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심리학자인 피터 웨이슨(Peter Wason)이 제시한 ‘확증편향(確證偏向, Confirmation bias)’이란 가설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주장이다.
미국 대선후보 1차 TV토론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는 웨이슨의 확증편향 가설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 보다 토론을 잘했다는 응답이 그 반대 응답 보다 두 배 이상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두 후보의 지지율 격차는 변화가 없었다. 토론을 지켜봤다는 응답자만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클린턴의 지지율이 다소 상승했으나 대세를 좌우할 정도는 아니었다.
클린턴은 철저한 사전 준비를 통해 트럼프를 궁지에 몬 것은 사실이다. 트럼프가 여성,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이미지를 더 부각시킨 것도 맞다. 말싸움에선 클린턴이 확실히 이겼다. 그렇다고 트럼프 지지자들이 마음을 바꾸지는 않는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들 중에는 트럼프가 여성, 인종차별주의자라서 지지한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클린턴이 토론을 더 잘해서 클린턴을 더 미워하는 사람들도 많다.
앞으로도 두 번의 토론이 더 남아있지만 트럼프의 성품이나 인성 같은 자질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클린턴의 자질도 썩 좋은 평가는 받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번 대선이 ‘비호감 후보’의 대결, 최선도 차선도 없으니 최악이 아닌 ‘차악(次惡)의 후보’라도 뽑자는 선거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트럼프가 다음 번 토론부터 더 공세적으로 나갈 수도 있고, 미 언론의 보도대로 빌 클린턴의 여자 문제를 거론할 수도 있겠지만 트럼프의 머릿 속에는 그를 공화당 후보로 만들어준 백인 노동자층을 단 한 명이라도 투표장으로 이끌어내겠다는 생각 뿐이다. 그렇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면 빌 클린턴의 여자 문제 뿐 아니라 힐러리 클린턴의 남자 문제도 꺼내들 위인이다.
백인 투표율은 2004년 대선 때 67.2%를 기록한 뒤 하락 추세다. 2012년 대선에선 64.1%에 그쳤다. 2004년과 비교해서 백인 1000만명 정도가 투표장을 외면했다. 반면 투표장을 찾은 흑인과 히스패닉 유권자는 같은 기간 400만명 가량이 더 늘었다. 흑인 투표율은 2004년 60.0%에서 2012년 66.2%로, 히스패닉 투표율은 2004년 44.2%에서 2012년 47.3%로 상승했다.
공화당은 백인의 투표율 하락, 소수 인종의 투표율 상승이 오바마 대통령의 2012년 재선 캠페인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본다. 2008년 첫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이후 백인층의 오바마 비토 정서에 편승했던 공화당이 오바마 재선 이후 오바마 정부의 이민개혁 조치에 동조한 것도 해마다 유권자가 늘어나는 소수인종을 끌어안지 않고서는 대선 승리는 요원하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는 30일(현지시간) 새벽 트위터에 비하 발언 논란의 당사자인 1996년 미스 유니버스 알리시아 마샤도(40)를 향해 '역겹다'며 섹스 비디어를 언급했다. 사진은 1996년 5월 17일 미스 유니버스를 수상한 베네수엘라 출신 마샤도(왼쪽)의 모습. |
트럼프의 발언은 솔직히 정상적인 사람의 귀에는 좀 거슬린다. 정치판을 잘 읽는 전문가들의 눈에는 선거를 망치려고 작정한 후보처럼 보인다. 트럼프는 1차 TV토론에서 여성 비하 발언으로 곤욕을 치른 다음 날 미스 유니버스 출신 여성의 몸무게를 거론하면서 “최악의 미스 유니버스”라고 비난했다. 필자 같은 정상인들은 주변 여성에게 몸무게를 물어보는 것도 대단한 실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트럼프의 뇌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어떤 카드를 버린다고 포커 게임에서 지는 것은 아니다. 트럼프는 백인 노동자표를 손에 쥐고 클린턴을 누를 수 있는 패를 만들어가고 있다.
조남규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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