장괴한들의 테러로 리비아 벵가지에 있는 미국 영사관에서 크리스토퍼 스티븐스 대사 등 미국인 4명이 숨진 사건)과 관련해 증언할 예정이었다. 힐러리가 뇌진탕 후유증으로 증언 날짜를 미루자 보수 매체들은 일제히 힐러리가 증언을 회피하기 위해 ‘꾀병’을 부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 매체들이 최근엔 2012년 힐러리의 뇌진탕이 대통령직 수행을 위태롭게 할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는 공세를 펴고 있다. 이제 힐러리가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자 ‘꾀병’이 ‘중병’으로 변한 셈이다. 동일한 팩트를 입맛대로 해석하다보면 이런 자가당착의 사례를 만들어낸다. 

힐러리의 뇌진탕은 ‘꾀병’이 아니었다. 그의 건강은 캠프 내에서도 우려하는 사항이었다. 올해 대선에서 힐러리가 건강 문제에 발목이 잡힐 것이란 관측도 나왔다. 국무장관 퇴임 직후 힐러리는 대선 출마가 어려울 것이란 평가가 나올 정도로 초췌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1일(현지시간) 미국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대선후보가 뉴욕 맨해턴의 9·11 테러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에서 열린 추모식에 참석했다가 휘청거리며 쓰러지려 하자 수행원들이 클린턴을 부축해 밴 차량으로 데려가고 있다.(왼쪽 사진) 딸 첼시의 아파트로 이동해 잠시 휴식을 취한 클린턴 후보가 손을 흔들며 밖으로 걸어나오고 있다.
뉴욕=AFP연합뉴스
그래서 힐러리가 기침을 할 때마다, 그의 다리가 휘청거릴 때마다 건강 이상설이 불거진다. 

대선 쟁점으로 떠오른 건강 문제는 판세를 뒤흔들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을 만한 병이 확인되지 않는 한 뇌진탕 후유증이나 졸도 정도의 건강 문제가 주요 변수가 되진 않는다. 힐러리는 수십년의 정치 역정 속에서 불굴의 투지와 집념으로 수많은 난관들을 돌파해왔다.

힐러리는 빌 클린턴 정부 초기 퍼스트 레이디로서 의료개혁을 진두지휘하다 의회와 이해 단체의 반발에 부닥쳐 좌절했다. 그 직후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대패했다. 민주당 내에서 힐러리 책임론이 일었다. 모니카 르윈스키로 대표되는 남편의 수많은 여성 편력은 한 남자의 아내로서 깊은 절망을 맛보게 했다. 2008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버락 오바마게 패배한 것은 오랜 정치적 동지들의 배신 속에서 이뤄진 실패이기에 더 참담했다. 지금도 힐러리는 절반 가량의 국민에게서 미움받는 대선후보다. 보수 진영의 공적(公敵) 1호다. 그는 여성이라서, 그 것도 진보적 성향의 여성이라서 더 미움받았다. 힐러리가 좌절할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는 쓰러질 때마다 쓰러진 자리를 딛고 일어섰다. 

힐러리는 아버지 휴 로댐과 ‘절친’(연인 사이였다는 주장도 있다) 빈스 포스터의 장례식을 치른 직후 의료보험 개혁 법안 통과를 위해 밤낮없이 일했다. 그 것은 역경에 부딪혔을 때마다 생각에 잠길 시간을 갖지 않기 위한 그만의 치료법이었다. 여성이 어떤 심정으로 남편의 불륜을 용서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단한 각오가 필요한 일임에는 분명하다.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편의 불륜이 중계방송된 힐러리의 경우에는 더 특별한 마음가짐이 필요했을 것이다. 힐러리는 빌을 용서했다. 이후 빌은 힐러리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헌신적으로 뛰었다. 초짜 상원의원(오바마)에게 역전패당하는 경험은 선거를 치러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 심정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힐러리는 승리한 오바마의 장관으로 입각해 재기의 발판을 다졌다. 패장에게 손을 내민 오바마도 특별하지만 적장의 밑으로 들어가 그를 주군처럼 모신 힐러리도 대단하다. 올 대선후보 경선도 쉽지 않은 게임이었다. 그렇지만 힐러리는 불굴의 투지로 여성으로는 미 역사상 처음으로 유력 정당의 대선후보가 됐다. 이제 마지막 유리천장을 깨기 직전이다. 건강 문제로 쓰러지기엔 정신력이 강한 정치인이다. 정신은 육체를 이긴다. 

조남규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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